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
비올렛과 이자카는 궁에서 나와 조금 더 걸었다. 어차피 수도의 경비, 궁 안의 경비는 그 무엇보다 철저했고 이자카가 있었으므로. 비올렛은 나와 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한 정원으로 돌아갔다. 한적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이자카가 말했다.
“덥다.”
이자카의 나라는 따스한 나라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추워야 하는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자카를 보니 더울만도 했다. 이자카는 군나르식 옷을 입고있었으므로.
“너는 안더운가? 전보다 조금 시원하게 입었지만 여전히 더워보인다.”
비올렛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셀먼드가 분명히 가슴을 너무 드러낸 것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었나?
“제가 더워보여요?”
“그래.”
이자카가 그녀의 옷차림을 보았다. 분명이 조금 가슴이 드러난 옷을 입었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그녀가 이상함을 느끼며 물었다.
“진짜요? 이거 조금 과감한옷인데.”
비올렛의 말에 이자카가 얼굴을 찡그리며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옷차림은 하나도 야하지 않다.”
야하다니, 직설적인 말에 그녀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자카가 그녀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뜨겁고 큰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의 상처가 있었던 곳을 쓰다듬었다. 적당한 압력을 주며, 부드럽게.
“이자카!”
그녀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자 이자카가 웃었다.
“야한건 네 하얀 살이다.”
“.......!”
“아. 그래.”
그가 손을 들어 어깨를 꼬집듯이 잡자 그녀가 앗, 하고 아픔의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목소리. 목소리만 들으면 안고싶다.”
그가 비올렛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가 더욱 놀라 뒷걸음질 치자 이자카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이지만 그러지 않을거다.”
사실인데 그렇지 않을거란다. 심지어 농담이라고 말을 돌리지도 않았다. 군나르 족은 전부다 이런건가. 비올렛의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이자카가 비올렛을 달래듯 말했다.
“너는 아슈카바드의 여인을 보면 너는 벗고다닌다 할것이다.”
“네?”
“아슈카바드는 그러지 않는다.”
복식이 차이가 있었구나. 도대체 얼마나 파인 옷을 입고다니길래. 그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정신건강에 안좋을 것 같아 말았다.
“너는 잘 어울릴거다.”
“네?”
“아주 예쁠거다. 나는 비취색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좋은데 아무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잘 어울릴거다.”
“그렇게 확신해서 말하지 말아요.”
비올렛이 말했다. 비취라는 보석은 들은적이 있으나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비취는 무슨 색이에요?”
“밝은 바다색이다. 어두운 바다 말고.”
“바다요?”
비올렛이 물었다. 사실 비올렛은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간 적이 없다. 파랗고 짠 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그런게 존재하긴 하는걸까.
“바다도 못본건가?”
“네.”
그 말에 이자카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 역시도 난감해 하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바다와 깊은 바다는 무슨 차이일까.
“넌 꼭 새같다.”
“.......”
“새장 속에 있는 작은 하얀 새 같다.”
그 말에 비올렛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녁 하늘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청량한 풀벌레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칸과 이야기 했다.”
“전하와요?”
비올렛이 물었다. 며칠 동안 생일 연회 준비때문에 수업에 가지 못했는데, 그때 만난 모양이었다. 이자카가 말했다.
“나와 아슈카바드로 가자, 피아케.”
갑작스러운 말에 비올렛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을 하는거지, 이 남자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에 비올렛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자카, 잊으셨나본데, 저는 이곳에 머무르며 악마의 자식을 처단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 말에 이자카가 이글이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 말을 이해하려 했다. 네가 가르치는 네 종교를 이해하려했다.”
“.......”
“하지만 작은 칸은 이야기 했다. 너역시도 이야기 했다. 너는 천한 신분이라 그만큼 대우를 받지 않는다. 오늘도 그렇다. 나는 보았다. 사람들은 너를 무시했다. 심지어 어린 너를 데려갔다는 네 가족들도.”
비올렛은 이자카가 그렇게 기민하게 자신을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말을 하면서 이자카는 화가 났는지 억양이 높아졌다.
“하지만 나는 네 종교가, 너희 나라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너도 그 여자처럼 악마의 자식을 상대해야 한다. 나는 안다. 그것은 네 사명이자, 신성한 의무이다.”
“........”
