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원에 핀 제비꽃-100화 (93/208)

00100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

저 아직 한달 안쉼..

<100회군요. 100회 기념으로.. 제가 준비한 비지엠.. 들어주시겠어여?

리베라 합창단의 Sanctissima 라는 곡입니다. 뜰, 뜰 게시판 둘다에 준비해뒀어요. 트위터는 유투브 영상 링크했습니다.제가 들으라 할때 꼭 들어주시면.... 더 좋으실거에요. 비지엠이 필수는 아닙니다만 들어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중요한 편입니다. >

비가 내림에도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둑한 하늘, 한 낮인데도 해는 꺼먹한 먹구름에 뒤덮여 밤처럼 어두웠다. 먹구름 뒤에 희미한 금빛만이 지금은 낮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친 비는 아니었으나 비의 양은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올렛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았다. 그저 이곳은 마녀 재판장 처럼 비올렛을 심판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사고를 하는지 비올렛은 충분히 알고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고는 비올렛 역시 했다. 언제나 일정 계급 이상의 여인들만이 성녀였던 기록과는 다르게 비올렛은 천민중에 몸을 파는 창녀들 사이에서 신에게 선택되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본 태생이 천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기를 도축하여 다듬는 도살업을 했으니, 알면 알수록 그녀의 천함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그녀가 성녀라는게 이상했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때마다 악의를 담아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출신이 뻔했기에 이국의 칸을 유혹했다가 실패했다던지, 후작가 내에서 여러 남자들을 꼬드겼다는지, 품위, 얼굴, 출신 그 모든 것들을 지적하고 비난해댄다. 하지만 비올렛은 의연했다. 오히려 비올렛의 곁에 있던 로디온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따금 이를 가는 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후작은 혐의자였을 뿐 죄인은 아니었고 병중이기에 오늘 이 자리에 호송된 것은 장남인 에셀먼드였다. 물론 후작이 몸져 누워있는 그 방은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그를 포박하여 호송할 수 있도록 그들을 에워싸고 있으리라. 후작은 잠들어 있었고. 운명의 시간, 에르멘가르트 일가는 모두 성기사단의 손에 끌려 나왔다.

비는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넓은 광장은 귀족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따금 광장에 연설을 하기 위해 마련된 자그마한 탑에 왕과 왕자가 서 있었다. 비올렛은 샤를이 비올렛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즈니는 비올렛과 반대된 상태였다. 비에 흠뻑 젖어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는 비올렛과는 달리, 극진하고 깍듯하게 모셔져 산뜻해 보였다. 그녀는 무척이나 귀한 피를 지니고 태어난 여자라는 목소리가 이곳 까지 들렸다. 라즈니는 비올렛을 보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입꼬리가 축 쳐져있어, 이 상황을 불쾌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까만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것이 비올렛의 이마와 머리에 뚝뚝 떨어진다.  붉은 성복을 입은 체자레가 아그레시아의 10명의 대신관들과 함께 나타났다. 장내는 조용했다. 이 진풍경에 평민들도 거지들마저도 광장 끄트머리에 모여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그레시아의 모든 귀족들과 대신관들, 그리고 ‘성녀 후보들’이 모인다는 것은 확실히 진귀한 구경거리긴 했다.

체자레는 광장의 가운데에 선 비올렛과 라즈니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에셀먼드를 비롯한 에르멘가르트 일가가 서 있었다. 다니엘이 비올렛을 노려보는것이 느껴졌다. 에이든 역시 이 시선에 눈을 감고 있었다. 에셀먼드는 그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더욱 더 어두워졌다.

“추기경, 언제 까지 비를 맞고 있어야 하는건가요.”

라즈니가 말했다. 체자레는 그들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작해봅시다.”

그가 말했다. 열명의 신관이 비올렛과 라즈니를 번갈아 보았다. 누가봐도 순결하고 깨끗하며 젖지 않은 옷을 입은 라즈니와, 비에 흠뻑 젖은 비올렛은 대비되어 보였다.

