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
비올렛은 지금 벌어진 상황에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2년만에 한번씩 열리는 사냥대회에 초대장을 받는 것 까지는 좋았다. 아니, 사실 그녀는 사냥이라는 것을 혐오했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 모이는 대회에 이 나라의 성녀가 빠질 수는 없는 법, 그녀는 (그녀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살육에 변태적으로 흥미를 느끼며 비교질하는 지극히 유치하고 비생산적인 대회에 가게 되었다. 에르멘가르트 후작령 쪽에 낮은 산은 봄이 되어 동물들이 한창 활동하고 있을 시기였고, 지대가 높지 않아 사냥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막사를 설치하고, 귀부인들이 머무를 만한 자리가 마련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
라이셀 백작부인과 시수일레만이 벌어진 이 사태에 대해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황쪽의 비호를 제대로 받지 않으니 마치 끈떨어진 연 취급이 아닌가. 비올렛은 그녀들의 작태에 화가 났다.
“어머, 저흰 성녀님께서도 참여하시는 줄 알았답니다.”
“후작 가에서 무력을 배우셨다기에, 저희와 앉아 담소를 나눌 줄은 몰랐답니다.”
부채를 흔들며 말하며 '설마 네가 우리 자리에 낄 생각이었니?' 라고 말하는 그네들을 보며 비올렛은 미소를 지었다. 옆에 성녀님을 호위하는 호위기사랍시고 붙어 있던 에이든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비올렛을 보다가 그녀들을 보았다. 그는 이 상황에 상당히 화가 났으며 언제나 처럼 분별없이 화를 내려고 했다. 비올렛이 그의 팔을 잡았다.
“의자를 하나 더 가져 오세요. 왕자가 곧 올텐데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네요.”
왕비가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녀로서도 이러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그리고 그녀는 시종에게 의자를 더 가져오라 시켰는데, 설령 그렇다 해도 이것이 무마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그레시아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 가장 시종이 나중에서야 준비한 말단에 앉아있어야 한다니.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머, 돌아가시게요?”
그 중 한 여자가 밉살맞게 물었다.
“오라버니. 남은 여벌의 옷이 있다면 저 좀 빌려 주시겠어요?”
“뭐, 뭐?!”
그 말에 에이든이 펄쩍하고 뛰었다. 여자들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비올렛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냥대회에 참여하는게 제 의무라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뛰어다니는게 훨씬 생산성있는 행동이겠지요.”
비올렛이 말했다.
“왕비님께서는 굳이 시종에게 그런 일을 시키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 자리는 누가 만들어 주는게 아니라 제가 만듭니다.”
“푸훗, 쫓겨나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보니 아나블라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올렛은 그제야 누가 원흉인지 깨달았다. 아나블라, 저 계집애가 벌인 짓이다. 몇년만에 만나도 못된 심보는 그대로였다.
“아. 하드퍼드 백작 영애께서 자리를 양보해주신다고 하셨나요?”
“뭐, 뭣?! 저는 아닙니다. 세상에나, 왕비님!”
그녀가 가운데에 앉은 왕비에게 도움의 신호를 보냈다. 왕비는 여전히 난감한 얼굴이었다. 비올렛은 상냥하게 말했다.
“그저 자리를 바꾸는 것 뿐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왜 자리를 바꿀 수 없는거죠? 저 자리가 별로 안 좋은 무언가가 있나보죠?"
비올렛의 말에 아나블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럼 저런 안 좋은 자리를 지금 신성 왕국의 신의 대리인에게 앉으라고 한건 아니겠지요?”
“아니요, 저는 햇볕에 약해서........”
아나블라가 어물어물 변명했다. 그녀는 3년 전 비올렛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이를 갈았으리라. 그 어리석을만치 순진한 모습을 보며.
“아, 저도 그다지 햇볕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저와 자리를 바꾸어주시겠어요?”
“..........”
비올렛이 웃으며 말하자, 아나블라가 식은 땀을 흘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하녀의 뺨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너, 너! 어떻게 성녀님께 그런 무례한 말을 할 수가 있어! 성녀님이 지금 노하셨잖아!”
하녀는 금세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 그저 아나블라에게 빌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 죄송합니다 성녀님, 제가 너무도 오만했습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너는 내가 크게 혼 낼줄 알아.”
아나블라가 소리쳤다. 씩씩거리던 그녀는 비올렛을 보고 다시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비올렛 역시 미소를 지었다. 비올렛이 말했다.
