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움트는 새싹 =========================================================================
체자레의 방문은 이틀 후에 이루어졌다. 본디 법도대로라면 집 주인인 후작이 공작이라는 지위에 있는 그를 맞이해야 함이 옳았으나, 이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었고, 공작 에게 지나치게 경계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좋지 않았다.후작은 에셀먼드라도 집에 남겨둘까했지만 에셀먼드 역시 기사단 일을 오래 쉬었으므로 성실하게 업무에 임해야 할 때였다. 비록 로열나이츠였을지라도 그는 나라의 기사였고, 가문의 일을 마냥 우선으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라에 소임을 다해야만 했다.
결국 후작은 기사들 몇을 붙여주는 것으로 방비할 수 밖에 없었다. 본디 호위하는 업무는 지루하여 지원자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지원자들이 수두룩 했으므로, 저택에 기사들을 수월하게 대치시켜 놓을 수 있었다. 티게르난 공작이 미친 짓만 하지 않은 이상, 일단 수월하게 그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가기 전 후작은 어쩐지 겁을 먹은 것 같은 비올렛에게 말했다.
“혹, 무슨 일이 있으시면 소리를 지르셔서 밖에 있는 기사에게 알려야 합니다.”
“네.”
“그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 다 믿어서는 안됩니다.”
“알았어요.”
“혹 그가 따라가자고 해도, 무엇을 해준다고 해도......”
이때 만큼은 후작은 말을 늘일 수 밖에 없었는게, 우선 비올렛이 이곳에 와서 당했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신전에서는 비올렛을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하겠지. 신전에 가면 표면적이든 어디든 그녀의 대우는 이보다 더 좋아질 수 있었다.
“안 따라 갈게요.”
비올렛이 대답했다. 어린 소녀의 하늘색 눈동자는 확고한 빛을 담고 있었다. 사실 신관을 피해서 그를 선택한 것도 그녀였다. 생각해보면 후작은 왜 그녀가 자신을 선택한 것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골랐다. 후작은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나중에 그 이유도 물어봐야 겠다 생각하며 후작은 자신의 커다란 손을 들었다. 그녀는 이전처럼 움츠리지 않고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손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전해졌다. 누군가 성녀를 이렇게 대하는 것을 알면 신성모독이라고 핏대를 세울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꽤나 보기 좋은 얼굴로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때처럼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무엇을요?”
“아버님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녀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 그건 신관들이 후작을 몰아가서 그것이 화가 나 그랬던 것이다. 비올렛은 우물쭈물하며 조그맣게 아버님이라고 말했다. 앤이 옆에서 쿡쿡 하고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에게서 떠나지 않을게요.”
비올렛이 말했다. 그리고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비올렛은 이걸로 정말로 에셀먼드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로 후작은 화가 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
“후작님과 아가씨는 보는 재미가 있어요. 꼭 연애하는 것 같다니까요?”
앤이 웃으며 말했다. 공작의 방문으로 집은 초토화에 경계태세가 들어갔으나 앤은 시종일관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연애라니. 그녀가 앤을 흘겨보았다.
“이게 다 앤 때문이잖아.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끝맺음 말이 전부 다 ‘보고싶어요’라고 써야한다고 할때 정말 부끄러웠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다 앤이 꾸민거라니.......”
앤이 말했다.
“그거야, 후작님은 애교에 약하시니까요. 후작님이 싫어하실 일을 제가 하게 했겠어요? 후작님이 아가씨를 싫어했으면 이런 일도 안시켜요. 정말이에요."
끝까지 자긴 잘했다고 그런다. 그런데 또 결과가 좋아서 앤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이게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화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비올렛은 그저 얼굴을 찡그린 채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화를 내면 앤은 더 좋아한다.
“이제 공작님께서 오시겠네요.”
“응.”
비올렛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누구라도 있어주면 좋으련만. 그때 문이 살짝 열렸다. 공작인가 싶어서 화들짝 놀라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칼츠 경이 웃으며 손을 흔들했다. 꽤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옆에 서 있던 앤은 칼츠경이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알았다.
“성녀님,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를 꼭 치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어쩐지 아는 얼굴이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안심이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조금 안심이 된 얼굴로 시간이 지났다.
조금 지루해질 찰나 문이 활짝 열렸다. 짙은 향수 냄새에 고개를 돌리니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는 그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어쩐지 졸린 것 같은 나른한 인상을 주었다.
사제라고 하면서도 언제나 그는 화려했다. 공작이기도 하고 사제이기도 했지만, 그는 공작에 더 가까워 보였다. 어두운 루비 색의 붉은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였으며, 귀에는 커다란 푸른 보석이 달린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옷 하나 하나는 금박이 들어갔으며 그가 신고 있는 가죽 부츠 역시도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로지 그가 사제라는것을 알게 했던 것은 그저 그에 목걸이에 걸린 은색의 로자리오였다. 비올렛은 어쩌면 그가 왕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앤이 얼른 인사를 하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둘 밖에 남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체자레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아,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따스할 거라 생각했던 그의 입술은 차가웠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러나 차가운 그의 입술과는 다르게 금색의 눈동자는 너무도 뜨거웠다. 그 간극에 비올렛은 소름이 끼쳤다. 비올렛은 그 옛날 호감을 느꼈던 자신이 이상했다. 무엇을 보고 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저 우는 것을 달래주었기 때문에?
“일어나세요.”
