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
“아가씨, 정말 오늘 아름다우시네요.”
“고마워.”
비올렛은 그렇게 말하며 거울을 보았다. 어린 소녀는 어느새 여자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피어나지 않았다. 그저 봉오리 맺힌 꽃과 같은 수줍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피아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그맣던 얼굴은 길어지고, 목소리역시 더욱 더 부드러워졌다. 비올렛은 손가락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화장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누가 그녀를 천출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거울 속에 있는 여자는 완벽한 귀족 여성이었다.
그녀는 얌전히 앤의 빗질을 받아들였다. 오늘은 그녀의 성인식이었다. 열 여섯, 이제 정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모든 것을 드러낼 순간이 온 것이다. 앤은 부산스럽게 이것 저것을 준비했는데 비올렛은 그것을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설렘도, 행복도 없다. 그저 순간순간 다가오는 일들을 그저 무난하게 넘어갈 뿐. 그녀의 귀에 커다란 진주귀걸이가 박혀 있었지만 그저 귀가 무거울 뿐이었다.
“정말 많이 자라셨네요.”
앤은 감격에 차 말했다. 비올렛은 앤이 울것같아도 그저 내버려 두었다. 성년이 지나면 그녀는 신전의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앤은 이제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 하는 것이다.
비올렛은 자신의 몸을 보았다. 조그맣던 키는 어느샌가 평범할 정도로 컸고, 성장하지 않았던 가슴조차 어느정도 부풀었다. 작년에는 달거리를 시작했다. 거울너머에는 아주 어렸을 적 꿈꿔왔던 공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그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입 주위의 근육의 움직임에 불과했다.
그녀는 왕궁으로 출발했다. 몇년이 지나도 왕궁은 언제나와 같았다. 화려했으나 공작의 성보다는 무엇인가가 부족한 곳. 공물이라는 것들이 전부 다 교황과 공작의 손아귀에 들어가니 상대적으로 왕궁이 가난해 보일 법도 했다. 옛날에는 무척이나 크고 넓어 비올렛의 눈을 어지럽게 했던 왕궁도 이제는 그녀에게 별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도련님들과 같이 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녀를 따라가던 앤이 말했다. 비올렛은 앤을 바라보았다.
“글쎄, 내가 내 성인식을 멋대로 기념하는 파티에 억지로 가야 하는것도 모자라서, 억지로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하나?”
“.....적어도 다니엘 도련님이라도.”
“다니엘은 아프다잖아. 날 위해 다니엘이 아픈데도 억지로 나와야 하는거야?”
비올렛의 말에 앤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사년이 지났다. 육년 전, 후작 가에 들어왔던 작은 소녀는 어느샌가 성장했다. 하지만 그 성장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모른다. 어렸을 적 해맑게 웃으며 재잘거리던 소녀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언제나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는 불신에 가득찬 여자의 얼굴이었다.
“첫째 도련님이 조만간 돌아올거라는 서신을 보내셨다고 해요.”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비올렛은 앤을 차갑게 바라보다 이내 치맛자락을 걷으며 걸어갔다. 걸음걸이 하나하나마다 기품이 배어나온다. 그 누가 그녀를 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걸음걸이로 복도에 다다르자 비올렛은 앤을 대기실로 보냈다. 이제부터는 비올렛 혼자 걸어가야 한다. 신경이 날카로웠으나 조심스럽게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디디자 갑자기 앞에서 익숙한 인영이 튀어 나왔다. 덕분에 비올렛은 살짝 중심을 잃었다.
“야, 너는 왜 같이 가자고 하지도 않고 먼저가니?”
에이든이 달려와 따지듯 물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은 이제 자라서 어느새 왕실 기사단 로열나이츠의 견습 기사로 입단했다. 첫째인 에셀먼드보다는 다소 미진한 구석은 있지만 그래도 그 역시 그 에르멘가르트 후작 가의 피를 이어 받아 장래가 촉망받는 기사라고들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렸을 때 처럼 변함없이 건들거리며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비올렛은 그저 그를 지나쳤다. 그가 화가 나 떽떽거리며 달려왔다.
