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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42화 (42/208)

00042  움트는 새싹  =========================================================================

“어머 어머, 성녀님.”

라이셀 백작 부인이 그녀를 찾아온 것은 점심을 먹고 난 오후였다. 비올렛은 웃으며 백작 부인을 맞아들였는데, 백작 부인은 달라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영지로 내려가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앤이 그녀가 납치당해 군나르 족에게 팔릴뻔한 일은 절대로 함구하라고 했기 때문에 가장 큰 변화인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일도 없었어요.”

그말에 백작부인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붉은 부채를 들며 팔랑거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동자는 작고 어린 것을 보는 시선이 아니라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이젠 대답도 잘하시고, 태도에 자신감이 차 있는것 같아요.”

“그런가요?”

비올렛은 대답했다. 이상하다. 그녀는 똑같은 것 같은데,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녀가 변했다고들 한다. 백작 부인은 그녀를 찬찬히 뜯어본 후 속삭였다.

“하드퍼드 백작 부인에게 본때를 보여줬다면서요?”

아, 알고 있었던 걸까? 비올렛은 깜짝 놀랐다. 백작 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 성녀님, 아직 멀으습니다."

비올렛은 머쓱한 표정이었다. 무엇이 멀었다는 건지 정확히 파악은 안되었지만, 어떤 것을 지적하는지는 알수 있었다.

“아까까지는 잘 하셨어요, 당연하겠지만 이런 민감한 일은 모르는 척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유도신문에 대응하는 법과 표정관리는 조금 더 하셔야겠어요. 그래도 아주 잘하셨어요.”

백작 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백작 부인의 시선이 따스하다는것을 알자 어쩐지 부끄러워진 비올렛이 말했다.

“사실 백작 부인께서 제게 알려주신 것을 되뇌고 또 되뇌었어요.”

백작 부인은 다시 부채를 피며 살랑살랑 흔들더니 볼에 붉은 홍조를 띄며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우아해 보여 비올렛은 자신은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성녀님이 노력하신 덕택이죠. 자신감을 가지세요. 하드퍼드 백작 영애는 촌뜨기인걸요. 제게 가르침을 받은 성녀님보다 못하는건 당연한겁니다.”

“.........”

하드퍼드 가를 말하는 백작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후작의 외조카다. 후작과 라이셀 백작은 친분이 있는 것 처럼 보였는데 아니었을까. 그녀의 의문어린 시선에도 백작 부인은 그저 미소를 지었는데, 더이상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비올렛은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판단 내에서 어떠한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분석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린 비올렛이 해왔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하시지 않겠나요? 저는 성녀님의 이야기를 듣고싶은데요. 물론 성녀님의 교육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 말에 비올렛 그녀가 납치 당했던 일을 빼고 모든 일을 다 말해야했다. 그것을 듣는 백작부인의 표정은 미동이 없었다. 다만, 마지막의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라다 이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성녀님이기에 할 수 있는 발상이네요.”

“......역시 제가 심했나요?”

비올렛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백작 부인은 앤처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었다.

“세련된 방법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무식한 방법도 아니지요. 성녀님의 권위를 내세우는데 그것이 어떻게 무식하고 무도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나요?”

그 말에 비올렛은 어쩐지 칭찬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남의 뺨을 때릴뻔한게 어떻게 칭찬을 받을만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아직도 완전히 이해를 한 것은 아니지만 비올렛은 자신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고, 지켜야 할 긍지라는게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깨달았다.

“마무리까지 완벽해요. 소문으로 듣던 것 보다 상상 이상인데요?”

“소문이요?”

“모르셨나요? 수도에는 듣는 귀들이 많답니다. 아랫 것들 입단속을 제대로 못한 잘못이겠지요. 성녀님은 아랫 사람들 입단속을 철저히 하셔야 합니다.”

