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움트는 새싹 =========================================================================
에셀먼드는 영지 시찰을 나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계획이었고, 그에 둘째인 다니엘이 손님을 맞아들여야 했다. 에이든은 아침부터 짜증을 내었는데, 비올렛은 그 짜증의 이유를 도착한 손님들을 보며 깨달았다.
“아, 언제봐도 이 성은 너무 칙칙하다니까. 오라버니는 왜 이렇게 센스가 없는건지 원.”
후작을 닮은 중년 여성은 화려한 모피를 두르고 있었는데, 하아, 하고 하품하자 그녀의 빨간 루즈가 발린 입술이 기름을 먹은 듯 번들거렸다. 그 여자 옆에는 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서 있었는데, 비올렛의 또래인 것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다니엘.”
“오랜만이에요, 고모님.”
그들은 비올렛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가 다니엘과 에이든을 안았다. 비올렛은 자신의 또래의 여자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다니엘이 말한 아나블라라는 소녀라는 것을 알았다. 아나블라는 다니엘과 비슷한 금발을 가진 소녀였는데, 에르멘가르트 후작가의 벽안을 그대로 물려 받아 그녀의 엷은 색의 눈과는 달리 깊은 푸른눈을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 오빠, 보고싶었어!”
그녀가 꺄르르 웃으며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다니엘은 다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비올렛을 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실례잖아, 성녀님이 계시는데, 인사 먼저 올려야지. 고모님도요.”
그러자 그제야 모녀는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묘하게 탐색하는 시선으로 비올렛을 보고 있었는데 비올렛은 그 시선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 성녀님. 제가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아닙니다.”
하드퍼드 백작 부인은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옛날의 그녀였다면 백작 부인을 보고도 겁에 질려 그런 표정을 드러냈을지도 몰랐으나 지금은 어쩐지 '백작'이라는 칭호가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우리 사이에 인사를 할 필요는 없어요.”
비올렛이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백작 부인은 등을 돌렸다. 아나블라는 계속해서 그녀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았다. 비올렛은 그녀에게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것에 별로 좋은 호기심은 아니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드는 아직이니?”
“네, 오랜만에 아버님을 대신해서 세세하게 볼 생각인가봐요. 형 성격은 아시잖아요.”
“그래, 네 아버지를 꼭 닮았지.”
그녀가 투덜거렸다. 아나블라가 말했다.
“엥, 에드 오빠는 안오는 거야? 에드 오빠 보고싶은데.”
“걱정 마렴, 아마 애녹시 글로리(Anoxi glory-봄의 축제 각각 영지들 마다 다르다. 공통점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 것을 환영하며, 영지마다 소원을 비는 풍등을 날려보내, 한 해의 무사를 기원하는 축제) 까지는 돌아오겠지.”
애녹시 글로리까지는 이제 열흘정도 남았다. 에셀먼드를 다시 볼 생각을 하니 비올렛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이든 오빠, 애나가 왔는데 별로 기쁘지 않아?”
“아니, 전혀.”
에이든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며 방으로 쏙 도망쳐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의 옷깃은 아나블라에게 붙잡혔다. 에이든이 히엑, 하고 비명아닌 비명을 지르자 백작부인이 말했다.
“어머, 에이든, 오빠가 여동생에게 친하게 지내야지.”
“내 여동생은 얘가 아니라, 바로 쟤인걸요?”
에이든이 손가락으로 비올렛을 가리켰다. 그러자 백작 부인의 얼굴과 아나블라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갑자기 향한 시선에 비올렛은 깜작 놀랐다. 정작 그런 말을 한 에이든은 말없이 비올렛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야, 가자.”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천민이라고 그녀를 하대하는 듯 하던 에이든이 정말로 그녀를 여동생이라고 다른 사람 앞에서 이야기 한다. 심지어 다니엘 역시 그녀를 다른 이 앞에서 여동생이라 직접적으로 지칭한 적은 없는데 말이었다. 에이든에게 거의 끌려가던 비올렛은 뒤를 보았다. 아나블라가 생긋 웃고 있었다.
*
“왜 내 방에 들어오는데?”
“그거야 내 방에 들어오면 아나블라가 마음껏 들어올 테니까. 아, 한번씩 만나는데 짜증이 난다니까. 형들은 어떻게 쟤를 그냥 보지?”
