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
사냥대회가 끝이 나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비올렛은 언제나 처럼 조용히 방에 머물러 책만 읽었다. 다니엘 역시 성년이 되고 본격적으로 행정부 쪽 관료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후작 저 안에 있는게 일상 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그녀의 집에 방문했다.
“비올렛, 나 왔어!”
문이 열리자 마자 시수일레가 그녀의 방에 돌진하다시피 했다. 시수일레는 어렸을 적 후작 가를 여러번 방문 했지만 백작부인과의 '그'대화 이후 비올렛은 일부러 검술수업을 핑계로 그녀를 피해서 방문이 거의 없었다. 성년이 되었다고 이젠 백작 부인의 만류에도 이렇게 찾아 오는 듯 했다. 만물이 다시 재생되는 봄의 꽃잎과 같은 옷을 입은 시수일레는 그녀를 찾아오자 마자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성인식 때나 사냥대회때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 어린 소녀는 성장 까지는 아니더라도 생장(몸이 크는것)은 한 것같다. 비올렛은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친구 사이에.”
비올렛은 그 말에 눈썹을 살풋찡그렸다. 진짜로 친구라고 믿는걸까, 아니면 무슨 의도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비올렛은 시수일레의 해맑은 표정을 보며 계산하는 것을 멈추었다. 시수일레는 에이든과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생각하면 머리만 더 아파지는.
“나 사실, 사냥 대회 다음 날에 널 보러 가려고 했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말렸어 그래서 일주일이나 기다렸어.”
“그러니?”
그녀의 말에 시수일레가 웃었다. 시수일레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거렸다.
“정말, 너무 멋있었어 세상에,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서 검을 쓰는 여자라 얼마나 멋지니!”
“보통은 그 반대겠지.”
“그건 그래. 하지만 나는 이쪽이 훨씬 더 멋진 걸?”
시수일레가 헤헤 웃었다. 별로 좋은 장면도, 좋은 기억도 아니었으나. 시수일레는 그저 그녀가 멋있었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다른 영애들도 네가 멋있다고 했어, 한번 보고 싶다더라.”
“그러니?”
아, 그래서 이곳에 온 거였구나. 비올렛이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미안, 나는 그런 곳에 갈만한 사람이 아니야.”
비올렛이 대답했다. 시수일레가 말했다.
“아니야, 성녀님인 네가 못 갈 곳이 어디 있어?”
“내가 거기 가봤자 너한테 피해만 줄걸.”
“왜?”
비올렛은 얘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건가 생각했다. 어쩔때 보면 시수일레는 답답했다. 그녀는 너무나 순진하고 어리숙했다. 마치 어린 그녀처럼. 하지만 세상은 시수일레의 순수함을 허용했고, 비올렛의 순수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올렛은 그녀의 얼굴을 볼 때면 기분이 가라 앉았다. 그리고 굳이 그녀가 이런 말을 꺼내야 하는것이 무척이나 싫었다.
“내가 천민이니까.”
“........”
“정확히는 천민이었지만 신에게 선택받아 성녀님이 되었잖아. 뭐가 다르니?”
시수일레의 시선에 비올렛은 그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 챈 것인지 시수일레가 비올렛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좋은 화제도 아니었고, 좋은 권유도 아니었다.
“아무튼, 나도 검을 배우고 싶은데. 아버지가 가르쳐주시지 않아.”
“.........”
검이라는 말에 비올렛의 입매가 굳었다. 시수일레는 언제나, 악의없이 말하지만 언제나 그녀를 자극했다. 아니 그녀는 시수일레 존재 자체가 싫었을 수도 있다.
배우고 싶었던게 아니었다. 날붙이를 휘두르는 일 따윈. 얼마나 고된지도 모른 채 그저 멋있다는 이유로 배우고 싶다고 한다.
“에르멘가르트 영식들께 말해볼까? 나 좀 가르쳐 달라고?”
그녀가 꺄르르 웃었다. 비올렛이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오라버니들은 바쁘셔서 가르쳐 주시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흠, 그거 아쉽네. 그래도 혹시나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에셀먼드 경께서는 사냥대회에 우승하시지 않았니! 만약 가르침을 받는다면 에이든 경보다 에셀먼드 경께 받을거야.”
“.........”
“비올렛은 좋겠다. 나도 멋진 오라버니들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에셀먼드 경은 정말 누가 봐도 멋진 분이시고 다니엘 영식께서는 언제나 친절하시고, 음, 에이든 경은 조금, 그렇지만. 그래도 나름 장점은 있지 않겠니?”
“글쎄.”
그녀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이번에 그녀의 표정에서 너무 표가 난 것일까. 시수일레의 얼굴이 굳었다.
“너 이런 대화 싫어하는 구나?”
“좋아하진 않아.”