그 말에 체자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테이블에 앉았다. 이렇게 그를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첫 만남때도 두 번째 만남때도 워낙 경황이 없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어딘가가 교만해보이기도 했다. 그의 눈꼬리는 축 쳐진 편이었고, 그의 왼쪽 눈 아래에는 눈물점이 있었다. 금안이 그를 바라보자 그녀는 핫, 하고 시선을 피했다.
“제가 궁금하십니까?”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비올렛은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그가 궁금했고,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그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는 미소를 지었는데, 긴 속눈썹이 보였다.
“어차피 에르멘가르트 후작에게 다 들었을텐데, 그래도 제가 궁금하십니까.”
그 말에 비올렛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 입을 다물었다. 놀리는 것일까.
“혹시 불쾌하셨나요?”
“아니요, 그저 제게 주시는 관심이 기뻐서 그럽니다.”
그가 미소지었다. 그 말에 비올렛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적어도 불쾌해 하지는 않는것 같으니 말이었다.
“왜 공작과 추기경의 지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나요? 저는 신관은 작위를 가지지 못한다고 배웠어요.”
“본래대로라면 그렇습니다만 저는 선선대 국왕 폐하이자 제 아버지께서 사후에 저를 염려하시어 유언을 내리셨습니다. 저는 그때 신관이었지만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비올렛의 말은 언뜻 보면 도전적으로 들렸지만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악의없는 그녀의 눈동자에 체자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왕께서도 허락하시고 교황께서도 허하신 일인데, 이렇게 된 걸 보면 괜찮은가 보더군요.”
뭘까 저런 가벼운 말투는. 비올렛이 생각했다.
“그보다 다른 궁금한 건 없습니까?”
“네?”
“뭐 키라던가, 몸무게라던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던가.”
“네에?”
뭐라고 하는거지? 비올렛은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체자레는 짖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질문에 더 당황하자 더욱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걸 물어봐야 하는걸까, 고민하고 있을때 체자레게 말했다.
“저는 성녀님께서 제게 궁금하시는 것이 기분 좋습니다.”
그 능글맞은 미소에 비올렛의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다. 키나 몸무게나 좋아하는 음식이 궁금할리가 없지 않은가. 무섭기로 소문난 티게르난 공작에게. 궁금증을 찾고 찾았던 그녀는 별생각 없이 정말로 궁금했던 한가지를 물었다.
“아, 그럼 교황님은 어떤 분이 신가요?”
그 말에 활짝 미소 짓고 있던 체자레의 얼굴이 변했다. 분명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싸늘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굳어버린 그 얼굴에서 어딘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후작이 물어보라 시켰나요?”
그 다정한 말투에 비올렛은 고개를 저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탐색하듯 바라본다. 마치 야생동물과 같은 금안에 눈을 피할수가 없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인데. 그녀가 겁을 집어 먹자 그것마저 싸늘히 훑어보던 그의 얼굴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니 별안간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좋은 음성이 방안에서 퍼져나갔다.
“겁을 먹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성녀님께서 아시고 싶으시다면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네, 네.”
“현 교황 린도 성하께서는 25년전에 즉위하셨습니다.”
“아.”
그렇다면 교황은 최소 나이가 스물 다섯 살 이상이라는 것이구나. 비올렛은 생각했다.
“만인이 행복하게 살게하는 데에 아주 관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성녀님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시죠. 성녀님을 아주많이 보고싶어 하신답니다. 참 순수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미소지었다. 교황이 나를 보고 싶어한다고? 그래, 물론 그녀를 보고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교황이 순수하다고? 그렇다면 왜 후작과 왕은 교황을 싫어하는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성녀님을 정말로 강렬하게 열망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죠. 그분 만큼 세상에서 성녀님을 사랑하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너무나 커다란 사랑의 말에 비올렛의 가슴은 선뜩해졌다. 체자레의 말이 사실일까.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가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그 무서운 교황이라니.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 말에 비올렛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뭐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날이 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가 어깨를 으쓱 했다. 그 여유로운 말과 태도는 마치 너는 피할 수 없을 거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자 체자레가 말했다.
“이런, 그 전처럼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는군요.”
그러면서 그는 그녀에게 얼굴을 고정시켰는데 그 잘생긴 얼굴이 숨이 막힐정도로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은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분별없이 말할 정도로 그녀는 어리석지는 않았으니.
“자, 또 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까? 분명 저는 일반인이되 일반인이 아니라, 성녀님의 상식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을 텐데요, 추기경인데 공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대답해 줄 태세였다.마치 기회를 줄테니 이 기회에 전부 물어보라는 것 같았다. 비올렛은 또 무엇을 물어봐야하는건지 끙끙거리며 생각했다.
“아, 그렇다면 신관님 께서는 선선대 왕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이렇게 젊고 잘생긴거죠?”
그 말에 그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순진하고 소박한 물음이었다. 그의 웃음 소리는 경망스럽지도 않았으며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듯 비밀스럽지도 않았다. 얼굴에 미소를 지으니 새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보여 그의 얼굴을 돋보여 주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제가 올해 마흔 여덟이 됩니다.”
“.........”
비올렛은 그 소리를 듣고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리고 마흔 여덟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네에?”
그녀의 눈이 커지자 그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좋은 웃음이 흩뿌려졌다.
“말도안돼요, 그러면 할아버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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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올렛 그거 아니야.......그럼 안돼...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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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추천송이 이 버전이네요...
오탈자 지적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