그가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계속해서 으으으, 소리를 내며 짜증을 냈다.
“아으, 정말 싫어!”
“그렇게 싫어?”
“진짜, 완전, 너무, 격렬하게!”
“..........”
정말 싫은가보다. 비올렛은 생각했다.
“아, 그 계집애는 왜 너보다 못한 거야! 천민 출신인데도 네가 훨씬 나!”
“.........”
이 이야기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었지만, 그녀는 에이든이 악의가 없이 하는 이야기라는걸 알아서 그녀는 그닥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자기 또래의 여자 아이가 있는건 처음이라 비올렛으로서는 그 여자아이의 존재가 그렇게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아나블라가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라고 했다. 확실히 그 여자아이는 사랑스러웠다. 다니엘과 비슷한 황금빛 머리카락에 늘어트려진 고수머리, 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비올렛의 환상속 공주님처럼 어여뻤다. 에이든은 뻔뻔하게 그녀의 침대에 누워 데굴거렸다. 그것을 보던 그녀는 정말로 오빠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귀족적이고 우아한 오라버니인 다니엘과는 다르게, 에이든은 몇번이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 그는 들어온 앤에게 쫓겨났다.
*
“안녕하세요 성녀님?”
성의 회랑을 걷고 있는 비올렛에게 그녀가 말을 건넸다. 그녀의 뒤에는 성 안의 하녀들과 아나블라의 하녀로 보이는 낯선 얼굴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성에 찾아 온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이미 다시 매료된 듯 했다. 그에 반해 비올렛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앤이 있었지만, 앤은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다른 하녀들이 따를 법도 했지만 그때 비올렛이 성 밖을 나서서 하인들이 문책을 당한 이유로 비올렛을 따르고 싶어하는 하녀는 없었다.
밝은 주황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품에는 어여쁜 인형이 들려 있었다. 후작이 준 것과 비슷해서 그녀는 무심결에 그 인형을 보았으나, 아나블라는 비올렛의 시선에서 그 인형을 거뒀다. 마치 빼앗기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백작 영애.”
비올렛의 말에 아나블라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는데. 비올렛은 마치 정말 귀족 영애처럼 인사했다. 듣던대로 천민이라고 업신여겨질 어떠한 흠도 없었으며, 소녀의 얼굴에서는 아랫것 특유의 비굴한 눈빛도 없었다. 비올렛의 교양은 여느 아가씨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오히려 수도에서 예법을 배운 그녀가 훨씬 더 세련된 동작을 보였다. 아나블라는 그 얼굴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처음 성녀님을 뵙고, 제 나이또래라는 것을 알고 항상 친해지고 싶었답니다.”
“........”
비올렛이 할말을 고르자 그녀의 뒤에있던 하녀가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우리 아가씨는 너무 친절하시네요.”
그 하녀의 말이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비올렛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나블라는 비올렛의 팔을 잡았다.
“전부터 저는 제 친구가 꼭 가지고 싶었어요!”
그녀가 밝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아나블라가 생각했던 것 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웃으며 다가오니 그녀의 얼굴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비올렛은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영애.”
*
마침 날씨가 좋아 하녀들은 테라스에서 차를 내왔다. 또래 여자아이와 이렇게 말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라 그녀는 긴장했다. 하지만 아나블라는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주어 그녀는 안심했다. 아나블라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로 우리끼리 이야기 할거야, 오지마. 라고 말했는데 하녀들은 그녀의 미소에 대답하며 필요할때 부르라는 작은 금빛 종을 주었다.
“다니엘 오빠가 성녀님은 참 좋은 분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영애께서 사랑스럽다는 소리를 다니엘에게 들었어요.”
비올렛의 말에 아나블라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사실 비올렛은 자신이 그녀의 앞에 설 자격이 있는지 어쩐지도 몰랐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예법에 맞은 행동인지 틀리는지도 몰랐다. 앞에 있는 백작 영애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딘지 우아함이 과장되어 보였고 그것이 라이셀 백작 부인이 알려주었던 것과는 다른 것 같아 조금 혼란스러웠다.
“빨리 에드 오라버니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에드 오라버니는 참 친절하시거든요. 언제나 제가 오면 영지를 구경시켜줘요, 이번 애녹시 글로리때도 그랬으면 좋을텐데요.”