“야, 너는 정말 끝까지 계속 날 무시할거야?”
사년간 에이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예배당에 넋을 놓고 울다 실신한 그녀가 며칠동안 함묵증에 걸려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때처럼 그녀가 다시 반응해 줄거라 생각했다. 물론 비올렛이 그렇다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올렛은 언제나 에이든에게 차갑게 대하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것은 첫째와 후작을 가장 닮은 그의 얼굴 생김새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품위없게 그렇게 서 있으면 후작님의 명예에 누가 될텐데?”
“누가 되긴 알게 뭐야, 알아서 하라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비올렛의 대답에 신이난듯 에이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올렛은 한숨을 쉬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모질게 대해도 이 거머리 같은 남자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혐오와 경멸을 담아 그를 바라보아도 그는 끈덕지게 그녀에게 다가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이다. 그녀가 그의 진짜 여동생이라도 된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그를 무시하듯 걸어가자 에이든이 그녀의 손을 홱 하고 빼앗아 들었다. 비올렛이 얼굴을 찌푸리며 에이든을 보니 에이든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공이 들어오는데 아무에게도 에스코드 받지 않으면 되겠어? 오빠한테 받아야지.”
그녀는 그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과 잡힌 손은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불쾌했다.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었지만 사실 혼자서 입장하는 것은 많은 구설수에 오를 위험이 있었다. 하긴 무엇이든 그녀가 지금부터 하는 것보다는 구설수에 오르겠냐만은. 그녀가 포기하고 손에 힘을 주니 에이든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히죽거리며 미소짓는 그 멍청한 얼굴을 비올렛은 외면한 채로 홀로 들어갔다. 사실 왕성을 방문했던 것은 이번이 세번 째 였다. 열살 때 두번, 지금이 한번. 국왕은 단 한번도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그녀를 부른적이 없었다. 그리고 비올렛도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시종이 그녀와 에이든을 보고 그들의 방문을 알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에이든으로서는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한 모습이었으나 비올렛은 그러한 시선을 덤덤히 넘기며 들어갔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긴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 치들에게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하겠지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으며 그들의 작은 파이를 먹으러 온 사람에 불과 했다. 교황, 성녀, 왕. 역사 책에서는 이렇게 권력을 세개로 분류했다. 하지만 천민 출신의 성녀는 그 어느곳에도 속할 수 없다. 기반이 없는 것이다.
“비올렛!”
해맑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올렛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를 한 소녀가 뛰어 나왔다. 아주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순수한 사람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올렛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시스.”
“오랜만이야, 비올렛. 아, 아니.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것을 알아차린 시수일레가 다시 정식으로 예를 취했다. 비올렛역시 살짝 무릎을 굽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게 느껴졌다. 아마 그들은 그녀의 예법에 대해 평가하고 재단할 것이다. 다름아닌 '천민'이 귀족들의 영역에 공식적으로 서 있는 것이니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천민' 의 실수였다. 비올렛은 때문에 더욱 더 완벽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그들앞에 재롱을 부리는 원숭이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에이드리언.”
시수일레가 옆에 서 있는 에이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에이든 역시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검을 좋아하는 에이든은 이런 곳에 익숙하지 않았다. 비올렛은 여자들이 에이든을 향해 선망의 눈길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아직 성인식은 거치려면 2년이 남았지만 에이든은 꽤나 매력적인 생김새를 가진 소년이었다. 벌써부터 떡 벌어진 어깨는 뒷모습만 보면 다 자란 청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시수일레는 그녀에게 무어라고 재잘거리려고 했지만 이어서 온 라이셀 백작 부부와 마주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끊겼다.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비올렛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성녀님.”
“생일 축하 드려요.”
비올렛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후작께서는 함게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폐하와 같이 오실 듯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대화를 끊었다. 에이든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에이든에게 시선 한줌조차 던지지 않았다. 오늘은 그녀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위한 파티를 꼭 남이 주인공인 것 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자, 시스, 저쪽에 데스몬드 백작이 인사를 하자고 하는구나.”
