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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31화 (31/208)

00031  움트는 새싹  =========================================================================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목이 아팠다. 비올렛은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바닥의 고통에 다시 고꾸라졌다. 그녀는 일어나는 것도 포기한채 누워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누군가를 불러야 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누굴 불러야 할까. 그러나 누굴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어째서인지 두 눈에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셨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의아했다. 그러다 그녀는 머릿속에 굴러다니던 여자의 머리가 떠올랐다. 욱, 하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구토감을 참으려 숨을 내쉬었다. 그때 급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앤이 들어왔다. 물을 뜨려고 했는지 그녀의 손에는 대야가 들려 있었다. 아, 앤이다. 오랜만에 보는 앤이다. 그 멍한 시선에 앤은 울컥 해서 그녀를 껴안았다.

“괜찮아요, 아가씨?”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말을 하는 행위 자체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결과가 되었는지 깨달았다. 누구 하나의 목숨을 잃을수도 있었고, 타국에 팔아 넘겨지면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행동 하나, 선택 하나를 조심해야 했다. 에셀먼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건가, 아닌건가.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가도 얼마 안 있다간 숨을 멈추고 죽을 것 같기도 했다. 리나와 로즈가 죽은 것은 천재지변 같은 일이었지만 그들이 죽은 것은 그녀가 했던 선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죽음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놀랍도록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생각보다 그들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토미라는 소년과 그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그녀는 죽임을 당하는 위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죽음을 내릴 수도 있는 위치였다. 비올렛은 그런 자신이 낯설었지만 그녀 자신이 토미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젠 영원히 그들처럼 될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 역시도. 평민이었던 토미와 달리  이 나라 유일무이한 성녀인 그녀가 하는 선택은 무거웠다. 그녀는 심지어 토미의 생사를 묻지도 않았다. 죽는다면 죽는대로 비참할 것같았고, 살아 있다면 살아있는대로 책임감을 느낄 것 같았다. 앤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그녀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살기 싫어.”

“........”

“죽고 싶어.”

“........”

“죽고 싶어, 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열한 살의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흐려지는 푸른 눈에, 서린 것은 그저 치기어린 감정이 아닌 진심이었다. 천민이었던 비올렛은 사라져간다. 이렇게 점점 익숙해 가는 것이다. 점점 잃어만 갈 것들이 눈에 보였다. 이제 어쩌면 그녀는 그녀 나름의 소중한 기억들을 잊어버릴지도 몰랐다. 누구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길은 얼마나 멀고 험할까.

벌써 세상의 끝을 봐버린 소녀의 창백한 얼굴은 빛을 잃었다. 열려져 있던 문으로 누군가가 서 있는 기척이 났다 사라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비올렛은 조용히 울음을 터트렸다.

*

아가씨가 부쩍 외로워 하는 것 같다는 앤의 말에 후작은 다니엘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물론 후작이 비올렛의 편지를 받고 바로 열고싶은 마음을 숨기고 주머니에 넣는 것을 앤은 여과없이 지켜보았다.) 에이든이 따라가겠노라고 노래를 부르자 그는 이 골칫덩이 아들도 잠시동안 보내려고 했으나 그들을 통솔할 이들이 필요했다. 마침 영지에서도 밀린 업무가 있었기 때문에 후작은 기사단의 업무를 정지시키고 에셀먼드를 고향으로 올려 보냈다.

당연하겠지만 영지를 소유한 영주인 그는 한번씩 영지에 내려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가진 지배권은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혹여나 또 하녀와 이스킨데르 자작부인과 같은 사건이 남몰래 일어나 성녀가 괴로운 것은 곤란하니 말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봄이 다가와 에멘가르트 후작 령의 애녹시 글로리(Anoxi glory-봄의 영광이라는 뜻으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이며 개최기간은 각 영지들 마다 다르다. 공통점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 것을 환영하며, 영지마다 풍등을 날려보내, 한 해의 무사를 기원한다.)도 얼마남지 않아 영주 일가중의 한명이 첫 풍등을 날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후작은 (정말로 자신이 가고싶었지만)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에르멘가르트 후작령에는 오랜만에 삼형제가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성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어, 영지의 주둔병력을 모두 풀어 그녀를 찾게 하는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 내는 발칵 뒤집혔으며 군나르 족에게 팔려갈 뻔한 구출된 성녀는 모종의 일로 삼일 째 정신을 잃고 앓았다. 성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문책을 당했으며, 몇몇은 해임되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그 일에 충격을 받은 성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죄인들에 대한 처분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을 교황측에서 알았다가는 그것을 빌미로 성녀에 대한 양육권을 주장할 수가 있는 연유로 처분은 모두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비올렛.”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비올렛은 그 이후로 부쩍 말수가 줄었다. 다니엘이 그 흘러내린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심심하니?”

