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
성년이 되어 어엿한 기사단원이 된 에셀먼드는 유목민족인 콘차카 족의 잦은 국경 침략에 대한 파견 군대의 부지휘관으로 자원했다. 그리고 그는 3년동안 북방에서 국경을 수호했다. 그리고 지금 그 삼년이 지나고 수도로 돌아온 것이다.
스물한 살이 된 그는 키가 더 컸으며 더욱더 다부진 체격을 하고 있었다. 에이든이 씩씩거리며 연락도 없이 벌써 오냐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닮은 에이든과 비교해보니 확실히 이제 에셀먼드의 얼굴은 성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삼 년 전과 다르지 않게 표정 없이 국왕의 찬사가 섞인 칭찬을 들었다. 공을 치하하는 왕을 보고 후작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도 그 자식이 자랑스러울 것이다. 비올렛은 자신의 등장이 그들에게 묻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티게르난 공작이 오면 묻힐 것을 기대했으나, 적절하게 와준 에셀먼드 덕에 이 불편한 시선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후작은 에셀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사하러 안 갈거야?”
“내가?”
비올렛이 에이든에게 반문하자. 에이든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하지도 않고 에셀먼드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에셀먼드는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막내에게 짧은 포옹을 했다. 후작과 에이든, 에셀먼드가 서 있었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
비올렛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테라스로 나갔다. 그녀의 생일은 겨울이었고, 언제나 겨울 바람은 그 싸늘한 손으로 비올렛의 얼굴을 감싸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숨을 쉬자 냉기가 그녀의 폐부를 찌른다.
이 지리멸렬한 곳은 언제 끝날 것인가. 테라스 너머로 바라보는 왕성, 그리고 아래의 정원은 앙상했다. 물론 비올렛은 자신이 원한다면 저 정원의 꽃을 다 피울 수 있었다. 어쩌면 저들이 그런 기행을 보여주면 또 그녀의 신의 힘을 우러러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에셀먼드가 왔다.. 그 남자가, 이곳에. 그녀는 커튼 너머 회장 안에 있을 사람을 생각하며 자조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너는 검을 쓰기엔 너무 손의 힘이 약해. 만약 쓰려면 활을 사용해.’
달달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어든 그녀를 보며 에셀먼드가 말했다. 그때 그녀는 에셀먼드를 거부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비올렛이 후작을 거부하고 시수일레까지도 무시하자 후작역시 비올렛을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대했고 그녀는 바로 검을 배워야만 했다. 검을 보기에도 무서워 했던 비올렛은 검과 친해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에셀먼드가 지적해준 대로 그녀는 활을 주로 쓰게 되었다.
앤이 관리해서 고왔던 손은 이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비올렛은 손바닥의 그 투쟁의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굳은살이 박혔다고 해서 딱히 억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룸과 싸우려면 이런것들은 배워둬야 했다. 그녀가 천민으로 살아갔어도 마찬가지로 이런 투쟁의 자국이 생겼을 것이다. 비올렛은 꽤나 오랫동안 이곳에 서 있엇다.
아마 다들 자신들의 가족의 귀환에, 모두들 들떠있을 것이다. 이곳이 성녀의 성년식이라는 것을 모두 잊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알아도 별로 신경은 쓰고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것을 굳이 바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노골적인 천박한 시선에서 빠져나올 기회였으니 이것은 어떻게 보면 자유를 의미했다.
커튼 안에 주홍불빛이 푸른밤과 대조되었다. 비올렛은 커튼이 걷어지고 나오는 키 큰 남자를 보며 잠시 굳었다. 덩치 큰 남자의 실루엣이 달빛에 드러났다. 그가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에셀먼드였다. 3년이 지나도 그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키도 크고, 어깨도 벌어졌지만, 그 얼굴, 언제나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테라스 끄트머리에 살짝 기대있던 비올렛은 중심을 잡아 꼿꼿이 섰다. 검은 제복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는 비올렛의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비올렛은 그것을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신, 에셀먼드 에르멘가르트. 성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일어나라고 말해야 했지만 말할수가 없었다. 비올렛의 손을 에셀먼드가 가져가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안에 있다 나와 따뜻한 것인지, 그의 입술은 더없이 뜨거웠다.
“그리고, 성년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푸른 눈이 비올렛을 향해 있었다. 아마 그는 비올렛의 손이 더이상 고운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일어나십시오.”
그 말에 에셀먼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시선을 거두어 그를 등졌다.
“변함없이 찬 바람을 좋아하는군.”
인사가 끝나고 바로 반말이 날아왔지만 비올렛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차라리 에셀먼드가 그렇게 말하는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나를 피해서 나간건가?”