“이 자리는 두 명의 성녀 후보가 나타난 것에 대해 진실을 가리고자 마련된 자리입니다.”

체자레가 말했다.

“에르멘가르트 후작은 ‘대리 성녀’를 세워, 신권을 훼손하고,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든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계신 오른쪽의 후보자께서는 확실히 성녀의 증거를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라즈니에게 꽂혔다. 두건 아래의 아름다운 선을 가진 얼굴이 눈에 띈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 아름다움과 기품에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빼앗겼다. 베일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그녀는 분명히 비올렛과는 달랐다. 범접할 수 없는 여유가 있었다.

“자, 라즈니. 당신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말하자 라즈니가 빙긋 웃어보였다.

“запалка”

그녀가 가볍게 말하자 빛이 발하며 그녀를 에워쌌다. 어둑한 광장에서 순백만이 새하얗게 빛을 발했다. 그 하얗게 터져나오는 빛은 따스한 바람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타고 지나갔다. 싸늘한 비 때문에 빼앗겼던 온기가 다시 그들 사이에 타고 흘러내렸다. 젖어있던 옷들이 마르고 있었다. 물론 비올렛도 그것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느끼는 비올렛은 별 감흥이 없었다. 비올렛은 그저 에셀먼드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그녀는 신어를 사용할 줄 알며, ‘성녀’라는 이름에 마땅한 힘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모두가 다 성녀님의 힘을 느끼셨으리라 믿습니다.”

서늘한 초겨울 날씨에 부는 훈풍에 사람들은 모두 신의 온기를 처음으로 체감했다. 그녀의 힘은 저 멀리 있는 평민들에게 까지 다가가 따스하게 그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것이 성력이다, 이것이 신의 힘이다. 사람들은 경외어린 시선으로 라즈니를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체자레의 말에 바로 옆에 있는 초라한 비올렛에게 꽂혔다. 그 시선이 라즈니와 다를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천민 출신, 창녀임에도 감히 성녀를 사칭한 발칙한 여자. 신의 저주를 살 여자.

“비올렛, 당신의 자리를 증명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비올렛이 자신이 성녀가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침묵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올렛은 다시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회색의 하늘은 결코 맑개 개이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라즈니의 새하얀 성복만이 이곳에 유일한 색깔이 있는 존재인 것 같았다. 바로 순백의 색이었다.  그 색에 눈이 부셨다.

“당신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다간, 에르멘가르트 후작 가는 이대로 신성 모독죄를 쓰게 됩니다. 물론 그 죄가 신성왕국에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는 알거라 믿습니다.”

체자레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했다. 저 멀리서 평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녀를 매도하는 소리 일 것이다. 그 원초적이며 노골적인 단어들은 평민들을 타고 와  귀족들에게까지 타고 올라왔다. 라즈니를 경외하는 만큼 비올렛을 향한 적대감은 더욱더 컸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라즈니를 떠받드는 것이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듯 했다.

더러운 창녀, 비올렛.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관없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비난해도 이것은 익숙하게 겪어왔던 일이다. 입을 다물면 모든 것이 완료될 것이다.

성녀라는 것은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니다. 그 고귀한 자리를 라즈니가 떠맡게 될 것이며 에르멘가르트 후작 가는 멸문할 것이다. 스러져 갔던 부모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질  것이며 삶의 터전을 빼앗겼던 그녀의 분노도 충족될 것이다. 저 모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몸져 누워있는 후작을  떠올린다. 이제와서 비굴하게 미안하다고 말했던 그 남자를. 분명 그 남자는 비올렛을 데려왔을 적, 커다란 몸을 가진 산과같은 거대함이 있었으나. 지금은 초라함만이 존재했다.