비올렛이 말했다. 쌀살한 말투에 그녀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해두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미안, 내가 널 또 상처 준거니?”
“..........”
그 말에 비올렛은 더이상 참지 않았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시무룩한 얼굴의 시수일레에게 말했다.
“난 별로 상처 받지 않았어. 너는 왜 내가 상처받을 거라 생각하는거야?”
“아니 나는........”
“너는 내 신분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데, 이런 태도가 항상 내 신분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거 알고 있어? 언제나 무슨 말을 하면 상처받을 걸 전제로 생각하잖아. 나는 상처받은게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쁜거란 말이야.”
“비올렛, 나는........”
비올렛은 그저 얼굴을 찡그리며 차를 기울였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단절이었고 시수일레는 자신이 비올렛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았어 비올렛, 미안해.”
그녀가 풀이 죽어 대답했다. 비올렛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수일레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자 화내거나 울고 있으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래도 비올렛, 이젠 나한테 화도 내주네.”
“..........”
저건 무슨 생명체이지? 순간 비올렛은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어린 에이든 처럼 똑같이 쏘아붙이고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되도 않은 우정을 가져다 붙이며 친구처럼 지내는 것 보다는 혼자가 나으리라 생각한다. 일단 비올렛은 삐툴어졌으며, 우선 신분 상으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음부턴 안 그러면 되지, 그렇지?”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는 비올렛이 다시 화를 낼까봐 무서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비올렛은 눈을 크게 뜨며 시수일레를 바라보았다. 비올렛은, 자신은 화를 내는것을 두려워 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시수일레가 하는 일은 그녀에게 화를 내고, 그녀를 모욕하며 비난한채 버리면 될 일이었다.
“비올렛, 나도 이제 성년이 지났어.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어딜 가든 막지 못하시지. 난 이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할거야. 설령 부모님이 말리더라도 네 곁에 있을거야.”
“..........”
“나는, 그러니까. 네가 사냥 대회에서처럼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수일레가 말했다.
“아무말도 못하고 친구 편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도 싫어. 아나블라 그 계집애가 설치는 꼴도 싫고, 나는 네가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그런게 다 싫어.”
“.........”
“손수건 받아줘서 너무 기뻤어. 나는 네가 멋지고, 닮고 싶고 그래. 나는 알아 너는 누구보다 더욱 더 기품있고 아름다운걸. 넌 내가 자랑하고 싶은 친구야.”
그녀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말을 뱉어냈다. 비올렛은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너 정말 철없구나.”
“그래, 항상 듣는 말이야. 그런 소리를 너한테 듣는다고 상처받진 않아.”
비올렛이 한숨처럼 내뱉는 말에 시수일레가 응수했다. 뭐라고 더 쏘아붙여 줄까 했지만, 저 결연한 표정은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상처받지 않아, 상처받지도 않을거야.’ 라는 얼굴이었다. 어쩌다 저런 애가 옆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비올렛은 말을 할 의욕을 잃었다. 그저 한숨을 쉬며 마음대로 해, 라고 말하자 그녀가 웃었다.
“아 맞아, 너 그리고 왕자 전하의 신학 교사가 되었다면서?”
“무슨 소리야?”
비올렛이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거지?
“후작께서 말해주시지 않았니? 나는 그것 때문에 달려온거였다고. 생각해보니 그러네, 나도 참 바보같다.”
그런 중요한게 있으면 빨리 말해. 비올렛은 뭐라고 말하려다 또 저 여자애가 울음을 터트릴지도 몰라서 입을 뻐끔거렸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네가 신학교사로 지정이 되었다는데? 왕자 전하도 강하게 원하셨어.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전하가, 네게, 반하셨나봐!”
“.........나는 그말을 들은적이 없어.”
그녀는 쓸모없는 뒷말에 대해서는 무시한 채로 앞말에 대하서만 답했다. 왜 이 중요한걸 이 시수일레에게 들은걸까. 그녀는 화라도 내고 싶었다. 정말일까, 아니야. 시수일레가 말하는 정보가 사실일리가 없어. 왕자의 신학 교사는 아무리 그래도 부사제급 이상이어야 한다. 비올렛은 비록 성녀지만 천민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그마저도 신의 분노를 사서 성력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도 언제나 품격을 중시하는 왕실에서 비올렛을 교사로 임명할 일은 없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
결과적으로 시수일레의 말은 맞았다. 그래서 그녀는 궁정 안에 이렇게 알현실에 왕과 단둘이 마주보고 있었다. 하지만 ‘왕자 전하가 반해서 주장했다’라는 시수일레의 사심과 환상이 들어간 주장과는 다른것이, 궁안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후작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왕은 이 사실에 정말로 기분이 나빠, 비올렛의 앞에서조차 표정관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신의 대리인이여 어서오게.”