에셀먼드의 말에 비올렛이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내려트린 은발이 반짝이며 밤하늘에 흩어졌다. 비올렛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며 말했다.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네요.”
“........”
“승전 축하드린다고 해야하나요, 오라버니? 아니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그녀의 비아냥에 에셀먼드가 입을 열었다.
“그 둘중 어느 쪽도 진심이 아니라는걸 아는데 말할 필요는 없다. 나도 별로 듣고싶지는 않군.”
“그럼 다행이군요. 연기하지 않아도 되니.”
그녀는 코웃음치며 고개를 숙였다.
“너는 아무런 느낌도 없나?”
“무슨 느낌?”
그 말에 에셀먼드가 말했다.
“너는 오늘 이후로 신전에 소속된다.”
“아.”
비올렛이 이제 알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신전에 가겠군요. 그동안 잘 키워줘서 감사하다고 해야하나요. 눈물겹도록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해야 하나? 지금 당장 후작님께 달려가 눈물이라도 흘려드려야 하나요?”
비올렛이 말했다. 비올렛이 뒤를 돌아보자 에셀먼드가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 시선이 거북스러웠다.
“이제와서 감상적이라도 된건가요? 사랑하는 여동생을 떠나보낸다, 뭐 그런거?”
그 말에 에셀먼드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역시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 둘 다 그런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난 별로 신전에 갈 생각은 없어요, 오라버니.”
“그렇다면 가출이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면 옛날처럼 자살이라도 시도할 거냐? 그렇게 어리석게?”
그 말에 비올렛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는 하하, 하며 웃었다. 자살. 그래, 자살. 그런 방법도 있긴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에셀먼드가 알고 있다니. 비틀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어린 시절의 치기를 듣고 기억하시다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몸을 축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답니다. 오라버니.”
에셀먼드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대화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별로 유쾌한 대화가 아니라는 것 역시 알았다.
“이제 티게르난 공작이 올 시간인가요?”
“.......”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되시는 줄 아나, 참 늦네요.”
그녀는 투덜거리며 에셀먼드를 남겨둔 채 테라스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마치 그 순간에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체자레를 위시한 아그레시아의 열 신관이 무도회장으로 들어왔다. 신전파 소속 귀족들의 왕이 이곳에 도착한것이다. 체자레는 오늘도 눈이 부시게 화려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추기경의 법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은 신관의 표식 때문이었다. 황금색과 흰색으로 장식되어, 가운데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이 예복은 국왕이 입은 옷보다 더욱 더 화려해서 시선을 이끌었다. 체자레는 국왕에게 먼저 인사하지 않고, 가운데에 서 있는 비올렛에게 다가왔다. 덕분에 기껏 없어졌던 관심이 다시 그녀에게 쏟아졌다. 체자레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 잘생긴 얼굴 그대로였다. 그는 그 잘생긴 얼굴에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비올렛은 그를 스승으로 예우했다. 체자레는 기다란 옷깃을 걷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맨손에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입술의 감촉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싶었다. 체자레가 말했다.
“성년이 되신걸 축하 드립니다.”
그의 금안이 뜨거운 열기를 머금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아마 그는 그녀를 데려갈 수 있다는 사실에 승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비올렛은 굳이 그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스승님.”
체자레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국왕을 향했다. 신전은 명백히 왕보다 성녀를 우선시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모욕을 당한 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숙부를 보았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오랜만이오, 공작.”
“왕자님은 강녕하십니까? 이런 중요한 날에 보이시지 않는 군요.”
티게르난 공작의 물음은 왜 어린 왕자가 이곳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마치 왜 그를 데려오지 않았냐고 힐난하는 듯 했다.
“왕자는 몸이 별로 좋지 않아 쉬라고 해 두었소.”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 나라 성녀의 성인식인데 아쉽군요.”
체자레를 보며 비올렛은 표정을 굳혔다. 왜 체자레가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체자레는 일부러 그녀와 왕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것이다. 자신을 두고, 자신은 어떠한 입장도 표명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녀는 왕자의 축하인사 따윈 필요 없었다. 국왕과 공작의 무언의 시선이 오갔다. 비올렛은 그 둘의 알력 다툼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체자레는 그 매력적인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 사랑스러운 나라의 심장이 다 자랐습니다. 나라의 안전이 보장되는 이 때, 왜 모두들 그런 표정이십니까.”
“.......”
“즐기십시오.”
그가 말하자 신전파쪽 귀족들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마치 회장을 장악하는 것은 왕이 아니라 체자레인듯 했다. 비올렛은 왕이 애써 표정을 감추고 평온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재미있는 희극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런 수모를 대놓고 당하는 왕이 가엽기도 했다. 신전은 얼마나 이렇게 왕을 짓밟아 온 것일까. 체자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시라도 하는 것일까. 비올렛은 허, 하고 기가차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만한 공작, 그리고 이기적인 왕. 비올렛은 이 나라가 싫었다.
