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원에 핀 제비꽃-34화 (34/208)

00034  움트는 새싹  =========================================================================

다니엘은 표면적으로는 그녀에게 화가 난 듯 그녀를 외면했다. 더군다나 에이든 역시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천민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 꽃의 거리 출신이라는 것은 몰랐던 듯 했다. 상관없다. 그녀는 다니엘을 믿었다. 하녀들을 많이 배치 시켜준 것도 다니엘의 친절이었다. 물론 그녀의 식단은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 위주로 바뀌었다. 말로는 하지 않아도 다니엘이 그녀를 상당히 신경쓰고 있으리라는 사실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저 모녀가 나간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 가지 않아 앤을 못보는 것은 아쉬웠으나, 그녀는 혹여나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었는데  외로운 방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겨울의 찬 바람은 가시고 이제 봄이 다 와가는데도 말이었다.

그리고 애녹시 글로리가 다가왔다. 애녹시 글로리는 아그레시아에 있는 고유 축제로서 봄이 오는것을 환영하는 의미의 축제로 각 영지마다 열리는 시기가 달랐다. 이들은 한 해의 시작인 봄을 기념하며, 등에 자신의 소원을 써서 띄워보냈다. 비올렛은 꽃의 거리에서도 몇번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 도시로 나간 적이 있었다. 마을에서도 그것은 연례 행사였다.

왕도, 평민도, 귀족도, 천민도 날리는 풍등이 하늘에 어우러지면 아름다운 빛깔을 내며 까만 밤 하늘을 환한 황금빛으로 하늘을 물들었다. 아름다운 등불을 보노라면 그때는 사람들 모두가 등불에 집중하느라 그 누구도 핍박받지 않았다. 한 해가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았다. 그래서 그 축제때는 아주 잠시동안 그들은 신분이라는것을 망각했고 일체감을 느꼈다.

아나블라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아, 다니엘 오빠! 우리 어떤 등을 날릴까? 여기서 제일 큰걸 날리자! 내가 가장 먼저 띄울거야, 그러니까 다니엘이 같이 해 줘야해?”

등을 만들까 말까 고민하다 다니엘이 있는곳으로 가자 아나블라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올렛은 갈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녀가 날려보낼 등은 만들어 주리라 믿었다.

“어머, 성녀님 오랜만이에요.”

아나블라가 말하며 다니엘의 옆에 붙었다. 그녀는 그의 방 가에 서 있는 앤과 얼굴을 마주했다. 앤은 그녀를 보자 고개를 숙였다.

“무슨일이십니까, 성녀님?”

거리를 두는 듯 존대를 말한다. 비올렛은 서운한 티를 애써 숨기며 망설이다 말했다.

“풍등을 가지러 왔어요.”

그녀의 말에 옆에 아나블라가 코웃음을 쳤다

“어머, 성녀님. 성녀님도 나가시게요?”

“........”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나가는게 아니었어? 이것은 아주 당연한 행사였다. 다니엘을 바라보니 다니엘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녀님, 성녀님은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에드 형이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갔거든요. 형이 돌아올때 까지는 풀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녀는 토미의 전적이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는데, 에셀먼드가 그녀에게 금족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곳은 탑이 없었고 그것을 날려보낼 적당한 장소도 없었다. 그렇다면 등은 날려보낼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일년에 딱 한번 있는 행사인데. 그녀는 간절함을 담아 다니엘을 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포기했다. 사람을 죽이는데 거침이 없는 에셀먼드였다. 또 다니엘을 혼낼지도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나가는 길에 차를 내오던 앤과 마주쳤다 앤은 슬픈 표정으로 비올렛을 보았다 이미 어떤 상황인지 눈치 챈 듯 했다. 뭐라 이야기라도 하려던 찰나 아나블라가 말했다.

“아 맞다, 앤은 나랑 같이 나가자. 앤도 이런건 즐겨야지.”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비올렛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나블라가 그녀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그녀는 외성 성벽 꼭대기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등을 날릴 거라고 꺄르르 웃었다.

복도에 들어오니, 등을 들고 신이나 하는 에이든의 모습이 보였다. 에이든이 그녀를 발견했다.

“야, 오랜만이야!”

그는 밝게 웃었다. 꽃의 거리 출신이라고 분명 멀리하는 것일텐데, 마치 그런건 들은적이 없다는 태도였다. 별로 찾아오지 않은 것 치고는 거리감 없는 태도에, 아니, 오히려 반가워하는 태도에 오히려 비올렛이 당황했다.

“형에게 풍등은 받았어?”

“아니, 나는 못나간대.”

