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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109화 (102/208)

00109  제비꽃, 피어나다  =========================================================================

시야를 회복한지 얼마 안된 비올렛이 당도한 것은 또다른 거대한 방(chamber)이었다. 새하얀 공간위에 폭신한 붉은 융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비올렛을 맞이하는 것은 새하얀 휘장이였다. 휘장 너머에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 교황이었다.  비올렛은 그 휘장 너머의 존재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성하를 보게 해주십시오.’

정신을 차린 비올렛이 맨 처음에 말한 것은 그것이었다. 아직도 손등이 욱신거렸다. 계약의 증표, 낙인, 가디언.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에셀먼드라는 것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다. 물어볼 것도 많았고, 이야기 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우선 그녀는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교황을 알현하러 가는 것이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교황을 만나면 그녀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게 변할 것이다. 하지만 비올렛은 에셀먼드가 있었다. 그녀 혼자였다면 교황이 자신을 만나러 올 때까지 만남을 피했을지도 몰랐다. 교황을 만나야겠다는 비올렛의 말에 체자레는 미소지으며 당연히 만나야한다며 그녀를 데려갔고, 그녀 앞에는 휘장이 놓여 있었다.

“먼길 발걸음 하느라 수고했네.”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가 휘장의 너머에서 들려왔다. 비올렛은 그것을 들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장난치지 마.”

그녀가 차갑게 대답했다. 신관들은 모두 알현실 바깥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비올렛과 에셀먼드, 체자레였다. 에셀먼드는 돌변한 그녀의 말투에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었던 고개를 들어 그녀와 휘장 너머의 인간을 번갈아 보았다. 체자레는 자못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다소 무례해 보일수 있는 언사임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로지 에셀먼드만이 그녀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는 듯 다소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비올렛은 교황의 인사에 답례도 하지 않고  냉큼 올라가 새하얀 휘장을 뜯어내다 시피 걷어냈다. 촤르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휘장에 가려졌던 시야가 보여 황금색 의자에 앉은 이의 모습이 보였다. 반짝거리는 금실이 수놓아진 옷이 보였다. 그리고 통이 넓은 곳에 자리 잡은 하얀 손도. 비올렛이 직접 휘장을 걷고 그의 공간에 들어갔다. 황금의 의자에 앉은 이는 그녀가 익히 알던 소년으로,  그는 금안을 둥글게 휘며 천진하게 웃었다.

“으아, 이미 들켜버렸던 거야?”

“마지막까지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모를리가.”

비올렛이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에 앉아있는 소년이 키득거렸다. 그리고 그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당신을 환영하오, 성녀 비올렛.”

비올렛의 손을 꼭 잡고 휘장을 걷으며 나온 그는 비올렛의 손에 볼을 부볐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의 얼굴처럼 순수하게, 그러나 타오르는 풋정의 열기를 담아 기묘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나는 74대 교황 린도.”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올렛과 비슷한 키라 눈 높이가 맞았다. 그의 황금의 눈은 진지했다.

“이 성도의 주인이자 신을 모시는 자들의 왕, 그대 다음으로 신에 가까운 자.”

소년의 모습. 그러나 오래도록 ‘소년의 모습’을 지녔을 남자의 눈에는 서린 눈빛은 순수하였으나, 풋풋하지는 않았다.

“그대, 성녀 비올렛과 함께 신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외다.”

그러나 비올렛에게 향하는 그 눈빛만은 너무도 따스했다. 비올렛은 라즈니, 아니, 린도를 바라보았다. ‘성녀 증명’때 라즈니를 보고 알아차렸다. 저런 성력을 가진 사람이 흔할리가 없었다. 만약 체자레나 저런 자들이 흔했다면 이미 왕권과 신권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교황의 나라가 되었으리라.

라즈니가 신관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 비올렛은 깨달았다. 그는 힌트를 주고 있었다. 단 한번도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으며 자신은 성력으로 외모를 바꿀 수 있다 하였고. 변하지 않는 열  다섯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체자레처럼. 그리고 비올렛을 ‘동등’하게 대하고 체자레를 대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다. 그리고 체자레의 명령을 어기고 레기우스 살바나에서 에셀먼드를 치료했다. 애초에 체자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자가 있을리가 없었다. 바로 교황을 제외하고는.

린도가 웃었다.

“그러니까 비올렛, 이제 너를 매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뻐.”