신전파 측 귀족들이 다가와 비올렛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비올렛은 그들이 비올렛을 재단하고 판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체자레가 공식적으로 그녀를 제자라고 언급해도 아꼈을 지언정 이 나라에서 신분이라는 우스운 것은 그녀가 완벽하게 귀족의 탈을 쓰고 귀족처럼 행동해도 사라지지 않은 낙인이었고,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그 와중에 그것을 본 후작이 다가왔다. 비올렛은 후작의 얼굴을 보았는데, 아까까진 에셀먼드를 보며 기뻐하던 얼굴은 다시 수심에 차 있었다.
“성녀님, 경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비올렛이 말했다.
“이제 드디어 신전 쪽에 가시게 되겠습니다.”
비올렛은 후작을 보았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후작님께서는 제가 하루라도 빨리 신전엘 가시길 원하시나봐요? 어렵지도 않겠네요. 공작 각하께서 열명의 신관을 데려온것만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데려가고 싶으신거겠죠.”
그녀가 물었다. 후작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제가 그걸 바랄거라 생각하십니까?”
공연한 물음이었다. 비올렛역시 그저 웃었다. 신전이 비올렛을 데려가면 할 것은 명확했다. 신전은 성녀를 손에 얻는 것이고 국왕과는 달리 성녀의 재림을 더욱더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아그레시아나 아나스타샤처럼 찬란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지한 국민들은 성녀의 재림에 환호하며, 더더욱 신전쪽으로 민심이 기울 것이다. 그리고 왕위계승권자는 어쩌면 이 나라의 왕자가 아니라 추기경이자 공작인 체자레가 될지도 몰랐다. 비올렛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들중 어느 누구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시겠죠, 후작님께서 충성을 바치는 국왕폐하가 신전에게 저런 모욕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으시니까요.”
비올렛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무엇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후작은 너무나 대놓고 그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신전에 들어가면 그녀의 가치는 빛을 발하지만, 국왕파의 손에 들어가면 그녀의 가치는 너무도 한정되었다. 기껏해야 그녀는 나라의 얼굴 정도의 가치였으니 어느 누구라도 신전에게 가는 것을 원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체자레 공작때문인지 그녀의 성스러움을 찬양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무언가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신겁니까?”
비올렛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있다해도 후작님께는 말씀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후작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비올렛은 그저 얌전하게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았다. 체자레는 후작의 옆에 있는 그녀를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체자레는 마침내 모두가 다 파티의 열기에 물들때, 열명의 신관과 함께 그녀에게 다가왔다.이제 순간이 온건가. 열명의 대신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비올렛이 이제 신전 소속이 되었음을 알리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체자레는 그녀를 하루빨리 데려가고 싶어할 것이다.
“성녀님, 성녀님께서는 이제 그동안에 있었던 세속과는 떨어져 지내셔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관중에 한명이 말했다. 침묵하던 대신관들이 떼로 움직여 입을 열자 사람들은 자연히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심지어는 왕 조차도.
“언제 신전에 거하실지 말씀드리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다른 신관이 말했다. 비올렛은 그것을 무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체자레는 대신관들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비올렛과 눈을 마주하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적 그가 지어주는 미소가 따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올렛은, 이것이 정말로 그녀에게 향한 호의일 지언정 그것이 계산에서 나온 미소와 행동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성녀님께서는 이제 신전의 소속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성을 버리시고 교황성에 함께 하셔야 합니다.”
“.......”
“그리하여 성하와 함께, 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성녀님의 힘으로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겁니다.”
또다른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비올렛의 얼굴을 주목하고 있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무도한 자들이었다. 열명의 대신관들과 추기경의 방문. 그것도 국왕이 주도하는 무도회에서 그들은 성녀를 데려가겠노라고 벌써 엄포를 놓고 있었다.
비록 성녀의 성인식을 내키지 않음에도 궁에서 했던 것은 나라의 중대사라 그리 한 것이다. 성녀의 나라에서 성녀의 성인식을 축하하지 않는 것은 어불 성설이니 말이었다. 하지만 벌써 신전의 늙은 여우와 너구리들이 다가와 찬란한 보물이 어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비올렛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그저 간다고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전 소속이 된 성녀는 에르멘가르트라는 성을 버리고, 정말로 비올렛이 되어 신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며 나라를 위해 말룸과 대적한다. 그렇게 짜여진 미래를 그 누구도, 심지어는 왕마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올렛은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하고자 합니다.”
“무슨 말이옵니까.”
“저는 현재 교황 성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체자레가 비올렛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무슨 행동을 하는지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아주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현재 성력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체자레의 표정도 변하게 할 수 박에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크게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성력을 쓸 수 없다니!”