“하지만 그건 이상하다. 이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마물이라면, 나라 전체가 맞서야 하는것이 아닌가? 그건 너만의 의무가 아닐것이다.”
비올렛은 이자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그것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고백을 원하는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그가 제일 듣고싶었던 말을 하는 사람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이 서 있던 곳은 사람이 없는 외진곳이지만, 누군가가 들을 염려가 있었지만 비올렛은 이자카를 말릴 수 없었다.
“왜 여자 하나의 뒤에 숨어있는가, 왜 그렇다고 그 여자를 대우해 주지 않는가.”
비올렛은 이자카가 서툴러 보여도, 언어에 대해 대부분 습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군나르 족 언어를 그녀가 배웠다면, 그는 훨씬 더 깊은 대화를 했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 한명에게 의지하기만 하는 평화는 게으르다. 누군가에게 시켜서 대신 얻어내는 평화는 겁쟁이 같은 평화다.”
“.........”
“그런 나라라면 차라리 멸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자카가 손을 내미는 것이다.
“나는 바다를 보여주겠다. 이 나라가 멸망하고, 아슈카바드까지 악의 자식이 온다 해도 힘을 다해 싸우겠다.”
“........”
비올렛은 이자카를 보았다. 그의 녹안은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체자레와 다른 마력을 지닌 오묘한 눈. 그녀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 새로운 희망이 있는 것일까. 정말로 모두가 다 싸운다는 것일까. 비올렛은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생각해 볼게요 칸.”
사실 비올렛이 생각해 둔 것은 하나였다. 하지만 그 방법을 비올렛은 아주 절실히 원하고, 원하지 않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또 하나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같은 결말이 아닐까. 비올렛은 생각하는 것이다. 비올렛은 이자카를 먼저 보냈다. 그는 같이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자카가 돌아간 후 그녀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느라 그녀는 미처 집중하지 못한 새울음 소리가 들려 그곳에 정신을 집중했다. 심장이 덜컥 하고 뛰었다. 분명 아무도 없는것을 확인했지만 인간 남자가 서 있던 바람에 짜증난다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위치를 보니, 비올렛의 대답은 들리지는 않았지만 흥분했던 이자카의 목소리는 들릴 수 있을만한 거리였다. 그쪽으로 황급히 뛰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은건가? 이자카를 말하는 것일까? 누군가 서 있었다면 뛰어난 무장인 이자카가 눈치를 못챌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망연히 서 있었다.
“누굴 찾으십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비올렛은 고개를 돌렸다. 빙긋 미소짓는 얼굴이 보였다. 달빛 아래, 붉은 머리색이 루비처럼 빛났다. 달과 같은 황금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빛이났다. 그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스승님?”
“네, 접니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성녀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귀여운 제자의 얼굴을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저 나무에 서 있던 사람은 체자레일까? 비올렛이 저 쪽 나무를 바라보자 체자레가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거기 있던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죠?”
“글쎄요.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당신이 걱정할 만한 입싼 사람이 아닐테니.”
체자레가 말하며 비올렛에게 다가왔다. 짜증나, 짜증나! 라고 울던 새가 그냥 내가 꺼진다, 라고 말하며 포르르 날아가버렸다. 밝은 달빛이 있음에도 이곳은 어느것보다 더욱 더 음산한 기분이 들었다. 체자레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비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와 잠깐 산책하시겠습니까?”
비올렛은 이자카 쪽을 보았다. 그는 돌아간 듯 했다. 체자레는 못본 사이에 더욱 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왔는데, 적포도주 빛깔인 옷이 그러했다.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얻는 평화는 가치가 없다. 그리하여 그 나라는 멸망해도 무방하다.”
체자레가 노래하듯 읊었다. 비올렛이 체자레를 바라보자. 그는 더 할나위없는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얼굴에 빛이 나 보였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구절이었습니다.”
선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 털 하나하나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지하실이 떠올랐다. 공포와 비명만이 존재하는. 설마 그곳에 이자카도 갇히게 되는 것일까? 그녀의 얼굴을 본 체자레가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슨 무서운 말이라도 했습니까?”
그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의 이유를 알고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안심하십시오 성녀님. 그는 제 지하실로 끌고가기엔 너무 거물입니다.”
“.......”
