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원에 핀 제비꽃-52화 (52/208)

00052  움트는 새싹  =========================================================================

“비올렛.”

에셀먼드와 들어오던 비올렛은 다니엘을 마주했다. 다니엘은 에셀먼드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비올렛의 이름을 불렀다. 에셀먼드는 비올렛의 손을 놔주고 그들을 한번 본뒤 돌아갔다. 비올렛은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할까 했지만 말을 아꼈다. 다니엘 역시도 묘한 얼굴로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요사이 에드 형이랑 친하게 지내는구나?”

“응.”

비올렛은 다니엘에게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은 입을 다물고 얼굴을 찡그렸다. 왜그러지? 다니엘이 말했다.

“그래, 너는 정말 어리석구나.”

“내가 왜?”

비올렛이 물었다. 다니엘은 비올렛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화를 내는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비올렛은 답답해졌다.

“다니엘, 왜 그래?”

“너도 형을 선택하는거야, 그렇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다니엘.”

비올렛이 다니엘을 향해 다가갔다. 다니엘은 손을 뿌려쳤다.

“너는 네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될거야. 나는 그것을 말할 수는 없어.”

“.......”

다니엘이 차갑게 말했다. 비올렛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왜 그런거지. 비올렛이 얼굴을 찌푸렸다. 에셀먼드 오라버니와 친하게 지내는게 왜 잘못된 것일까. 앤에게 물었더니 앤이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 다니엘 도련님이 질투를 하시네요.”

“질투?”

“귀여워, 인기도 많으셔라.”

앤은 비올렛의 심각한 고민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고민처럼 말하는 것이다. 비올렛은 정말로 그런가? 생각했다.

“둘째 도련님과 제일 친하게 지내다가 요사이 아가씨는 첫째 도련님만 찾으시는 거잖아요.”

“.......”

“다니엘 도련님은 그게 싫은게 아닐까요?”

정말 그럴까? 하지만 다니엘은 비올렛의 가장 좋은 친구인데 말이다. 오랜만에 비올렛은 체자레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안좋은 쪽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끙끙거리며 다니엘에 대해 고민하자 앤이 웃으며 물었다.

“아가씨, 에드 도련님이 그렇게 좋으세요?”

“응?”

앤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비올렛은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첫째 오라버니가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걸. 그리고 에드 오라버니한테 무슨일이 있을까 겁이난단 말이야.”

“그래요? 그거 참 기뻐하시겠군요.”

“에이, 자기는 내 걱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래.”

“.......”

비올렛이 고개를 돌려 앤을 바라보자 앤의 얼굴이 변해 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비올렛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알자 그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씩씩하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그 오만한 성격은 사라지지 않는다니까요, 그렇죠?”

그녀의 말에 안심한 비올렛이 웃었다.

*

비올렛의 후유증은 점점 사라져갔다.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아 갔지만 후작은 그녀를 배려해 예의 교습을 조금 미뤄주었고, 따라서 비올렛의 일과는 하루종일 책 읽기 아니면, 에이든과 눈싸움하기 정도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에셀먼드를 기다리러 현관으로 가는데 그것이 어찌나 칼같던지 에이든이 볼멘소리를 하며 눈치를 준 적도 있었다. 참고로 에이든은, 언제나 이런 반응이었다.

“그 공작 오면 내가 무찔러 준 다니까!”

그리고 비올렛이 그것을 믿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비올렛의 일상은 소소하지만 부드럽게 흘러갔다. 가끔 악몽이 그녀를 괴롭히면, 앤이 달려와 그녀를 안아주었고 그녀는 그 충격에서 점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느껴지는 두려움은 그녀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그것을 꾹 참고 에셀먼드를 보면 그녀의 두려움은 고개를 감추고는 했다.