“그 말대로입니다. 신의 성흔은 남아있습니다만 저는 전혀 신의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
“이러한 제가 성스럽고 성결한 교황 성에 감히 들어갈 자격이라도 되는 것일까요?”
그녀가 말했다. 대신관이 이 말도안되는 그녀의 대답에 뭐라고 하려고 했다. 대신관들을 대하는 비올렛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성녀님, 지금 가지 않으시겠다고 거짓을 고하는 것입니까! ”
“정 못믿으시겠다면 대신관 께서 제 몸에 성력이 흐르는지 봐주시겠어요?”
비올렛은 격앙된 목소리와 반대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필이면 그 대신관은 성력을 쓰지 못하는 타락한 대신관이었고, 이에 몇몇 대신관들이 그녀를 에워싼채 그녀의 성력을 느끼려 눈을 감았다. 그 중 에스테반 대신관도 끼어 있었다. 한참을 그녀의 성력을 측정하던 그들이 눈을 뜨며 말했다. 그들은 이 엄청난 진실을 믿고싶지 않아했다.
“......말도 안됩니다.”
“...그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분명 어렸을 적 뵈었을 때는 힘이 넘치시는 분이셨는데.......”
성력을 가진 대신관들은 모두가 그녀가 성력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성력이 없는 대신관들도 그들의 구색에 맞추기 위해서 없다고 같이 증언한다. 결국 열명의 신관 모두가 현재 비올렛은 성력이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체자레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틀린 미소가 서렸다. 그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비올렛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비올렛은 체자레의 얼굴이 다가옴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에게서 짙은 향기가 났다. 어깨가 꽉 잡히며 고통이 일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러실 생각으로 그렇게 여유롭게 계셨던 겁니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 비올렛은 자신이 정말로 체자레를 화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체자레가 비올렛의 성력을 살펴보았지만, 그녀에게서는 단 한점의 성력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성녀의 탈을 쓴 일반인이었다.
“그래도 성녀님, 성녀님은 성녀님이십니다.”
“아니요 추기경 예하.”
비올렛이 말했다.
“저는 성력을 잃어버린 일반인입니다. 제가 성력을 잃은 것은 천한 제 신분때문에 분노하신 신의 변덕일 수도 있답니다. 어쩌면 신의 분노를 받았을 지도 모르는 제가, 어찌 감히 교황성을 들어간답니까.”
비올렛이 말했다. 대신관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비올렛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왕과 다른 이들을 보았다.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후작 역시 보였다.
“애초에 제 성인식을 축하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요.”
“........”
“감히 무도하게 침묵하고 있던 죄, 용서를 구합니다.”
비올렛은 태연하게 말하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이렇게 까지 말한 이상 신전 측에서는 절대로 비올렛을 데려갈 수가 없다. 신에게 버림받았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성녀를 억지로라도 데려갔다가는 위신이 크게 상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체자레가 그녀를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보다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습니다, 성녀님, 아주 좋습니다. 저는 아주 즐겁습니다.”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올렛은 그가 이 상황에도 웃을줄은 몰라 내심 당황했다.
“성녀님, 하지만 당신이 성력을 다시 발휘하시게 되는 날, 당신은 다시 신전 소속이 되시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비올렛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신의 분노가 풀리셨다는데, 저로선 꺼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비올렛은 처음부터 신전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예를들어 이런 것이다. 그 마을을 습격한 산적들이, 신관들의 횡포에 땅을 빼앗겼던 사람들이라면? 국왕이 병력을 소집한 이유가 변경쪽 신전쪽 영지에서 병력을 제공하지 않아서 이교도들의 침략에 급하게 방어를 했어야 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녀에게 있어서 교황도 왕도 같은 증오의 저울추에 있었다. 평평한 저울 추. 혼자인 비올렛은 이 막강한 자들을 무너뜨릴 힘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운명이라면, 어느 쪽에도 필요가 없으면 된다. 혹 그녀가 마지막 말룸의 제물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교황에게도 왕에게도 절대로 이용당할 생각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회원비회원 추천추천~ 모바일도 추천추천~ 추천을 하면은 건강이좋아져요! 세상이 밝아져요! 뿅!!!!!!!
아 오늘도 용량조절 실패... 제가 요사이 몸이 안좋아서 내일은 한편만 올릴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비올렛의 성격이 여러분들에게 와닿았으면 좋겠네요. 비올렛은 왕의 편에도 신전의 편에도 쉽게 가담하지는 않을 겁니다.
잠오네요... 아.......정말 어제부터 몸이 안좋아서 사실 졸면서 소설을 쓰고있어요..
아맞다 어제 투베 1위했던데 여러분들 사랑 너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