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움트는 새싹 =========================================================================
충격적인 비올렛의 말에 앤역시 깜짝 놀라 아가씨! 하고 속삭였다. ‘때린다’라는 의미에 모두들 입을 막고 저 작은 소녀의 얼굴을 주목했다. 소녀의 얼굴은 차분했으며 언제나 차분하고 유순해 보였던 하늘을 담은 눈동자는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니엘은 에셀먼드의 입에 스리슬쩍 미소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백작 영애가 제 하녀가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뺨을 내려칠 권한이 있으셨다면, 백작 영애 께서는 신분을 들먹여 저를 모욕하셨으니 백작 부인은 영애의 양육을 잘못한 죄로 똑같이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무슨 무례한!”
백작부인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달달 떨리는 손이 보이지 않길 빌며 비올렛은 차분하게 말했다.
“이 나라는 성녀에 의해 탄생한 나라이며 성녀에 의해 존속하는 나라이다. 성녀는 왕과 교황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지와 군사를 소유하지 않은 성녀의 의사는 그 무엇보다 존중되어 왕과 교황의 비호를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신성왕국은 이러한 법칙 아래 존재한다.”
그녀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 구절을 말했다. 의문이 가 읽고 읽고 또 읽었던 구절이었다.
“귀족이라면 필수적으로 읽고 공부해야 하는 도서입니다. <<아그레시아의 역사>>의 첫 구절로 이 나라가 어떠한 것을 기반으로 서 있는지 드러내는 구절이라고들 하죠.”
그녀는 백작 부인이 그 책을 보여주며 했던 말을 해 주었다. 실제로 성의 서고에서도 이 책은 개정판이 여러 권이 있는 것을 보아 그것이 얼마나 유서깊은 도서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아그레시아의 역사-스코필드 저>>는 귀족들의 필독서였고, 아그레시아의 전반적인 역사를 담은 유일무이한 도서였다. 모든 귀족은 이것을 교과서로 아그레시아의 역사를 습득했다. 어렸던 하드퍼드 백작 부인도, 현재의 아나블라도, 심지어 국왕도 교황도. 모두 다 이것으로 아그레시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그 첫 구절이 그것이라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덜덜 떨고 있는 비올렛에 반해 사람들은 그것을 술술 말하는 비올렛의 학식에 놀랐다. 무식하리라 생각했던 천민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으니 말이었다.
“.........”
“나는 아그레시아의 살아있는 상징이자 전설이며 심장입니다.”
그것은 제 2페이지에 나온 말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문득 아주 오래전 잊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 나라가 세워진 이유 태초의 신. 성스러운 힘. 신화.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 천민 출신이라고 무시해왔던, 오히려 천민주제에 귀족 대접을 받는다고 못마땅해했던 이들도, 그녀를 무시해왔던 귀족들도 업신여겼던 이들역시 그 옛날의 역사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주 어렸을 적,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보였던 절대적인 존경심, 공경, 사랑, 경외. 그리고 지금 이 눈 앞에 있는 자그마한 소녀는 그러한 사랑을 받아왔고, 받아야 마땅할 소녀였다. 마치 아그레시아 라는 것이 초대 성녀의 이름이자 이 나라의 이름이었듯 말이었다. 비올렛은 백작 부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제 의사가 존중되어야 함은 한낱 백작 영애의 의사보다 더 존중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제 의사를 관철하고자 합니다. 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왕과 교황밖에 없을겁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아나블라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자, 백작 영애, 앤을 때리세요. 저는 당신의 의지를 존중할 것이고, 당신 역시 제 의지를 존중해 줄 거라 믿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그런 말을 하자 아나블라가 분에 못이겨 몸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아나블라는 이 순간, 비올렛이 비록 천출이었지만 표면적으로 존중을 받든 아니든 그 어떤 이보다 고귀하며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 누구도 말릴 권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백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왕과 교황과도 같은 존재를 그 누가 막겠는가? 아니, 기본적으로 왕과 교황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 성녀를 그 누가 거스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나블라는 패배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은 앤을 때리는 대신, 자신의 앞에 도도하게 서 있는 그러나 괴롭히기 좋게 만만한, 그러나 실은 만만하지 않은 소녀에게 향했다.
“너, 너! 천민 주제에, 건방지게!”
비올렛은 그 손찌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였다. 부드러운 살을 내려치는 손바닥의 소리는 섬뜩하리만치 컸다. 그럼에도 넘어갔다면 어쩌면 비올렛의 허세는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일순 싸늘한 침묵이 그들을 지배했다. 앤 역시도 깜짝 놀라 차마 그녀를 보지도 못했다. 비올렛은 맞는 것을 두려워했다. 혹여나 누군가 손을 치켜들면 무서워 몸을 움츠리곤 했던 가여운 소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곳에는 그 가여운 소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겁이많고 혼자 숨죽여 흐느꼈던 울보 소녀는 방금 벌어진 일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숨소리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그녀는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나블라는 비올렛이 자신이 무서워 뒷걸음쳤다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곧장 몸을 틀어 옆에 있는 백작 부인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꼿꼿이 서 있는 백작부인을 차분하게 올려보며 말했다.
“허리를 숙이세요. 두 번 말해야 합니까?”
아나블라처럼 철없이 화가 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아마 태어나서 이런 모욕은 당해본 적이 없으리라. 백작 부인은 새빨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얗게 질려 이렇게 말하는는 것이었다.
“제, 여식의 잘못을 사죄드립니다. 성녀님. 허나 아랫것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 아랫것들에게 저에 대해 어떻게 말하셨나요? 그리고 아랫것들 앞에서 당신의 여식이 방금 무엇이라고 말했고 무슨 짓을 저지른거죠?”