그녀가 기다리는 것을 알았는지 에셀먼드는 되도록이면 정시에 왔는데, 하루는 에이든과 비올렛이 같이 기다릴 때도 있었고, 비올렛만 서서 기다릴 때도 있었다. 또 에셀먼드 역시 후작과 같이 올 때도 있었고, 혼자 올 때도 있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에셀먼드는 비올렛을 보면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작은 손으로 에셀먼드의 큰 손을 행여나 놓칠새라 꼭 잡고 현관으로 돌아갔다. 에셀먼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비올렛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비올렛의 하루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비올렛은 이대로 아무 변화가 없기를 바랐다.

시간은 흘러갔고 서늘한 바람이 훈기를 머금었을때, 공작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너무도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떠한 방비도 하지 못했다. 집에는 다니엘과 에이든 만이 남아 있었는데, 다니엘로서는 막강한 공작을 상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붉은 머리카락의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방문에 비올렛은 깜짝놀라 그만 기울이고 있던 차를 떨어트렸다. 그의 머리색 같은 홍차가 바닥을 물들였다.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성녀님께서는 공작님을 만나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앤이 말했다. 하지만 비올렛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앤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누가 아는가, 체자레가 하녀들을 잡아 갔듯, 앤을 잡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가씨...”

숨이 턱하고 막혔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저 남자가, 너무도 두려웠다. 첫째 오라버니는 아직인가? 후작은? 비올렛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나의 제자.”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려퍼졌다. 언제나 처럼 매끄러운 음성이지만 비올렛은 그 음성이 너무도 무서워 귀를 막고싶었다.

“이런, 아직도 제가 무서우십니까.”

체자레의 목소리에 비올렛이 정신을 차렸다. 비명을 지르며 앤의 뒤에 숨고 싶었지만 앤 역시 비슷한 꼴이 날까 두려웠다.

“주위를 물러주시겠습니가?”

체자레의 말에 비올렛은 덜덜 떨다가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나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체자레가 그녀의 기색을 눈치 챈 듯 했다.

“물론 성녀님께서 저를 보고 싶지 않다면 저는 당장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무례는 두번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래보여도 일단 제가 공작이니까요.”

그러면서 웃는 그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퍼졌다. 아마 다니엘도 비슷하게 협박했으리라. 만약 그녀가 이것을 거절하면 이곳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될 지 모른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앤, 나가줘.  다들 나가주세요.”

앤을 비롯하여 후작 가에 있는 기사들과 시종들이 모두 물러났다. 앤이 나가면서까지 그녀의 눈을 보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라도 지르라는 의미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부터 만나려고 했습니다만, 후작께서는 제 요청을 거절하시더군요. 마치 처음에 성녀님을 만나려고 할 때처럼 말이죠.”

체자레가 비올렛의 건너 편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체자레의 눈도 마주치 못한채 고개를 푹 숙였다.

“꽤나 충격이 크신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비올렛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성녀님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너무 많은걸 보여주려 했군요.”

체자레의 씁쓸한 어조에도 비올렛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비올렛.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 왔습니다.”

그가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화려한 옷에 달린 금붙이가 번쩍거렸다. 체자레는 비올렛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체자레를 보고 겁에 질렸다.

“떨고 계시는군요.”

그를 올려다보는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숙여도 체자레의 얼굴이 보였다. 비올렛은 몸을 일으켜 도망가고 싶었으나, 도망조차 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엔 그녀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정말로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녀님, 제가 성녀님을 해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는 손을 들어 비올렛의 손위에 얹는 것이었다. 차가운 손. 그 느낌이 소름끼쳐 손을 빼내고 싶었으나 체자레가 그녀의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성녀님,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약속 드립니다. 이러한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신의 이름을 빌려, 그리고 티게르난이라는 선선대 왕이 내린 이름을 빌려 말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비올렛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 감옥에 있던 이들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은 채로 이미 신의 품으로 보냈습니다.”