“구체적으로 혼낸다 말씀을 하시지 마시고 매질을 하세요. 채찍을 드셔도 상관 없고, 나무 몽둥이를 드셔도 상관없습니다.”
하녀가 비올렛의 말에 히익, 하며 덜덜 떨었다. 아나블라 역시 놀라서 말했다.
“네, 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비올렛에게 눈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상황이 해결 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비가 나섰다.
“신의 대리인이시여, 이번일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왕비마마.”
비올렛이 선량하게 답했다. 왕비도 참으로 현명하지는 못했다. 성녀인 그녀가 참여한 것을 알면서도 왕비의 근처에 그녀의 의자가 마련되어야 했음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정말로 몰랐거나, 아니면 천민 출신인 그녀가 옆자리에 앉는다는걸 견딜수 없어서 방관했거나 둘중 하나였다.
“성녀께서 원하신다면 바로 제 옆 자리에 앉으십시오. 지금이라도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비올렛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사내분들과 사냥 대회에 참여하겠습니다. 왕비님께서 제게 미안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왕비의 얼굴을보고 비올렛은 정말로 그녀가 악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이곳까지 발걸음하여 기껏 한다는 일이 고급스러운 담소가 아니라 겨우 왕비마마를 무시한 채로 꾸며 놓은 유치한 자리싸움이라면 차라리 저곳에서 사내들과 말을 타는게 낫습니다.”
그녀의 말에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에 몇몇 영애들이 단단히 화가 난 듯 했다. 그러나 비올렛은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신경쓸 가치도 없는 이들이다.
치맛자락을 걷은 채로 그녀는 에이든과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와 에이든은 화가 난 것처럼 무표정으로 걸었는데 얼마 안 있어 에이든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내가 생각하지만 정말 대단해.”
비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야, 그런데 내 옷은 너에 비해 좀 클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그리고 내 옷들은 다 무겁다고?”
“상관없어. 그냥 바지만 있으면 돼.”
“그래 그래.”
에이든은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비올렛은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바보같은 남자. 그래도 뭐가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멍청하기는. 비올렛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생각해보니 나도 이득이네. 여기서 몇시간동안 저 여자들 자존심 싸움만 구경할 줄 알았더니 나도 졸지에 나가는 거잖아?”
그가 신이나서 말했다.
“아, 신난다. 역시 너는 이 오빠를 위한 줄 안다니까?”
“누가 오빠래?”
비올렛이 쏘아붙였다. 그렇게 비올렛의 기준으로는 별로 쓸모 없는 대화를 하는 도중 시종이 옷을 들고 왔다. 한눈에 봐도 그녀의 옷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 바지를 입었다. 여지없이 헐렁헐렁했다.
“너 왜 이렇게 큰거야.”
“네가 작은거야.”
비올렛의 말에 에이든이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아릅답지 못한 꼴입니까.”
비올렛은 깜짝 놀랐다. 별로 듣고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복색을 보고 지금이라도 당장 혀를 깨물고 싶었다. 군장을 입은 체자레가 서 있었다. 사냥 대회라 간편한 복장이긴 했지만 그는 언제나 맵시있는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에이든이 못마땅한 얼굴로 인사했다. 하지만 체자레는 그 인사를 제대로 받아주지도 않고 눈썹을 찡그린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꼴로 사냥을 가시려는 겁니까?”
그 전에 이성을 잃으며 분노를 터트렸던 얼굴은 거짓말 같았다. 그는 정말로 비올렛을 걱정하며 다른 의미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왜 위험하게 사냥을 나가시는 겁니까? 성녀님께서 사냥을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다 여인네들이 모인 막사쪽을 보다가 ‘아.’라는 깨달음의 목소리를 내었다. 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서렸다. 체자레는 언제나, 그녀를 놀리는 듯한 행동을 하며 실제로도 그녀를 농락했지만. 그녀가 누군가에게 멸시를 받거나, 피해를 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마치 자신의 수집품에 누군가 비난을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 단적이고 대표적인 예가 체자레의 지하실이었다.
“옷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신전에 오지 않아도 당신이 성녀라는 것은 잊지 마셔야 합니다. 신전을 웃음거리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그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체자레는 옆에 서 있던 그의 시종한명을 불렀다. 그의 몇가지 지시사항을 들은 시종한명이 급하게 뛰어갔다. 어차피 이쪽은 수도 외곽이었으므로 한 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에 옷가게들이 즐비했다. 따라서 근처의 옷가게에서 여성용 옷을 아무거나 가지고 오면 해결될 문제였다.