그녀는 부채를 팔랑거렸다. 그 말에 비올렛은 자신에게 아랫 사람이 있긴 했나. 라고 생각하다가 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랫사람이라기엔 언니같은 구석이 있었다.

“저는 후작님이 화를 내실거라 생각했어요. 사실 화를 안내셔서 놀랐어요, 후작님은 화를 참고 계시는 걸까요?”

그녀는 사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을 물었다.

“저런, 그런 생각을, 후작님이 얼마나 성녀님을 생각하는지 모르시나요?”

“정말이요?”

“그럼요.”

백작 부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부채를 다시 팔랑이며 말했다.

“하드퍼드 백작 모녀건에 대해선 걱정할게 없어요. 후작님께선 화를 아주 많이 내셨다고 해요.”

“........”

“언제나 오면 한달은 묵고 가는 그녀가 왜 지금은 없을까요?”

그 물음에 비올렛은 어물어물 대답하려고 했다. 단순히 그냥 바빴기 때문은 아닐것이다. 그 말에 백작 부인이 말했다.

“후작께서 쫓아내셨거든요.”

“........”

“성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여자의 성정이 어떠한지. 분명 성녀님에 대해 떠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녀님은 여기 계시고 그들은 쫓겨났어요, 왜 일까요.”

백작 부인의 말에 그녀는 정말 내리기 힘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후작은 그녀를 이미 믿고 있었다. 생각해 주고 있었다. 비올렛에게 그는 너무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저 그녀가 보기 싫은 줄 알았다. 후작님은 왜 바뀐 걸까. 왜 그녀에게 웃어주며 그녀를 맞이했을까.여동생을 망신 주었던 천민 소녀인데.

*

백작 부인은 오늘은 여독을 푸는게 먼저라며, 소소한 이야기를 위주로 했다. 비올렛은 앤이 차를 가져다 주자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여러 생각을 되풀이 했다. 사실 정말로 그녀는 책의 내용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상상속의 성녀가 그러했던 것 처럼 행동했고, 아나블라가 너무 미워서 그녀가 했던 것 처럼 그녀를 망신을 주었다. 성녀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워야 하고, 자애로워야 한다. 이런걸 보면 성녀의 자격이 없음이 틀림없다. 비올렛은 생각했다.

에셀먼드는 다시 자신의 직위로 복귀했고, 다니엘은 아마 다시 방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에이든은 검술 훈련이라도 하겠지? 검술을 훈련하러 하는것을 볼 까 했으나, 서늘하고 날카로운 그 금속을 보면 어쩐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검을 배워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신관에게서 신학과 성력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도 했고. 아직도 갈길은 멀었다. 어떻게 더 나아가 말룸을 없앨 수 있는 것인가. 비올렛은 자신이 모르는게 너무 많다고 느꼈다.

“아이고 성녀님!”

부엌쪽을 향하자 요리사 잭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비올렛에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거라 비올렛은 너무 반가워 웃었다.

“뭐 드시고 싶은건 없으십니까?”

“아까 디저트를 먹었잖아요”

그 말에 아맞다, 그랬었지 참. 그는 웃었다. 잭은 생각해 보면 아버지 같았다. 우락부락하게 이렇게 비올렛에게 다정한 걸 보면 그러했다. 사람들은 도축을 하는 아버지가 험상궂다고 무서워 했다. 아이들은 그를 놀리다가도 도망가기도 했다.

“잭은 꼭 우리 아빠같아요.”

잭은 그 말을 듣고 볼에 홍조가 서렸는데, 그것이 마치 잘 익은 빵처럼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황급히 말하는것이었다.

“아이고, 저 후작님께 죽습니다. 그런 소리 앞으로 하시면 안됩니다!”

“네?”

“왜 아버지인 후작님을 두시고 제게 아버지같다고 하십니까! 후작님이 서운해 하실겁니다.”