비올렛이 고개를 들어 아나블라의 뒤에 있는 시녀 한명을 바라보았다. 꽃의 거리에서도 그렇게 배웠냐고 비아냥 거리던 시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비올렛은 눈 앞에 서 있는 백작 부인의 얼굴에 서린 비굴함을 보았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무시해왔던 하녀들의 얼굴에 서린 굴종역시 보았다. 그것을 보니 쾌감보다는 씁쓸함이 맴돌았다.
“에, 에드.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해 다오.”
백작 부인이 말했다. 이미 그녀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버렸고, 에셀먼드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조카가 자신을 도와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했다. 에셀먼드는 그러나 그저 무뚝뚝하게 말할 뿐이었다.
“성녀님 말대로 하십시오.”
“.........”
“저는 성녀님의 행동을 막을만한 어떠한 권한도, 자격도 없습니다.”
“........”
그렇게 까지 말하자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하얗게 질렸는데, 정말로 백작 부인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비올렛이 손을 치켜들었다. 소녀의 작은 손으로 때리는 것은 별로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오욕은 절대로 씻을 수 없으리.
“자, 잘못했어요!”
아나블라가 소리쳤다. 비올렛은 뒤를 돌아 아나블라를 보았다
“자, 잘못했어요, 성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나블라가 울음을 터트리며 눈물을 떨궜다. 그리고 비올렛은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 백작 부인 옆에 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제 허물입니다. 부디 어머니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비올렛은 그것을 싸늘한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나블라는 치욕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것은 연약한 소녀의 떨림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리고 저 멍청한 천민 소녀는 이대로 넘어가며 이번만이라며 봐주던지, 아니면 '이렇게나' 했는데도 자신의 어머니의 뺨을 내려쳐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릴 것이다. 어머니가 맞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나블라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었고, 저 미천한 계집애의 평판이 떨어진다면 이것도 감내할 수 있었다. 자신은 갑자기 드높아져 포악한 천민소녀의 우악스러움에 당한 피해자를 연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비올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소녀의 얼굴에 서린 섬뜩하리만치 싸늘한 표정에 겁을 덜컥 먹었지만 아나블라는 자신의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천사처럼 해맑아 사람들은 일순 그녀의 표정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비올렛은 아까까지의 얼굴과 서늘한 말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너무도 자애로운 얼굴로 아나블라에게 손을 뻗는 것이었다.
“일어나세요, 백작 영애.”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 성녀 아가씨가 그토록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말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환하게 미소짓는 모습역시 본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아나블라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지도 않았고 그 누구라도 그것이 가식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열 한살 소녀의 미소는 너무도 정순하고 깨끗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나블라 마저도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깜빡였다. 이게 아니었다.
“아이참, 그저 한 번 농을 친 거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비올렛은 꺄르르 웃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나블라는 사태를 파악하고 덜덜 떨었다. 진심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서지도, 이전처럼 덜떨어지게 당하지도, 경솔하게 폭력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는 웃으며 그것이 농이라고 말하며 무마했다.
그것은 아나블라가 비올렛에게 했던 짓이었다. 그리고 비올렛은 그것을 ‘학습’했다. 눈 앞에 있는 소녀가 악마처럼 보였다.
“이걸로 우리의 우정이 상하는건 원치 않아요, 그렇죠?”
“...........”
“앤은 정말 제 소중한 하녀랍니다. 제 하녀의 실수를 관대히 봐주실거죠?”
비올렛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음성은 아까까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너무도 나긋하며 평화로웠다. 새하얀 뺨에 새겨진 붉은 손자국 만이 아까의 불미스러운 일을 떠오르게 했을 뿐이었다. 아나블라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 깜빡 잊었네요. 허리를 드세요 백작 부인.”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명령'했는데, 그러자 백작 부인은 드디어 허리를 필 수 있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의 모욕감과 수치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듯 했다. 백작 부인은 허리를 피자 마자 아나블라를 불렀다. 그리고 여느때 처럼 그녀를 데리고 다시 성 안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사실 비올렛도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들이 사라지는데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허세가 들통 날까봐 겁에 질려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셀먼드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고모님, 아나블라.”
“.........”
“성녀님께 인사 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까?”
“.........”
“저는 고모님께 예의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겁니다.”
그 말에 서린 나직한 경고에 하드퍼드 가문의 모녀는 다시 성녀에게 무릎을 굽히며 들어가 보겠다고 인사해야 했다. 당연하겠지만 높은 이가 있는 곳에서 먼저 자리를 파한다면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는 것이 정상이었고,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예절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비올렛은 황당했지만 그것을 환한 미소로서 들어가 보라며 답했다.
“그리고 성녀님. 성녀님께서는 저의 혈족들의 무례함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에셀먼드까지 허리를 숙이자 비올렛은 내심 당황했다. 백작 부인과 아나블라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아나블라가 비록 무릎을 꿇고 비올렛이 농담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려 했을 지언정, 그들이 그동안 저질러왔던 잘못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 그것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숙였다. 아나블라가 반항했지만 백작부인은 철없는 그녀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제 여식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제 무례함 역시도요.”
비올렛은 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마치 해맑은 아이처럼.
“물론입니다. 백작부인도 영애께서도 제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
그렇게 말하며 비올렛은 에셀먼드를 보았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중에 혼이라도 날까 두려웠지만, 이제 에셀먼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비올렛은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시원한 것만큼 추천 부탁드립니다 쿡..
아 ㅠㅠ 코멘 모르고 삭제했어.. 여기 이편 코멘 모르고 삭제한거에여 ㅠㅠ 일부러 삭제한거아님.. 하필이면 내용에 대해 지적한 코멘이라 오해받을까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