그녀가 몸을 움찔 했다. 죽었다. 결국 그들을 죽여버렸다. 그녀는 한층 더 눈 앞의 남자가 두렵게 느껴졌다. 체자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무섭습니까? 두렵습니까? 당신도 저들처럼 될까봐 무서운 모양입니다.”

“.......”

“성녀님께선 나를 비난하고 계시겠지요, 나의 도덕적 결함에 대해, 내 잔혹성에 대해 비난하고 있을 겁니다.”

“.......”

“가엾으신분, 그러나 너무나 순수하신분.”

그는 그렇게 부드럽게 말하며 비올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신이 속한 이곳을 너무 믿고계시기에, 진실을 알려드리려 왔습니다.”

진실. 체자레의 얼굴을 바라보던 비올렛이 되뇌었다. 이것은 뱀이 그녀를 유혹하려는 간교한 사술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정말로 진실을 알리러 온 열렬한 추종자의 간언일수도 있었다. 어느쪽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저 둘중 하나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는 그가 말하는 진실을 들어야만 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 죽은 소년 말입니다.”

“........”

“그 소년이 왜 제 성에 있었는지 생각 해 보셨습니까?”

순간 쿵쿵 뛰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멈추는 것 같았다. 비올렛이 체자레를 보니 체자레는 그 금빛 눈동자에 그녀만을 담을 뿐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누가 그 소년을 넘긴 것일까요?”

그 말에 비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토미의 생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었을 거라 생각했고 살아있다 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부담이었으므로 이기적이었지만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것에 대해 잊으려고 노력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토미를 체자레에게 넘긴 것은 누구일까.

“그때 성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체자레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에셀먼드. 에셀먼드였다. 그녀의 앞에서 친히 토미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목을 베었다.

“.....아.”

그녀의 낮은 목소리에 체자레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저는 당신에게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작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분노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황성하도 그에 분노했었지요. 그래서 후작의 성에 찾아갔더니 또 주요 죄수들은 이미 처형했다더군요 그러나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보다 소중한 성녀님이 아니십니까. 나라의 보물을 그렇게나 방치하고, 학대하고. 그러다가 다른 나라에 납치가 될 뻔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그 사실을 알고 책임을 물었지요.”

“.......”

“그리고 성안에 있던 그 어린 성의 주인은 내게 그 소년을 주었답니다.”

비올렛은 에셀먼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그 주인은 제 잔혹함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제 말은 아직 시작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녀님.”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올렛은 듣고싶지 않았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그리고 또 어디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사실 당신의 출생지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이 있었으니까요."

“......”

“당신이 푸줏간집에서 태어난 천민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 마을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는 것도. 평민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천민이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것도.”

그가 속삭였다.

“당신의 마을이 후작령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까?”

“.......”

“정확히 당신의 마을은 규정된 이름이 있는게 아닌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도시 글레프 근방에 위치한 그 마을을 사람들은 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더군요.”

갑작스럽게 자신의 마을 이야기가 나오자 비올렛은 체자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충격에 벗어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체자레의 손은 아직도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왜 산적이 그곳을 습격했을까요. 도시 글레프의 병력이 항상 주둔해 있어 산적들은 에르멘가르트 후작령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

“왜 습격했을까요?”

비올렛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날 왕은 병사의 충원을 요청했고, 후작은 징집을 하기보다는 이미 준비되어있던 주둔 병력을 왕에게 헌납하였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왕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 말이죠. 다른 방법은 있었습니다. 다른 병사들을 징집해서 올려보냈다면, 병력이 상대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그 곳이 먹이가 될 일도 없었을 겁니다.”

“.......”

비올렛은 이제 달달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체자레를 바라보지 못한채 멍하게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아니, 아니다. 무슨 사정이 있을거다. 아니, 무슨 사정이 있었다고 해서 그녀가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이건 너무도 잔인하지 않은가? 체자레는 그녀가 어떠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맞습니다 성녀님. 당신의 부모님이 죽은 것은 후작과 왕의 결정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어요.”