그가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가 그럴 만도 한 것이, 모두가 다 체자레가 뒤에서 꾸민 일이었다. 열살이 되어 이 나라의 기본 소양인 신학교사가 필요하다며 주장하며 체자레는 왕자의 신학교사로 비올렛이 가장 적합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고위 신관들은 모두 다 왕자의 교사가 되는 것을 성녀님이 계시는데 지당하지 않다고 거절했다. 비올렛은 체자레가 자신과 왕의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것임을 눈치챘다. 반 강제로 천민 출신의 여자를 장차 이나라의 왕이 될 왕자의 교사로 삼은 모욕을 받은 왕이 비올렛에게 좋은 태도를 취할리가 없었다. 게다가 왕은 신전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그 화풀이가 그녀에게 갈 공산이 컸다.
“이야기는 후작에게 들었을테지.”
“네, 들었습니다.”
비올렛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천민’이라는 키워드로 차별을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체자레였지만, 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이용했다. 귀족들도 취급하지 않는 천민 출신의 성녀를 왕자의 스승으로 삼는 것은 일종의 굴욕이었다. 왕은 적개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가 왕자를 잘 가르치리라 믿고싶네.”
“..........”
누가 들어도 전혀 믿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사냥 대회의 일로, 왕자는 그대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 한다네, 그렇지만 신의 대리인이여, 그렇다고 무가치하고 무분별한 가르침은 삼가야 하네.”
사실 비올렛으로서도 이 일이 별로 마음에 안드는 차였다. 아무리 그녀가 이 일을 억지로 떠 안아도, 그녀는 이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었다.
“실례지만 폐하. 무가치 하고 무분별 한 가르침이란 무엇을 말씀 하십니까?”
비올렛은 여태껏 공손하게 숙였던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본적으로 왕과 성녀는 동등하다. 그러나 비올렛은 그가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또한 공작에게마저 무시당하는 그를 생각해 언제나 그에게 예를 다했다. 체자레가 성녀에게 예를 다했던 것 처럼.
왕은 갑작스럽게 눈을 마주쳐 오는 그녀를 보고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이 법도상으로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올렛의 물음에 왕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잘 아리라 믿네.”
“천민의 생각, 천민의 가르침, 천민스러운 행동거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비올렛은 말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그대마저도 나를 업신여기는 것인가.”
그의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배여있었지만 비올렛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체자레를 닮은 그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눈을 마주쳐 오는 비올렛이 불쾌한지 왕이 말했다.
“처음에 보았던 그대와 지금의 그대는 다르군, 너무나 오만하다. 후작은 그대에게 무엇을 가르친것인가?”
“후작은 제게 제 위치에 맞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비올렛이 왕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왕이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안다. 그녀역시 어찌보면 신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반 성녀라는 존재는 왕이라는 국가와 종교라는 사슬에 묶인 신전과는 한층 다른 존재였다. 무작정 적대시 해서는 안되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제가 처음 폐하를 뵈었던 것 처럼, 비굴하게 엎드리며 눈조차 마주하지 못한채 벌벌 떠는 것, 그것이 바로 천민의 행동거지입니다.”
왕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폐하, 저는 티게르난 공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비올렛이 말했다. 무분별하게 적개심을 가지고 대하는 왕과, 무분별한 애정을 가지고 그녀를 대하는 체자레. 그녀는 중도를 원한다. 일방적인 한쪽의 거부에 떠밀려 신전으로 떨어지고는 싶지 않았다. 비올렛은 국왕을 바라보았다.
“제가 당돌하고 맹랑하다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국왕이 말했다.
“그래, 그대는 당돌하고 맹랑하다. 그러나 그대를 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안타깝군.”
“하지만 이제 제가 당돌하고 맹랑해도 그것을 존중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
“그게 티게르난 공작에게 받은 수모를 되받아 칠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국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올렛은 그 두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가만히 앉아있던 국왕이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비올렛은 왕이 내려와 그녀의 앞에 서 있을 때 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채 그를 바라보았다. 적개심, 분노, 증오. 그것이 비올렛을 향한다.
그녀는 자신이 국왕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이라면 그것도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국왕은 자신을 죽이지도 못하고, 자신의 검인 에르멘가르트 가문을 건들지도 못한다. 그녀는 무서울 게 없었다. 체자레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물러났다. 하지만 국왕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모른다면 알아차리게 한다면 되는 것이다.
“그렇군.”
그리고 왕 역시도, 그녀의 두 눈을 보았다. 무엇을 읽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눈에서 읽어낸 감정이 좋은 감정일리는 없었다. 국왕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올렛은 국왕이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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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 저 오늘 생일인데 추천 부탁드려도 되까여...?ㅎ....ㅎㅎㅎㅎㅎ 진짜임...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