에이든을 바라본다. 차마 말하지 않고 있으나 그 시선에 서린 간절함을 잘 알고 있다. 다니엘을 바라본다. 그는 그녀를 저주하고 있다. 그의 일이 아니었으면 비올렛을 창녀로 매도하는 사람중에 하나가 다니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에셀먼드를 바라보았다.

소유하지 못하면 망가트릴수 있다 했다. 이제 그는 철저하게 망가트려질 것이다. 그의 고고함은 땅에 곤두박질 치겠지. 패트리샤와 결혼 따윈 꿈도 못 꿀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채 목숨을 잃겠지. 그의 맑은 시선이 비올렛을 향한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사람들의 비난어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올렛은 에셀먼드를 바라본다.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모욕과 비난은 비올렛뿐만 아니라 에셀먼드에게 향할 것이다. 그의 맑은 명예도, 새파란 미래도 짓이겨질 것이다. 무패의 기사라던 그의 고명(高名)은 사라지고 검과 같은 그의 이상은 녹슨 검이되어 철저하게 유린되다 부러질 것이다. 그것을 과연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절대로 할 수 없다.

강제로 침묵하게 했던 마음이 새어나온다. 억눌렀던 마음이 결국 자리를 박차게 하고 나온다. 이미 한 차례 타올랐던 마음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릴수가 없다. 이렇게나 아프고 괴로운데, 그녀가 떨어져 있는 지옥을 그 역시 겪에 할 수는 없었다. 에셀먼드는, 그녀가 좋아하던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후작의 시도는 성공했다. 비올렛은 결코 그를 배신할 수가 없었다. 후작은 비겁하고 졸렬하다. 어떻게 마지막 진실을 그렇게 알려주는 것인가. 차라리 끝까지 미워하게 두어야 했다.

‘폐하의 명이었습니다. 당신을 버린게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비올렛은 앤에게 달려가 진실을 물었다. 진실을 알 기회가 많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버렸다는 비참한 결과만 마주할까봐.

‘폐하께서는, 교황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날려버린 도련님께 분노하셨어요. 그래서......’

왕명으로 억지로 차출된 기사. 그것은 대장군의 가문의 불명예므로 자원이라는 형태로 그는 새파란 나이에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피의 소용돌이 속에 걸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에셀먼드는 지금의 그녀보다 불과 두살 많은 나이였다, 겨우 열 여덟이었던 것이다.

버린게 아니다. 처음부터 그는 그곳을 갈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올렛을 만나지 않은게 아니다. 처음부터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3년간 전쟁터에 힘든 나날을 보냈어도 그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처럼 변하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비올렛의 까맣게 타들어가 썩어버린 마음일 뿐이었다. 어깨에 입었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숨겼던 것처럼 그는 언제나 이렇게 숨겨왔던 것이다. 언제나, 늘. 그것은 분명히 비올렛을 배려한 따스한 마음이었다. 증오스럽게도 따스한 마음. 그런 그를 어떻게 비올렛과 같은 지옥으로 데려오겠는가. 그는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만 했다.

비는 기껏 라즈니가 말려준 비올렛의 옷을 적셨다. 눈물은 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눈시울로 에셀먼드를 바라보던 비올렛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입을 연다는 행동에 사람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저는 신어를 모릅니다.”

비올렛은 말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그녀를 비난했다. 노골적인 욕설과 비난이 섞인 음성을 듣고 비올렛은 눈을 감았다. 비올렛은 자신의 곁에 선 로디온을 흘낏 보았다.  그는 이 상황에 당장이라도 검을 들어 그들의 목을 베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단 하나 증명할 수 있는게 있습니다.”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는 다시 조용한 광장에 울려 퍼졌다.

“로디온 경.”

비올렛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서린 기이한 힘에 사람들은 또다시 말을 멈추고 비올렛을 보았다. 왜 갑자기 옆에 서 있는 성기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일까. 그녀의 기행에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행동 숨소리 하나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무언가가 다른 것이 있었다. 비올렛의 얼굴은 진지하며 엄숙했다.