비올렛이 말했다. 그것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정신을 지키려는 서툰 몸짓에 불과했다. 그것은 헛된 저항이었다. 체자레는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대답해준 것이 무척 기쁜 듯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후작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

그는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비올렛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체자레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렸다. 그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그만.”

비올렛이 말했다. 체자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그만할까요? 하지만 비올렛, 당신은 또 얼마나 높은 기만의 탑 위에 외롭게 살 생각이십니까? 당신은 내가 말하려던 것을 평생 궁금해 하며 의심할 것입니다.”

비올렛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마치 악마와도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악마의 덫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체자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체자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처참하게 마을을 짓밟힌 당신은 부모를 잃고 산적들에게 꽃의 거리에 팔려갔을겁니다. 그리고 3년동안 또 다시 매질을 당하며 그 창녀들의 거리에서 살아왔었죠. 만약 이 신성이 당신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창녀가 되었거나.”

“.......”

“당신의 언니들 처럼 후작에게 살해당했겠죠.”

이번에 비올렛은 벌떡 일어났다. 체자레는 그런 그녀를 강제하지 않았다. 믿고싶지 않았다. 아니, 듣고싶지도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비올렛은 말했다.

“나가요, 제발 나가요! 공작님, 제발 나가주세요!  제발! 듣고싶지 않아요!”

“.....외면하고 싶습니까?”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도 않았습니다.”

“......제발.”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체자레는 그녀의 울음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서럽게 흐느끼는 그녀를 체자레는 굳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체자레가 그런 얼굴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그녀의 울음에 아무것도 못 느끼는 듯 냉정한 표정인 것도 같았지만 또 어찌보면 그녀를 동정하는 눈빛이기도 하며, 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갓 열두 살이 넘은 소녀의 불행을 똑똑히 지켜 보았다.

“왕국군이 당신이 있었던 곳에 올리가 없습니다. 비올렛, 영지내의 모든 군사활동은 영지의 주인이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

“에르멘가르트 후작이 꽃의 거리를 섬멸하라 명했습니다.”

“.......”

“영지마다 있는 꽃의 거리는 범죄의 온상입니다. 신관들마저 그곳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더러운 곳이죠.”

“.......”

“그리고 그곳이 산적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그래요, 성녀님. 당신이 산적들에게서 그곳에 팔려온 것만 봐도 알수있을겁니다.”

“아.......”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히 ‘일부’일 뿐, 전체가 아니었던 것이 유감이었던 거죠.”

체자레의 냉정한 말에, 비올렛은 그저 망연하게 서 있었다. 이제 그가 알려주는 진실은 더 없는 듯 했다. 비올렛의 얼굴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감입니다 비올렛.”

“.......”

“그러나 당신이 얼마나 많은 거짓에 둘러싸였는지는 최소한 알아야만 했습니다. 내가 나의 잔혹함을 드러내었듯, 후작도 후작의 잔혹함을 드러내야죠. 그래야 공평한 게임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말했다. 비올렛은 체자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체자레는 적어도 그녀의 가족을 살해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빼앗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작은, 그녀가 아버지로 여기던 후작은 모든 일을 저질렀다.

“성녀님의 부모를 앗아가고, 당신의 가족같은 언니들을 앗아가고, 당신을 신전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당신의 죄인인 소꿉친구까지도 제게 넘겨주었군요. 당신이 있는 이곳은 당신의 집입니까? 그리고 이 자들은 당신들의 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체자레는 그 어떠한 위로도 건네지 않고 그녀의 반응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마자 앤이 들어왔다. 창백하게 질린채 서 있는 비올렛을 껴안았다.

“괜찮으세요?”

비올렛은 더이상 떨지 않았다. 그저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녀는 앤을 뿌리치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비올렛은 그녀의 방 앞에 서 있던 다니엘을 만났다. 다니엘역시 그녀가 걱정스러운지 그녀를 보러 이곳으로 온 듯 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얼굴이었던 그는 그녀를 보고 깜작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라 했다. 앤마저도.