“게다가 그는 성녀님께 해악을 끼치지도 않았잖습니까? 절 나쁘게 생각하시면 서운합니다.”
그가 말했다. 비올렛은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이자카와 대화를 기점으로 그는 공작령에 와서 돌아오지 않았다. 약 한달 만의 만남이었다.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깨는 괜찮으십니까?”
“어깨가 부상당한것도 아시고 계십니까?”
비올렛의 날선 물음에 체자레가 말했다.
“저런, 절 의심하는 것 같은데 그저 작은 정보력입니다. 당신이 어깨를 다쳤다는걸 비밀로 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그럼 곤란합니다.”
비올렛은 체자레를 보았다. 왕자가 습격당하면 체자레가 다음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체자레는 말했다.
“무언가 착각하시고 있는게 있는데, 비올렛. 저는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
“작위는 저에게 가치가 이미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제가 아닙니다 비올렛.”
그가 미소지으며 속삭인다. 그것이 진실일까, 거짓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체자레는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 했다. 그것이 잔혹하고, 그녀를 망가뜨리는 진실임에도. 그리고 오늘도 체자레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의 성녀님.”
“........”
“어리고 순수한 비올렛.”
그가 말한다.
“당신이 아슈카바드의 칸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제 말을 듣지 않았더군요. 아니, 생각해보니 일단 그의 목적을 알아내는데는 성공했군요.”
그가 미소지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신뢰를 주시더군요. 아직도 멀었습니다.”
“..........”
감당할 수 없는 잔인한 진실. 이 사람은 핏빛의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비올렛은 그것을 듣기 싫었다. 지금이라도 귀를 막고 싶었지만 체자레의 목소리는 악마처럼 간교하고 교활하게 다가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다.
“암살자, 하쉬샤신은 구자르트에서 온게 맞습니다. 정확히는 이자카가 아니라 케스투니스의 칸인 타르크에게요. 내부 공모자는 아쉽게도 우리쪽 사람이더군요.”
“.........”
“쓸데 없는 짓을 했습니다. 성녀님의 어깨에 감히 상처가 나지 않았습니까? 가끔씩 제 의중을 멋대로 넘겨짚어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어 곤란하답니다. 나중에 국왕에게 넘기도록 하지요.”
그가 말했다. 교황파 귀족들 중 하나가 타르크 쪽의 내부 공모자라는 것은 비올렛의 추측도 이자카의 추측도 다 맞았다는 소리였다.
“하쉬샤신의 낙인을 풀고, 조금 귀여워해줬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하더군요.”
체자레가 정말로 재미있다는듯 옅게 미소를 지었다. 비올렛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가득차던 그 지하실이 떠올랐다.
“저는 다른 대단한 것을 원하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을 지목할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데.”
“........”
“처음부터 목적은 당신이었습니다. 성녀님.”
“무슨.”
“타르크는 당신의 죽음을 원하고, 이자카는 당신의 생명을 원했습니다.”
============================ 작품 후기 ============================
추천을 하면 이 열대야가 갈지도 모르시죠! 캬캬
뜰에 많이 방문해주셨네요 싸이월드도 100은 안넘어봤는데ㅋㅋㅋㅋ 뜰이 100이 넘었어요.
뭔가 bgm, 팬앝의 콜라보레이션이 컸나봐요 뿌듯부듯
오, 이제 다음편이 로판 공모전 마지막화네요.
역시나 목표한 장면까지 또 못썼어요. 로판 예선때가 유년기의 끝이었는데 체자레 고문씬이 나와 두편씩 밀리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내일 천천히 쓸 생각입니다만. 기간이 끝나고, 심사일까지 휴식을 취하며
간간히 외전을 들고 올 생각입니다.
제 전작인 밤별격 재판을 할 생각이라 좀 바쁠것같아요 ㅋㅋ
그러나 다니엘 외전이나 체자레 외전 둘중에 하나는 선택해서 쓸게요.
역하렘이라 이리저리 여러분들 꼬시려고 문어발 처럼 다리를 뻗는게 아닙니다.
꼭 남주를 정해서 알려드려야 하나요? 조금만 더 생각해보시거나 보시다보면 남주가 누군지 아시게 될 건데 꼭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소설의 재미는 앞내용을 모른다는 거죠..ㅎㅎ
그리고 남주 정해져있습니다. 생각없이 쓰는거 아니에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