“이리 와주십시오.”

비올렛의 말에 로디온 경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비올렛이 로디온 경의 검을 빼낸 것은 순식간이었다. 로디온 경은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는 비올렛을 믿는 절대적인 ‘신자’였으므로. 그러나 그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해 했다.

“성녀님!”

비올렛은 말을 무시했다. 로디온의 검은 폭이 좁고 얇아 다행히 비올렛이 다루기에 무겁지 않은 검이었다. 검을 빼어든 여린 여자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구석이 있어, 사람들은 침묵한 채 비올렛을 보았다.

“무슨짓을 하려는 겁니까!”

“지금 이게 무슨짓입니까.”

체자레와 라즈니에 그녀가 하는 행동에 당황해 동시에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지 성기사들은 그에 맞추어 움직였다

“성녀님을 지켜라!”

그들은 라즈니를 에워쌌다. 하지만 그것을 못마땅하게 본 라즈니가 소리쳤다..

“물러나십시오!”

그녀는 비올렛에게 다가서려했지만 이미 그녀는 성기사단에게 가로 막혔다. 허나 그것은 비올렛에게 이미 신경 밖의 일이었다. 라즈니가 어떤 태도를 취하건, 그녀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검을 바라보았다. 결국 선택을 했다면.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검을 자신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체자레의 얼굴을 향해 애처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성녀는 죽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어 망설임 없이 배를 찔렀다.

푹,  하는 소리가 나며 피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차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비올렛의 입가에 울컥, 하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결국 입증하지 못해서 비난을 무릅쓰고 자결인가. 그 끔찍한 장면을 보며 누구나 다 똑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아, 안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안타까운 비명소리는 비올렛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비올렛은 신어를 모른다. 그것이 체자레가 깔아놓은 연막이라면, 다른 것으로 증명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신관들은 신체의 위협에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녀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열 넷의 여름날, 자살 시도 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여자의 음성을 들었다. 넌 죽을 수 없단다. 라는 안타까워하는 그 음성을.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죽음을 갈망했다. 이 나라가 아닌 이 세상이 너무나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죽을 수 없기에 그녀는 결국 말룸에게 죽으려 했다. 후에 세상이 어찌되든 관계없이. 그렇게 복수하려고 했었다. 이 세상은 비올렛에게 너무나 불친절 하며, 잔인했으니.  비올렛의 의식이 아득해진다. 어두운 하늘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따사로웠다.

“두 번 다시,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하지 말라 했건만.”

여자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검고 긴 생머리를 가진 여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눈을 감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슬픈 그늘이 자리해 있었다. 진정으로 비올렛을 가여이 여기는 모습.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꿈속의 여인은 다정하게 말했다.

“넌 죽을 수가 없단다.”

“알아요. 그렇지만 날 증명하는 건 이런 것 밖에 없는걸.”

“.....너를 증명한다고?”

“내가, 신에게 선택받은 성녀라는걸 증명할 수 있는건 내가 죽지 않는 다는 것 밖에 없어요. 나는 신어를 모르니까.”

“신어를?”

그녀는 속삭였다. 그 투명한 환영은 그녀의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마치 보이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붉은 남자를 향했다. 잠시동안 환영인 그녀와 체자레의 시선이 마주했다는 착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가르쳐 주지 않은 게 아니야. 그것은 스스로 깨닫는 거란다. 너는 신을 부정하고 저주했지, 심지어 성력을 쓰려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네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될 거야. 너는 진정한 신의 대리자란다.”

이젠 물러설 수 없었다. 이것이 어떤 선택인줄 알면서도 비올렛은 그것을 택했다. 사실 알고 있다.  그녀가 미워한 것은 세상이었지, 후작 가문이 아니었다. 후작이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은 이유가 있었고, 에셀먼드가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인과는 복잡하고 유기적 관계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역시 마찬가지리라. 그녀의 결정 하나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것은 에셀먼드가 어렸을적에 뼈져리게 알려준 교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숭고한 핑계. 그저 그녀는 에셀먼드를 짓밟고 싶지 않았다.