라이셀 백작이 그녀를 데리고 갔다. 시수일레가 백작에게 끌려가며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오늘 이후 비올렛이 신전 소속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아마 제대로 알고있지못할 것이다. 알았다면 분명히 이정도에서 끝나지는 않았겠지.
비올렛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겠다며 세상을 저주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결심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했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의 결심이 견고하고 단단해 지게 했던 것은, 주위 사람들 때문이었다.
후작은 가증스럽게도 그날 이후 마음을 닫은 그녀를 염려하는 척 했다. 그리하여 백작 부인이 데려온 것은 그녀의 딸이었던 것이었다.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온 시수일레를 비올렛은 무척이나 경계했다. 그녀는 시수일레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동갑의 여자아이는 너무나 순수했고, 비올렛은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죄책감이 그녀가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신호였을지도 몰랐다.
“시스, 성녀님과는 너무도 친하게 지내면 안돼.”
“왜요?”
시수일레가 방문했다는 소리를 듣고 산책을 하던 비올렛이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접견실을 향했다. 그러나 열려진 문 사이로 백작 부인과 시수일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멍하게 선 채로 그녀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성녀님은 나중에 폭풍의 핵이 될 거란다. 같이 있는건 너무나 위험하고, 네게 별로 좋은 평판을 가져다 주진 않을거야. 엄마말을 들으렴.”
비올렛은 그 말에 더 듣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백작 부인 역시도 후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귀족이었다. 아무리 보드라운 말로 감싸주었지만, 머릿속에 역시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는 업신여김이 깔려있는 것이다. 체념하고 증오한다고 해 놓고서도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의 비올렛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연회장에서 에이든과 함께 서 있자, 이윽고 나팔소리가 울리더니 국왕이 후작과 함께 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다 손을 가슴에 얹으며 허리를 숙였지만 그녀는 체자레에게 배운 대로 그저 살짝 허리만 숙였다. 국왕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국왕은 혼자 고립되어 서있는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이리 오랜만에 보니 반갑소, 신의 대리인이여.”
왕이 말했다. 비올렛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그대가 성년이 되는 날이지, 그대의 성장은 나라의 축복이오.”
“황공합니다.”
비올렛은 그 말에 최대한 눈을 내리 깔았다.
“앞으로 이 나라를 지켜주시길 바라오. 나는 그대가 그렇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국왕의 대사는 짧았다. 형식적이었으나 그래도 그녀를 성인이자 성녀로 인정한다는 말에 다들 그녀에게 다가갔다. 성년식에는 신전파도, 국왕파들도 절반씩 갈라져 있었고, 라이셀 백작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 이상 그들은 성녀에게 말을 붙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국왕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이 나라의 심장인 성녀의 성작을 축하하는 날이오, 성녀의 존재는 이 나라의 홍복이니 마음껏 먹고 즐기길 바라오.”
그가 잔을 높이 들었다. 비올렛은 그의 말에 따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세번 째 만나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거북스러웠다. 더군다나 한 나라의 왕이었다. 교황은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국왕은 자신을 지나치게 미워한다. 참으로 공평한 곳이다 이곳은. 비올렛이 속으로 비아냥거리던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이 들이닥쳤다. 공작인가 해서 그 문을 보았더니, 다른 이들이 들어왔다.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무도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청년이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코끝에 비릿한 피냄새가 남았다. 무도회와 어울리지 않는 사내들은 모두 다 국왕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급히 달려오느라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온 것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국왕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내려다 보았다.
“승전보를 알려드리려 지휘관이신 파트라이크 경을 두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북부 콘차카족을 국경에서 몰아내는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땅을 결코 침범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국왕의 얼굴에 기쁨이 서렸다. 그리고 후작의 얼굴 역시도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이 수런거렸다. 비올렛의 존재는 방금 들어온 이남자들로 인해 완전히 잊혀졌다. 비올렛은 국왕의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신 에셀먼드 에르멘가르트, 이제야 귀환하였습니다.”
3년만에 보는 에셀먼드의 모습이었다.
============================ 작품 후기 ============================
제가 오래살고 볼일입니다.. .연참하는데 퇴고에 시간 좀 오래걸립니다.. 지니어스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