환하게 웃던 린도의 시선이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한 에셀먼드에게 머물렀다. 비올렛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린도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아무말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시선에 서린 적대는 비올렛도 알 수 있었다. 기억났다. 에셀먼드와 린도가 처음 만났을때, 에셀먼드는 린도에게 다짜고짜 검을 겨누었다. 비록 에셀먼드를 치료해주었다고는 하나 린도가 에셀먼드에게 가진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린도가 입을 열때 비올렛이 속삭였다.

“성하, 이렇게 먼길을 쉼없이 오는건 처음인지라 몸이 피곤합니다.”

“맞다, 아팠었지? 어땠어? 내가 그래서 내 피를 줬는데, 지금은 괜찮은거야? 진작 말하지! ”

“......?”

피라니? 비올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라니? 그런걸 본 기억은 없다. 그것이 체자레가 보낸 약인가? 아니 일단 그게 피라는 기괴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그녀가 먹었던 요리나 음료에 섞어서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에셀먼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어쩐지 에셀먼드가 시선을 피했다. 역시 그랬구나. 비올렛은 혼자 납득했다. 그런데 왜 시선은 피하는것일까. 그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에셀먼드에게 시선을 주자 린도가  비올렛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의 시선은 에셀먼드에서 자연히 린도에게로 넘어갔다. 린도는 마치 자신의 집을 자랑하는 어린 아이와도 같이 교황성을 거닐었다. 사실 그녀는 교황성의 화려함에 내심 질려 있었다. 이곳은 마치 체자레의 성과 같았다. 수수해 보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화려함으로 그득한 곳이었다.

그녀는 교황성을 나섰다. 봄이 다가오는 듯 따스한 바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교황성을 나와 샛길로 가자 조그마한 하얀 궁전이 보였다.  이곳은 말로만 듣던 성녀가 거하는 백궁이었다. 어떤 돌을 썼는지 사시사철 하얗고 깨끗하게 빛난다는 희귀한돌들도 이루어진 성벽은 정말 말 그대로 하얗게 빛이 나고 있었다. 이 작은 궁전의 정원은 새하얀 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그곳은 제비꽃 따위는 없었다.

내부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녀를 위해 마련된 백궁은 120년동안 주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로 건축한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했다. 이곳이 그녀의 공간이라니, 국왕마저도 국왕이 거하는 침소가 있고 왕비가 거하는 침소가 한 곳에 있었다. 궁을 따로 따로 가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후작가에만 머물러서 몰랐다. 왕, 교황, 성녀. 이 나라의 상징이자, 신의 문양답게. 그녀는 이 궁전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자, 이곳이 네가 묵을 곳이야!”

두근거린다? 아니, 그녀는 이것이 두려웠다. 이것은 커다란 감옥이었다. 전대 성녀들은 이곳을 궁이라 부르며 정을 붙일 수 있었을까? 린도의 손에 이끌려 간 곳에는 복도 양끝에 일렬로 늘어 선 시녀들이 보였다. 모두들 공손한 얼굴이었다. 이들이 자신을 모실 사람이라니. 이 규모에 놀랐지만 그녀는 애써 놀라지 않은 척 했다.

“수발을 들 아이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체자레의 목소리에 비올렛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봤자, 앤을 대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시선들을 보았다. 그러다 비올렛은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어떤 하녀와 눈이 마주쳤던 탓이었다. 부동의 자세였으나  그 자세와 눈빛은 한눈에 보기에도, 제대로 교육 받은 태가 나지 않았다. 그 불완전함과 서투름은 어린 그녀를 연상하게 했다.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아이로 하죠.”

하지만 비올렛은 그 소녀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소녀의 눈동자는, 그녀가 잃어버린 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의 이야기가 끝나고 비올렛은 겨우 방에 들어가 쉴 수 있었다.

“이름이 뭐지?”

“리체라고합니다.”

소녀가 대답했다. 자신에게 향하는 절대적 경외의 시선을 비올렛이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다. 그래도 최소한 자신을 배신하지는 않을거라며 비올렛은 리체에게 차를 내오라 시켰다. 그리고 방안에 있는 이 남자를 보았다.

“.......”

그녀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그녀와 약간 떨어진채로 서 있었다. 완벽한 호위를 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달라진게 있다면, 이제 그의 지위는 왕의 기사에서 그녀만의 기사로 바꾸어진 것이었다. 맹세는 해버렸고 이제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가디언과 성녀의 증표는 이렇게 손등에 나타나있다. 비올렛의 입술에 한숨이 나왔다. 기분탓인지 모르게 비올렛은 에셀먼드가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녀가 긴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보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혼자 남아있는 에이든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후작이 그렇게 까지 지키려 했던게 가문임을 알고 있지 않냐고 묻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기심으로 선택을 해버렸으니, 그를 탓할수 조차 없다.