비올렛의 눈에서 눈물이 타고 흘렀다. 이제 이 선택으로 그녀는 완벽하게 그와 단절된 삶을 살 것이다. 이젠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비올렛은 왜 자신이 그동안 신전에 가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중립을 원하는 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에셀먼드를 끝까지 보고 싶어서.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싶어서 후작 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쿨럭, 하고 다시 피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고통보다는 묘한 쾌감이 자리 잡았다. 선택의 짐을 내려놓았다는 것에 대한 편안함. 결국 그녀가 택한 것이 가장 택하고 싶지 않았던 그에 대한 마음이었다는 아이러니함이 너무 우스웠다.

“가여운 아이.”

비올렛의 슬픔을 알아차린걸까. 그녀의 음성은 연민으로 떨리고 있었다. 여인의 하얀 손이 비올렛의 상처부위를 쓰다듬었다. 상처부의의 격통이 사라져간다. 비올렛의 귀에 여인이 그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여인은 그 꿈결과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자아. 날 따라 해보렴. 나의 아이야.”

검을 타고 비올렛이 흘린 피가 흘러내린다. 그녀가 입고 있던 비에 젖은 옷이 피로 물들어간다. 순간 비가 그쳤다. 그러나 바닥에 서린 물기에 피는 빗물과 섞여 널리널리 퍼졌다. 그 흘러내린 피가 땅을 적시고, 적시고 또 적신다. 비올렛은 배에 꽂혀진 검을 뽑았다. 상처 부위에 피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보통 배를 찌른 검엔 장기가 나와야 했으나 검은 깔끔하게 뽑혔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비올렛의 다리를 물들었다. 이제 그녀가 입고 있던 흰 옷은 붉은 옷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떠한 언어를 중얼거리는 여자의 음성을 들었다.

칼에 찔려 자결을 선택했던, 그 천민 여자는 분명히 죽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죽어가는 이 특유의 신음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신의 말였다. 그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마치 마음속을 울리는 듯한 힘이 있었다. 땅을 타고 피는 계속 흘러내린다. 그러나 이 어두운 하늘, 어두운 배경에 그 선명한 핏빛만은 신이한 신성을 머금은채 죽음의 부정함이 아닌 생명의 성스러운 색채를 띠었다. 그것은 그녀가 흘리는 성혈(聖血)이었다. 아까부터 불지 않던 바람은 이상하게도 비올렛의 주변에만 맴돌아 새하얀 비올렛의 머리카락을 피 묻은 비올렛의 더럽혀진 순백의 드레스 자락을 흩날리게 했다.

“Изгледа, Боже мој гледа сите”

신이시여, 저들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그 마음의 울림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순간 밝은 청은색의 빛이 폭사되었다. 사람들은 한순간 시야를 잃었다. 그 폭사된 빛은 오랫동안 그들의 시야를 앗아갔다. 그러나 그 빛 속에서도 그들이 두려워 하지 않았던 것은 것은 오로지 마음속에 울리는 다정하고 따스한 그 목소리가 그것을 안심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거리가 가깝건 멀건 상관없이 그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모든 생명들은 그 울림을, 신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신을, 그들을 창조한 창조주를 찬미했다.

그 빛이 사그라들자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먹구름이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어째서인지 한 낮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검은 저녁하늘이었다. 깨끗한 저녁하늘이 그들의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럼에도 세상이 환하게 밝았던 것은 폭사되었던 청은빛의 빛들이 원을 그리며 마치 별처럼 하늘을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흘러내린 그녀의 피가 희석된 돌틈 사이에 새파란 식물들이 급속도로 돋아나기 그들이 밟고 토대를 잠식해나갔다.그녀의 주변을 중심으로 앙상한 초겨울의 풍경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나온 빛들이 태양 대신 그들을 따사롭게 비쳤으며, 오색의 꽃들이 피어난다. 하늘에는 상서로운 무지개색의 빛의 장막이 펼쳐지고 청은빛의 광휘는 검은 밤하늘 위를 수놓으며 휘몰아 쳤다.