그녀가 우울하게 말했다. 에이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그런건 데리고 나갈 수도 있잖아. 그런건 에드형도 봐줄 거라고.”

“아니. 아니야.”

행여나 에이든이 다니엘에게 가서 데려가라고 소리칠까 저어되었다. 만약 그런일이 일어나면 비올렛은 그를 부추겼다는 오명을 쓰게 될 것임이 뻔했다.

“야 나도 안갈래.”

“아니야. 가야지.”

“야, 너만 빼고 가라고? 너혼자 따돌리는거잖아.”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비올렛이 말했다.

“오빠가 안가면 나는 또 오빠를 부추겼다고 욕먹을걸.”

“........”

그녀의 말에 에이든의 눈이 커졌다. 비올렛의 말은 맞았다. 그러자 그가 아주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씩씩거렸다.

“야, 너 먹고싶은거 있어?”

“아니.”

“가지고 싶은거는? 바깥에 나갈때 다 사올게.”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간다고 말해준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정말로 그럴 작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에이든이 고마웠다. 기분이 한결 나아 살짝 미소를 짓자 에이든은 정말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냥 아프다고 할까?”

“다니엘은 분명히 의사를 불러올걸.”

“쳇.”

그는 혀를 찼다.

“내가 네 등을 대신 날려주면....... 아, 안되겠지.”

등을 기본적으로 대신 날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자(死者)’의 등불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사람의 기원을 담은 등불을 누군가가 대신 날려보내주는 것은 무척이나 불길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저 비올렛은 지어지지 않은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한 지역을 지배하는 영주 일가가 등을 먼저 날리는 것은 당연했으므로, 사실 에이든이 이렇게 빠지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기도 했다.

“다니엘에게 잘 다녀오라고 전해줘.”

사실 배웅이라도 나가면 울 것 같았다. 에이든은 그녀의 감정을 대충 짐작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못마땅한듯 투덜거렸다.

*

점심을 먹고 얼마 안 있자 해가 보이지 않아 방이 어두웠다. 이곳은 방어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창이 작은 편이었고, 따라서 비올렛은  탑 꼭대기에서라도 풍등을 날릴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어차피 등을 같이 날릴 사람도 없다. 외롭게 날아가는 등불을 보는 것은 아무래도 비참했다.

한 해의 무사와 평안 따윈 빌어도 소용 없을 것이다. 근심은 언제나 비올렛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아마 영원히 그러겠지. 책을 읽을까. 아니면 무엇을 할까. 다니엘은 떠났겠지. 하녀들 조차도 보이지 않는 성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비올렛은 자신을 따라오는 하녀들에게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하며 그저 걸었다. 그러다가 직접 서재에 도착했다.

앤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적정 수준의 책을 직접 선별해서 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서재에 가는 일은 없었다. 후작의 서재는 아주 넓었고, 계단을 가면 2층까지 이어져 있을 정도로 방대한 책들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서재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필이면 서재의 창문은 커튼이 쳐져 있었으나, 이 창문의 길이는 비올렛의 키 처럼 거대했다. 열려진 틈으로 바깥이 보였다. 아마 아래 사람들은 재미있는 축제를 즐기고 있겠지. 분명 저 아래에는 푸른 빛깔의 예쁜 목걸이를 파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신기한 동물을 파는 동물 장수도 있을 것이며, 온갖 이상하고 진귀한 것을 가져다가 파는 떠돌이 보부상도 있을 것이다. 분명 거기서도 아나블라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귀여움 받고 있겠지. 자신의 어머니인 백작 부인과 함께, 다니엘과 함께, 그리고 에이든과 앤과 함께, 모두에게 주목받으며 사랑받은 이 특유의 아름다운 자신만만한 미소를 흩뿌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비올렛과 같은 천민 여자들은 그녀의 예쁜 모습을 보고 아나블라의 모습을 동경할지도 몰랐다. 귀족스러운 깨끗한 금발에 인형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라니. 분명 그녀는 소녀들의 우상이 되리라.

그러자 비올렛은 자신이 있는 곳이,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조용하고 어두운 서고이며,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곳이 아나블라가 있어야 할 장소라면, 이렇게 어두운 곳이 비올렛이 있어야 할 마땅한 장소인지도 몰랐다.

아나블라는 그녀에게 이런 현실을 직시시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는 서재 깊숙히 들어갔다.  아랫 단을 자세히 보자 아주 낡은 동화책이 보였다. 어머니가 자기 전 그녀에게 조근조근 이야기하던 알록달록한 느낌의 동화, 책을 읽지 못하는 그들이기에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던 동화들이 여기 이렇게 글로 적혀있었다.