이 사람은 그저 속죄를 원하는 것 뿐이다. 그런 깨끗하고 올곧은 마음을 이기심으로 받아들여버렸다. 비올렛은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돌아가 여독을 푸십시오. 오라버니.”

조용히 눈을 감으며 그녀가 한숨처럼 말했다. 무언가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피곤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기도 힘이 들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그의 입이 열렸다.

“에셀먼드입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올렛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에셀먼드가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설 뻔했으나, 그 뒤는 아쉽게도 넓은 창문이었다. 에셀먼드는 진지한 얼굴로 비올렛에게 말했다.

“성녀님도 저도 성을 버렸습니다. 이젠 나는 당신의 오라비가 아닙니다.”

그래. 그랬다. 비올렛은 생각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첫째 오라버니로서 존재했다. 그런 그를 마음에 담았다는게 아이러니 했지만, 그의 위치는 그녀의 오라버니였다. 이젠 그게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 한다.

세속의 인연을 버렸다. 이제는 가디언과 성녀만이 남았다. 궁에서는 ‘오라버니’를 공적으로 대했지만 지금은 그 ‘오라버니’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오라비가 오라비가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달랐다. 과연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 그녀는 모순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이 순간을 바라면서도, 이 순간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에셀먼드 경.”

그녀가 대답했다. 오로지 그녀만이 힘들었다. 그녀만이 애달파하고, 그녀만이 가슴떨려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억울하긴 했지만, 에셀먼드가 지적한 것이 맞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버렸다. 그렇다면 비올렛 역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맞았다.

“돌아가 여독을 푸십시오. 물론 이것은 명령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창쪽으로 등을 돌렸다. 굳이 명령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에셀먼드가 호위의 명목으로 그녀의 곁에 붙어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에셀먼드의 발걸음 소리가 나고. 방안엔 정적이 맴돌았다. 그녀는 이 화려하고 낯선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만을 위해 마련된 아름다운 장소였다. 어렸을적 후작 가의 방을 화려하다 생각하고 벌벌 떨었던 그녀의 옛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과 그것은 다를게 무언가. 이것은 또다른 시작에 불과했다.

“에셀먼드.”

그녀가 이름을 중얼거렸다. 분명히 달랐다.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은 새로운 곳, 신전. 다 자란 것 같지도 않은데 세상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변화를 강요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익숙하지 않은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자 리체가 차를 내 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살짝 잔을 놓았다. 한눈에 봐도 앤 과는 다른 서툰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 어설픔이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잃어버린 눈동자를 한 소녀는 비올렛을 보며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리체의 표정이 변했다.

“성녀님, 얼굴에 식은땀이 나요!”

그녀가 다가왔다. 긴장이 풀리니 다시 몸이 아파오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린도는 너무나 급하게 그녀를 데려왔다. 자신의 피까지 주어가며 말이다. 성녀의 피가 힘이 있듯 교황의 피도 힘이 있던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복잡했다. 리체가 부산을 떨며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고 그녀를 눕혔다. 낯선 천장에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에이든이 후작위를 받게 되었나? 다니엘은 어떻게 되었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머리는 복잡해져왔다. 다시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비올렛은 며칠동안 다시 앓아누워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와..컴백해서 그런가 조회수는 반토막났는데 추천도 높으시고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투베에 올랏네요. 나름 화려환 귀환인것같아 감사합니다. 정말이에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ㅠㅠ(x100)

다음 편은 되도록 빨리 돌아오면 금요일, 아니면 토요일에 돌아올 것 같습니다. 미리 써두긴 했음.. 신전의 팔불출이보일거라능..

취재때문에 요리조리 여행할거에요 ㅋㅋ 내 트위터보는 사람들.. 저 먹방로드 다니는거 아녜여!! ㅠㅠ 트윗에 사진도 올릴거라능!!

사실 수더수 외전집도 그렇고, 원고도 11월 30일이고 후제꽃도 써야하니

제 생애 처음으로 멀티라는걸 해보네요.

게다가 내일은 밤별격 배송이당 와아앙

그래서 일단 서울을 가고. 여튼 항상 잉여잉여 잉여퀸이었던 제가.. 이렇게 바쁘다니..

세상일은 모르는것..

일단 새벽 4시 50분 기상이라 올리고 먼저 잡니다. 오탈자가 있더라도 좀 늦게 고칠 거에여..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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