그 말에 비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과연 후작님이 서운해 하실까. 말은 그랬어도 그 말이 너무 기뻤는지 오늘은 뭘 먹고싶냐고 물어봤고 비올렛은 아무거나 다 맛있어요, 라고 말해서. 잭이 기쁨에 한번 더 쓰러질 뻔하게 만들었다. 부엌을 나온 비올렛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후작님은 그녀를 입양했다. 양아버지인 셈이다. 에셀먼드도, 다니엘도, 에이든도 모두 다 그녀에게는 오라버니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불러왔다. 물론 에셀먼드는 가장 그렇게 부르기 힘든 사람중에 하나였지만. 그렇다면 정말로 후작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비올렛은 방에서 구토하던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것 같은 시선을 기억했다. 그녀에게 후작이 무서운 귀족이었듯이 후작에게 그녀는 천민 여자아이가 틀림없었다. 비록 그녀를 대하는 데에는 깍듯했지만 말이다.

비올렛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핀의 일로 그녀는 후작을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 했다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삼개월이 지난 지금은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핀이 그녀에게 했던 짓을.

아니 어쩌면, 그저 보고싶었다는 마음에 마음이 풀려 좋은 쪽으로 생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정말로 후작은 그녀를 보고싶었던 걸까. 정말로? 그리고 비올렛은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을 거닐었다. 후작 가는 여전했다. 낯선 얼굴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비올렛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어머, 성녀님. 여긴 혼자 어쩐일이세요?”

“앤님은 어디가시고?”

친철한 미소에 비올렛은 그것을 경계했다. 사용인들의 태도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아, 앤은 두고 혼자 나왔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반말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하녀들은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하녀들은 그녀가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말을 걸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비올렛은 그 관심이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결국 그녀는 예배당으로 도망치듯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라이셀 백작 부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그녀의 장소라고 한다. 신을 모시는 곳,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곳. 그러나 이곳은 한산하며 어딘지 모르게 어둑했다. 비올렛은 신전은 한번도 간 적이 없지만 갔던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곳은 새하얗고 빛이나며 세상의 더러움이란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깨끗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은 깨끗하지만 동시에 어두웠다.

비올렛은 앞에 서 있는 신을 바라보았다. 사실, 신은 태양의 모양으로서 벽에 조각되어 있었고 초대 성녀 아그레시아의 동상이 사람의 형태만을 띄고 있었다. 고운 선을 가진 소녀는 긴 롯드(rod)와 오브(orb)를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비올렛은 언제나 생각했다. 저 사람 처럼 될 수 있을까. 백작 부인의 말로는 선선대왕 시절에는 성녀들의 동상이 궁에 나열되어 있었다고 했다. 물론, 선대왕의 광기가 도지기 전에는 말이다. 비올렛은 그녀가 누구와 닮았다고 느꼈는데, 꼭 꿈속에 있는 여자를 닮아있던것 가다고 생각했다. 사실 얼굴이 전혀 다른데 그저 눈을 감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손을 모으고 아그레시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 말에 뒤돌아보자 다니엘이 서 있었다. 다니엘은 애녹시 글로리 이후로 어딘지 모르게 서먹했는데, 오랜만에 만나자 퍽 반가웠다. 그래도 이맘때 쯤엔 항상은 아니더라도 친하게 붙어있었는데. 비올렛은 다니엘이 그녀를 부르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다니엘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수척해 보였는데, 비올렛은 그가 단지 몸이 좋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어디 아파?”

“아니.”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다가와 비올렛의 머리를 귀뒤로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손짓은 어딘지 모르게 느릿했다. 깊은 푸른 눈이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정말 너 많이 변했구나.”

“응?”

“정말 내가 모르는 아가씨 같아.”

“..........”

다니엘의 어조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비올렛은 왠지 모르게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야, 나는 여느때 처럼 똑같은걸.”

“그러니?”

그는 긴 비올렛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자 다니엘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비올렛, 너는 정말로  신을 믿니?”

다니엘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 작품 후기 ============================

아름다운 금요일입니다!! 불금 달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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