비올렛은 그것을 펼쳐보았다. 새어머니에게 괴롭힘 당한 외로운 귀족 여자아이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던 이야기를 읽어내렸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 비올렛은 낡은 동화책을 보며 그런것을 기대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니,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비참함이었다. 비올렛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명조차 켜지지 않는 그곳에서 그녀는 훌쩍였다. 사실 책을 읽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울 장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외진 곳은 너무도 외로웠고, 비참했다. 차라리 작년으로 돌아가는게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릎을 껴안고 흐느꼈다. 눈물이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풀잎씨 같은 생명조차 품지 않은 이 삭막한 성벽 바닥은 그녀의 떨어지는 눈물을 뚝 뚝 흡수하기만 했다.

그 옛날의 동화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실은 더욱더 가혹하고 잔혹한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반짝거리는 찬란한 삶이 있는가 하면, 그녀처럼 이렇게 태생부터 암울한 삶이 있기 마련이었다. 참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것을 원망할수조차 없다. 그것은 태어나서부터 언제나 겪어왔던 일이므로 원망하는 법도 모르는 것이다. 참으려 했지만 자꾸 서러운 을음이 터졌다. 흐느끼지 않으려 자꾸 자신을 억눌렀지만 숨을 참기가 힘들었다. 여린 몸이 파르르 떨렸다. 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겠지. 끅끅 거리며 울음을 참으려다 그녀는 결국 모든것을 포기하고 서럽게 흐느꼈다.

“여기서 뭐하는거지?”

익숙한 고개를 들었다. 에셀먼드가 서 있었다. 이번에는 왕자님이 아닌 마법사처럼, 그렇게.

돌아온지 얼마 안된 듯 아직 그는 외투 조차 벗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영지 주변까지 세세하게 돌다 온 듯, 코트에는 먼지가 묻어 있어 꼭 평민처럼 보였다 비올렛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앤은 어디있지?”

그 말에 그녀가 어물어물 거리다가 대답했다.

“백작 영애와 나갔어요.”

“다른 이들은?”

“다 같이 나갔어요.”

그 말에 에셀먼드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비올렛의 설움을 폭발시켰다.

“그러는 너는 왜 안나갔지?”

“그거야, 당신이 절 못나가게 했으니까요!”

그녀는 아나블라처럼 울고 싶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당황한 것으로 보이는 에셀먼드를 보자 우는것이 갑자기 자존심 상했다. 참 나쁜 사람이다. 왜 못나가는지 모르니 더욱 나쁜 사람이다.

“어차피 나가도 만날 사람도 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직접 보여줬잖아요. 나는 흑,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어요. 이제 어떻게 될지 너무 잘 알고 있단 말이에요…….”

끅, 끅 거리며 울음을 참느라 눈을 질끈 감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고를 나갔거니 했지만, 에셀먼드의 흙묻은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오자 마자, 정말 이곳으로 바로 온 건가. 급하게 읽을 책이라도 있었나, 생각했지만 그러한 생각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던 것이다.

“이리와.”

그가 말했다. 그 어조는 언제나처럼 고저가 없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다정함을 가장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들리는 그대로 다정한 어조인지는 모른다. 사실 몇 년이 지나도 비올렛은, 그가 왜 손을 내밀었는지 몰랐다. 비올렛은 산처럼 거대해 보이는 에셀먼드를 보았다. 그녀를 내려다 보는 그는 다 큰 어른처럼 보였지만, 소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손을 내민 그는 마치 동화속 마법사가 마법을 부려주겠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망설였다. 에셀먼드가 정말 너무 싫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혼자서 훌쩍였을 때는 그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마법사를 간절히바란 동화속 여자 아이의 순진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저렇게 잔인하고 미운 사람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외롭게 만들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절박했다. 망설이며 그의 손을 잡아 쥐자 생각보다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작은 손을 감쌌다. 그의 손은 마치 아버지의 손 처럼 거친 느낌이 났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서고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어둑한 서고를, 혼자 외로이 울고있던 서고를 탈출하는 홀가분한 느낌이 났다. 나가자마자 앞에 서있는 시종에게 뭐라고 말하던 에셀먼드는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헐레벌떡 짐꾸러미를 받았다. 무슨 말을 하는걸까. 또 무엇을 받았지? 그리고 이 사람은 무엇을 하려는 걸까. 혹여 다른 사람들을 또 벌주려는 것은 아닐까. 왼쪽에 그가 찬 검 쪽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것을 뽑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코멘 대박....다들 발암..(쿠크박살..ㅠㅠ)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부탁드려여...(어서 사이다 편을 올리러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