에셀먼드에 대한 화제는 그렇게 달가운 화제는 아니었다. 에셀먼드는 저 사랑스러운 사촌동생에게는 친절한 모양이었다. 아나블라는 목이 잘린 시신을 눈앞에 보여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평소보다 더 말이 없어진 비올렛을 바라보던 아나블라는 인형을 내밀었다.
“아, 이 인형. 가지세요.”
“네?”
“가지고 싶어하셨죠?”
“아니, 저…….”
“아까 다 봤어요.”
그건 후작님이 준 인형이랑 비슷해서 그런건데 그녀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 인형을 받았다.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인형을 받아들자 그녀가 웃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이상했다. 비올렛은 감사의 인사를 하며 그 인형을 찬찬히 보았다. 그러나 사실, 후작이 준 인형보다는 예쁘지는 않은 인형이었다. 무엇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던 것은 다니엘이 올 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사용인들에게서 너희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을 들었어.”
다니엘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마침 시녀들 몇몇이 다과를 더 가져다 주려고 했는지 다니엘의 뒤에 서 있었다. 그때 아나블라가 눈물을 흘리며 다니엘에게 안겨들었다. 다니엘은 다짜고짜 안겨든 자신의 외사촌동생을 안으며 비올렛을 보았다. 비올렛은 갑자기 흐느끼는 아나블라가 이상했다. 어디 아픈걸까?
“다니엘 오라버니!”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그녀도 다니엘도 당황해서 그녀만을 보고 있었다.
“나 인형 하나만 더 사주면 안돼?”
“그게 무슨 말이니, 애나?”
“아니, 그건 그냥 그게 아니고.”
“네 인형은 저기 있지 않니?”
다니엘이 비올렛의 손에 들려있는 인형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아나블라가 말하는 것이었다.
“으응, 저건 이미 성녀님의 것인걸.”
비올렛이 말했다.
“영애가 나한테 줬어.”
어쩐지 자신에게서 쏟아지는 시선이 곱지 않다고 느끼며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그때 하드퍼드 백작 부인이 테라스로 나왔다. 그러자 아나블라는 더욱 더 목높여서 울었다. 소곤소곤 거리는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일이니! 애나는 왜이렇게 울고!”
아나블라가 다니엘의 허리를 꼭 껴안자, 백작 부인의 시선이 그녀가 가진 인형에 향했다.
“아니, 저건 네 아버지가 선물해 준 인형이 아니니? 그런데 왜 성녀님께서 그걸 가지고있는거니? 아니, 말씀해보세요, 왜 아나블라 인형을 성녀님께서 가지고 있는거죠?”
그녀의 말이 날이섰다. 비올렛은 당황했다. 그리고 정말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영에께서 제게 주신 거에요.”
“말도 안돼, 저건 애나의 이번 열 두번째 생일때 선물로 이 애 아버지가 선물로 준거란 말이에요. 이 애가 가장 아끼는 인형을 성녀님께 드렸다고요?”
그러자 아나블라의 울음소리가 더욱 더 높아졌다. 다니엘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성녀님, 아나블라에게 인형을 돌려 주시는게 어떠신지요.”
“아니, 됐어요 제가 성녀님께 드린게 맞아요. 성녀님이 정말 가지고 싶어하는걸로 보였어요.”
“얘가, 저게 보통 인형이 아니란 말이야. 저건 아무나 만질 수 없는 인형인데 누구한테 그냥 줘?”
백작 부인이 그녀를 다그쳤다. 다니엘의 푸른 눈이 그녀를 향했다. 아까는 준다고 했는데, 이건 무슨 상황일까. 아직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혹여 변덕이라도 부리는가 해서 그녀는 인형을 내밀었다.
“아니에요, 됐습니다!”
백작 부인이 말했다.
“수도로 가서 더 좋은 인형을 사줄테니 울지 말아라 애나. 나 원참 기가 막혀서, 아무리 출신이 천하다고는 하나.......”
대놓고 거리는 비아냥 거림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는 나쁜 사람이 될게 뻔했다. 그녀는 다니엘을 보았으나 다니엘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품에 안긴 아나블라만을 보고 있었다.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비올렛은 자신이 이 곳에서 혼자 동떨어졌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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