“무슨일이니 비올렛?!”

다니엘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비올렛은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은 알고 있을까? 정말로?  아니, 다니엘이라고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올렛은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다니엘, 우리가 영지에 있을때 티게르난 공작이 방문했어?”

그녀의 말에 다니엘의 얼굴이 굳었다.

“첫째 오라버니가 토미를 넘긴거야?”

그 말에 다니엘이 그녀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비올렛은 답답해졌다.

“말해줘 다니엘.......”

그녀가 힘겹게 말하자, 다니엘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주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비올렛을 안아주었다.

“그래, 사실이야.”

절망이 비올렛을 지배했다. 눈물따윈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너무나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니엘이 뭐라고 말하며 그녀를 위로했으나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무엇인가가 어그러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변화는 이제 시작이었다.

공작이 방문했다는 소리를 들은 후작의 퇴궁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졌다. 불과 두 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온 후작은 오자마자 비올렛의 방에 왔다. 비올렛은 어지럼증에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후작을 보는 비올렛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엇던 부끄러움을 타는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유령과도 같이 파리한 얼굴 만이 보였다.

“후작님.”

“어지러우면 쉬셔도 됩니다.”

하지만 비올렛은 걸었다. 앤이 옆에 있었지만 그녀는 앤의 부축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발짜국 두발짜국 다가갔다. 그녀의 걸음이 휘청거리며 위태했다.

“에드라면 이야기를 해 두었습니다. 나중에 올 겁니다.”

비올렛을 보며 후작이 안심을 시켜주듯 엷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비올렛은 그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테이블에 자리한 후작의 맞은편에 앉아서 말하는 것이었다.

“후작님, 제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고 계세요?”

그 말에 후작의 얼굴이 밀랍처럼 굳었다. 비올렛은 그 얼굴에 절망을 느꼈다.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신이시여. 나를 사랑한다면 이것이 사실이 아니길. 그녀는 속으로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공작이 그랬어요. 내 마을이 습격당한 이유가 왕께서 군사를 모으시는데,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군사들을 후작님이 보내셔서 습격당한거라고.”

“.......”

“아니죠, 아니시죠?”

비올렛이 눈물젖은 눈으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대답이 사실이라는 것은 비올렛은 알고 있었다. 이미 다니엘에게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비올렛은 그리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꽃의 거리. 제가 살았던 곳.”

“.......”

“거기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 명령하셨던게 후작님이신가요?”

“.......”

“그곳의 일부가 산적들과 관련이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비올렛은 후작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그것은 죄책감을 느끼는 이의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죽여야겠어요,  아니, 저는 죽을뻔 했었죠. 이게 없었으면 전 죽었을 거에요."

그녀가 이마에 있는 푸른 성흔을 가리켰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군사의 일은 폐하의 명이었습니다. 저는 폐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후작의 말에 비올렛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 명령에  사람들이, 제 어머니 아버지가 죽은건 상관없는건가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법입니다”

비올렛은 후작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괴로운 것은 그녀였다

“나는, 내 언니들은 관련이 있지 않았어요. 언니들은 무고했단 말이에요.”

“성녀님.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남자들을 몇명이나 받아들이는 그녀들이, 정말로 관련이 없었겠습니까? 그것을 판별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고, 산적들의 소굴을 발본색원 했다는 것을 혹여 내통자가 알았다가는 그들은 또다시 숨어들 수도 있었습니다.”

후작의 말이 맞았다. 아니, 후작의 위치에서 그런 명령은 합당할지도 모른다. 왕의 명령을 따르고, 산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행동으로는 내통자들을 없애는게 맞았다. 비록 그사람들이 내통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하지만, 그것에 부모님이 죽었다. 그것에 아무 죄도 없는 언니들이 죽어버렸다. 아무리 고된 현실에도 미래의 희망에 대해 말하며 환하게 웃음 짓던,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후작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왕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저 아랫사람으로 태어나버린 그들의 잘못인가?