Јас сум на изгрејсонцето.

-Јас сум ноќ надвор.

Јас сум пламнал живот.

-Јас сум надвор да одат мртвите.

Ј ас сум светлината

-Јас сум на темнинат

Јас сум Бог, Кој те создал.

-Јас сум Бог да те води во ништо.

나는 떠오르는 해이니라.

- 나는 저무는 달이니라.

나는 타오르는 생명이니라.

- 나는 꺼져가는 죽음이니라.

나는 유동(遊動)의 불꽃이니라.

-나는 극지(極止)의 얼음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창조한 신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허무로 이끌 신이니라.

Сепак.

Нам ни едно дете е дете кое изберат да "нас".

그.러.나.

이 아이는 ‘우리’에게 선택 받은 아이.

Пофалби.

Богослужба.

страв.

찬양하라.

경배하라.

두려워하라.

Спасителот и уништувач на вас.

너희의 구원자이자 파괴자를.

수도의 모든 생명들이 생명의 빛을 얻었다. 그 모든 생명들은 신의 은총을 받았다. 가난한 병자들도, 몸져누워있던 어느 고귀한 귀족도, 야생의 굶주린 동물들도, 인간에게 사육된 배부른 가축들도 모두  창조주의 경이를 맛보았다.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에 시들어간 탐스럽고 화려한 장미도, 누군가에 의해 짓밟혔던 하찮은 제비꽃도 모두 생명의 기운을 가지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들은 그녀가 말하는 신어를 똑똑히 들었다. 이 마음에 울리는 언어가 울림이 신의 언어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 누가 ‘감히’ 신성을 의심하랴. 그 고결함을, 그 성스러움을! 그 아름다운 빛이 신의 빛이 아니라 거짓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밤 하늘이 사라지고 고고한 태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황금빛이 다시 도래하였다. 이 광장은 그녀에 의해 아득한 낙원과 같이 변해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의 잎사귀가 여름의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흩날린다. 색색의 꽃들이 피어 생명을 봄처럼 생명을 찬미한다. 새들은 타오르는 아름다움을 목청껏 노래한다. 일찍이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지고(至高)의 아름다움으로.

이곳은 그들이 바라던 낙원, 태초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신분과 상관없이 그 누구나 꿈꾸었을 평화롭고 따스한 이상향이었다.

태양이 나타났음에도 빛은 아직도 하늘에 원을 그리며 움직였고. 그 빛들은 사람들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심지어는 그 지극한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 아득한 낙원을 강림시킨 성스러운 존재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에게는 그녀가 천민 태생이었고, 심지어 아까 전 까진 거짓된 성녀라고 의심을 받았던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알았음에도 그들은 차마 고결한 그녀에게 차마 ‘천하다’와 ‘거짓된’의 수식어를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그저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맛본 신의 기적을, 그 위대함의 여운에 벗어나지 못한 채로.

“....아...아아, 나의 신이시여! 나의 신이시여!”

로디온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이마가 땅이 닿도록 무릎을 꿇었다. 흥분으로 떨린 목소리는사람들에게 전염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따라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비올렛을 천한 여자로 보지 않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성의 소녀였고, 현신한 신 그 자체였다. 여전히 몰골은 라즈니와는 달리 초라했지만 그녀의 성스러움은, 그녀의 거룩함은 절대로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것은 흉내 낼 수 없는 고결함이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그 옆에 서 있던 라즈니가 무릎을 꿇었다. 체자레가 무릎을 꿇었다. 대신관들이 무릎을 꿇었다. 오로지 왕만이 무릎을 꿇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에셀먼드도, 에이든도, 다니엘도 무릎을 꿇었다. 그녀만이 진정한 신의 대리인이다. 그것만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신의 대리자시여!”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비올렛이 아닌 신의 대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의 대리자였다. 다른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가장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의 자리 그곳에 앉은것이 비올렛이었다.