사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에이든이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비올렛은 체자레를 경계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체자레가 그녀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뒤로 피하려고 했지만 체자레는 날렵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 크셨는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리숙합니다.”
“.........”
“제 눈엔 당신의 발버둥이 보입니다.”
체자레가 말했다. 그녀는 체자레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를 쓸었다.
“사냥에 나서면 이 아름다운 머리가 풀어헤쳐질 겁니다. 그닥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겠죠.”
“자, 잠깐, 스승님.”
“당신은 최고로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 말에 비올렛은 얼굴을 찡그렸다. 체자레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비올렛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손가락이 그녀의 목 뒤로 넘어와 그녀의 늘어뜨려진 긴 머리카락을 앞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세심하게 그녀의 머리를 땋았다. 그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숨소리리가 그녀의 정수리 위에 느껴졌다. 그의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하나하나의 감촉이 느껴져 간지러웠다. 체자레가 언제나 뿌리는 향수냄새가 났다. 그러자 머리가 약간 아찔해지는 것도 같았다.
체자레가 그녀의 앞에서 머리를 땋았기 때문에 땋은 머리는 그녀의 왼쪽 어깨 위로 얹어졌다. 그는 한쪽 손으로는 비올렛의 머리를 잡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묶었던 비단 끈을 풀었다. 그러자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풀렸다. 머리를 푼 모습은 처음 봤지만 그것도 나름 잘 어울렸다. 체자레는 비올렛의 머리 끈을 묶고 예쁘게 매듭까지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만족한듯, 그녀의 땋아내린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고는 미소를 지었다.
“동생을 지키려는 아름다운 마음은 좋습니다만 에르멘가르트 영식.”
머리의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체자레가 말했다.
“조금 더 세련된 방법으로 도와주십시오. 그저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겁니다.”
“무, 무슨!”
에이든이 화를 내려고 했다. 비올렛은 체자레를 보며 말했다.
“스승님, 그에게 말하실 필요 없습니다.”
비올렛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이들중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을겁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안타깝군요 에르멘가르트 영식. 별로 쓸모있는 오빠는 아니었나 봅니다.”
체자레가 혀를 차며 말했다. 비올렛은 체자레가 에이든을 일부러 자극시키는 것임을 알았다. 에이든이 표정관리를 못하고 울그락 푸르락한 얼굴로 체자레를 노려보자 체자레는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시종이 옷을 들고 왔다. 비올렛은 그 옷을 받아 입었다. 단순한 승마복이리라 생각했던 옷은 사냥용 복식이 분명했다. 그녀의 다리매에 꼭 맞춰진 옷은 늘씬한 그녀의 몸을 더욱 부각시켰다. 맞춤 옷에서나 볼 수 있는 모양새였으므로 비올렛은 너무나 잘 맞는 옷에 내심 놀랐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니 체자레와 에이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든 역시 깜짝 놀랐다.
“뭐야, 딱 맞잖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정말로 어디 작거나 큰 곳 없이 그녀의 체형에 꼭 맞는 옷이었다. 어떻게 이런 옷을 구한걸까 생각하며 체자레에게 의문의 시선을 던지자 체자레가 어깨를 으쓱 하면서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아쉽군요. 아직도 주문된 옷은 만들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공작 각하 지금 무슨소리를?”
에이든과 비올렛이 동시에 물었다. 체자레가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성녀님께서 오실 날만을 기다리며 이렇게 옷을 많이 주문시켜놨는데. 입을 사람은 오지를 않으니 너무도 슬프군요.”
“.........하.”
비올렛은 자신의 손에 든 옷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보니 옷이 한벌이 아니라 여러벌이었다. 옷을 주문하려면 신체 치수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또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생각해보면 공작 령에 갔을 때도 성에서 마련된 잠옷은 그녀의 옷 사이즈에 딱 맞았다. 에이든이 속삭였다.
“그 옷 그냥 버리면 안 되냐?”
비올렛은 물론 에이든의 말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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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 씨즌... 추천을 하면 건강이 좋아진당께... 나도 좋아진당께..... 연참합니다 꼬르륵....
오늘은 서버가 무탈하길 기원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