비올렛의 머릿속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간다. 어린그녀가 태어나 자라고 만나왔던 사람들, 그리고 꽃의 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후작, 후작가의 사람들, 체자레. 죽어가던 사람들, 죽어버린 사람들, 필사적으로 살기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비올렛은 깨닫는것이다. 후작은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조차 않은 것을.

역겹다.

비올렛은 처음으로 그 단어가 강하게 떠올랐다. 이 모든게 역겨웠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간 정의를 주장하나 실속없는 위정자의 그늘아래 살아가고 있었다. 위선자를 오빠라고 부르며 그를 좋아했었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방을 나갔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석다고 말하던 다니엘의 동정어린 표정이 기억이 난다. 체자레의 얼굴도 스쳐지나간다. 자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그녀 하나를 잃지않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한 소년을 팔아넘기고, 왕의 명령을 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은 채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자들의 손에서 무엇을 배우려 했던 것일까. 그녀는 저택을 뛰쳐나갔다.

누군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후작의 명령으로 따라붙은 자들이었다. 정말로 그녀가 도망을 갈 수도 있으니 이젠 노골적으로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이곳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마침 들어오는 에셀먼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에셀먼드가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때, 그녀는 에셀먼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를 스쳐 지나가 정신없이 뛰었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존재가 차라리 없었으면 한다. 비올렛은 예배당에 뛰어들어갔다. 발바닥에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어느 샌가 맨발이었다. 하지만 그 아픔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그레시아의 석상이 보인다. 그 뒤에 신을 상징하는 빛의 모양이 보인다. 그녀가 겪고있는 고통과 다르게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아그레시아를 보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와 같은 이마의 성흔을 하고 있는 아그레시아는 지금의 그녀와 달리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지배받는 탐욕스러운 자들은 얼마 없는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서로 배신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려 한다. 토미가 그랬듯, 산적들이 그랬듯, 그녀를 팔아넘기려는 사람이 그랬듯.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그런 아래사람들을 그저 숫자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 없이 살아간다. 체자레가 그렇듯 교황이 그렇듯 후작이 그렇듯, 왕이 그렇듯. 에드가 그렇듯.

어떻게 그들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싸우는 것인가. 그러다 문득 성녀들은 모두 귀족출신의 아가씨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녀와 같은 감정을 결코 느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저 다른 사람들 처럼 그들의 위에 군림하며, 똑같이 살아왔을 것이다. 비올렛은 아그레시아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위에 걸린 구체의 모양의 신을 형상화한 동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그러했듯 손을 모았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차마 두려워 제대로 올려다 볼 수 조차 없던 동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치는 것이었다.

“신이시여!”

그녀의 말은 그녀의 울부짖음에 섞여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선택받지 않았다면 이런 삶속에 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채 남들과 같이 죽었을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떤 비참한 삶 속에도, 이렇게나 암울함을 느끼지 않을 텐데. 왜 신은 나를 만들었을까. 왜 나를 선택했을까, 이 모든것은 신의 안배인가. 모두가 잘못이 없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잘못은 당신에게 있는 것일까. 왜 신은 나를 선택해서 이렇게 시련을 주나.

이 세상이 미웠다, 그리고 이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이 저주스러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그녀의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당신을 저주합니다.”

이렇게 운명을 만든 신을 저주했다.

“당신을 저주합니다, 신이시여!”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무너져 내리듯 울었다. 비올렛의 흐느낌 사이로 목소리가 전해져 내려온다. 절망과 분노, 증오로 들어찬 마음을 품은채 신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성녀는 신을 저주하며 울부짖었다.

[킥킥킥, 시작도 하기 전에 이겨버렸군.]

그녀의 울부짖음 뒤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움트는 새싹 (1부) end

============================ 작품 후기 ============================

와나... 조아라... 이편이 안올라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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