비올렛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아닌 새파란 하늘이 그녀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만든 이 초록의 숨결이 살아있는 낙원에서 모두의 경배를 받았다. 그 옛날, 초대 성녀 아그레시아가 그러하듯이.  새하얀 빛이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비올렛은 한참동안 무릎을 꿇은 이들 가운데에서 홀로 오롯이 서 있었다.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신에 대한 경외의 눈물을 흘리는 ‘성녀’로서 눈물이 아닌 비올렛이 슬픔에 젖어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젠 끝났다. 살아오며 감히 품어버렸던 미움과 사랑, 그 모든 것이.

============================ 작품 후기 ============================

좋으시다면 추천을 추천을!!! 저 누구보다 빠르게빠르게 100화 왔는데..추천 안해주실거에여? 100화기념으로 용량도 빵빵한데..30키바..

비지엠..같이 들어주시는거죠? ^0^.. ?? 혹여 안들으셨더라도 꼭! 글과함께가 아니더라도 따로  들어봐주세요. 제 부탁임.. ㅠㅠ

뜰에 들어가시면 있어요! 플짤이 재생이 안된다면 유틉 주소도 링크해뒀답니다.

저 비지엠 때문에 두편에 나눠 올리려던걸 한편으로 올린거에여..ㅎㅎ

비올렛의 터져나오는 신성과 성력을 위해... 고르고 고른 곡이랍니다.

이 소설이 드디어 로맨스 '판타지'라는걸 증명했네요. 정말로 로맨스만이 위주고 병풍 판타지 가 아닌. 로맨스와 판타지를 고루 섞어. 판타지성을 최고로 드러내는 화에요.. 여러분들께 제 판타지를 드러내서 너무 기쁩니다. 그것도 100화에요!

비올렛의 신성이 드디어 밝혀지고. 처음으로 그녀의 성력을 증명했네요.

이 나라는 120년동안 성녀가 없던 나라고 성녀의 기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없습니다.

말룸역시도 보지도 못한채 그저 위협적인 호랑이와같은 전설이 되어버렸죠.

권력구도를 차치하고서라도 성녀다! 이래도 ??? 하며 안믿기는게 사실이죠.

이번편 쓰느라 온 정신이 여기에 집중..으으으으..

여하튼 에드의 비밀도 나왔네요. 3년전 그가 자원해서 갔던게 아니라. 우리 찌질한 졸렬레시아 국왕인 폐하의 명령으로 무려 폐.하.의 명령으로 가셨답니다!!!!!! 아이고 에드야!!

내가 이걸 말하고 싶어서 얼마나 얼마나 힘드렀는지!!!!!!

다음화에는 어떤상황인지 아주 조금 더 자세히 서술됩니다. 큽

그리고 저 이번편에 다 끝난다고 한적 없어요...재판이 끝난다고 했지..

챕터가 다담편이면 될거라 생각하고 달려들었더니 3편~4편은 더 남았네요.

이 챕터 끝나면 2부 끝이고 끝내고 나서 한달을 쉰다는거에요...ㅎㅎ...오해없으시길.

아차.. 여러분 제 소설에 되게 사이다를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여러분.. 사이다는 제가 맡아둔게 아니에여...큽.. 사이다 요구가 너무 잦으셔... 누가보면 여러분들의 사이다를 제가 뺏어간줄 알거에요 ㅠㅠ

여러분들이 원한대로 하다간 비올렛이 아그레시아의 여왕의 될듯.

사이다는..여러분.. 필수적인게 아닙니다....저도 사이다 좋아합니다만...  지나친 사이다에 대한 압박은...오히려 고구마를 투척하고싶게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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