고개를 저은 그녀는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올 것이다. 또 봄이 다가오면 후작 령에서는 봄이 왔다며 기뻐하며 축제, 애녹시 글로리를 열겠지, 그리고 진짜로 이곳의 봄은 시작이 되는 것이다.

“뭘 했어?”

“그냥 책을 읽고 있었어.”

절대 책잡히지 않을 대화만 한다. 심지어는 다니엘에게도 그러했다. 심지어 그녀는 그 고향 친구였다던 토미의 생사여부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혹여라도 그것이 문제가 될까봐. 앤의 말에도 그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만 잘 해줄 뿐, 그녀의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비올렛.”

이름을 부르니 돌아보는 시선이다. 투명한 하늘색 눈이다. 보석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색의 그것은 다니엘의 얼굴을 비추었다. 맑은 가을 하늘의 눈동자에는 구름이 낀듯 보라색이 약간 섞여 있었다.

“많이 충격을 받았구나.”

“..........”

그 말에도 그녀는 깜빡하지 않았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말이라도 하면 곧장 울음을 터트리며 안겨오던 소녀는 그저 살풋 눈을 내리 깔았다. 그것은 천한 천민 소녀에게서 결코 볼 수 없는 제법 기품있는 모양새였다. 교양없고 천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녀도 약 일년동안 백작 부인의 교육을 받자 제법 고운 태가 났다. 태생적으로 비록 고귀하지는 않았더라도. 역시나 성녀는 성녀로구나. 라고 사람들이 떠들었지만 다니엘은 그녀가 겁에 질려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은 언제나 그래. 그렇게 무뚝뚝하지만 손속에는 잔인하지.”

“잘 알고 있어.”

그것은 경험한 그녀가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부분이었다.

“참, 고모님이 온다고 해.”

그녀의 말에 다니엘이 대답했다.

“고모님?”

“응, 그러니까. 아버지의 여동생 말이야. 여기서 더 북쪽의 하드퍼드 백작과 혼인하셨거든. 이번에 여기서 잠시 묵고 수도로 가실 요량이신가봐.”

“그렇구나.”

비올렛이 대답하자. 다니엘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고모부에겐 딸이 있어, 아나블라라는 네 또래의 여자애야. 그 아이는 참 사랑스럽지.”

“........”

“그 애가 네 친구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드 형은 영지 시찰을 나갔어. 가신들의 성에 묵을 건가봐. 아마 당분간 돌아오지는 않을 거야.”

다니엘이 일어났다. 에드, 라는 말에 그녀가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다니엘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제건 이 까다로운 아가씨가 다시 제대로 반응할까, 생각했지만 사실 의외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

“야. 천민.”

다니엘과는 다른 꾸준함으로 에이든은 비올렛을 방문했다. 그는 비올렛을 대놓고 빤히 관찰했는데 비올렛으로서는 그런 그를 무시했다.

“야, 야!”

“........”

한번은 에이든이 억지로 그녀의 손목을 잡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깜짝 놀라 테이블을 쓰러트리고 그 바람에 테이블 위에 있던, 앤이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피워놓았던 향초가 엎질러져 불길이 일어나자, 그는 그짓을 그만두었다.

“심심해.”

다니엘은 심심하냐고 묻고, 에이든은 심심하다고 한다. 도대체 왜 그런걸 묻고 말하는걸까. 그녀는 조용하게 생각했다.

“연병장에서 칼츠님의 교습을 받는데도 심심해.”

“........”

“야, 내말 듣고 있어?!”

그가 쩌렁 쩌렁 소리지르자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정중함보다는 무례함으로 무장한 에이든은 지금의 비올렛에게 아주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본인도 상대방도 그것을 모른다는게 흠이었지만.

“심심하면 나가서 놀아요 오라버니.”

“우엑, 그 호칭 징그러!”

그 말에 에이든이 소리쳤다.

“야, 그냥 오빠라고 불러! 아니면 이름을 부르던지! 둘째 형한테는 다니엘이라고 부르더니!”

펄쩍 펄쩍 뛰자, 그녀는 영혼없이 말했다.

“알았어 오빠.”

차라리 부끄러워 하기를 해라. 에이든이 뜻밖의 호칭에 눈을 껌뻑거렸다. 비올렛에게 무엇인가로 불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조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도 같았다. 사실 비올렛으로서는 귀찮은 것을 떼어내기 위해 쉽게 말했으나. 오빠, 오빠라는 호칭을 정말로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그래, 동생.”

그쪽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었다. 그러다 에이든이 단단히 결심한 듯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에 마주보았다. 검청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영락없이 후작과 에셀먼드를 빼박았다. 그것에 거부감을 느낄 찰나 에이든이 말했다.

“나, 나도 충격받았어.”

“.........”

“나도 무서웠단 말이야.”

“.........”

“너도 무서웠지? 그러니까. 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는 것은 비올렛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콧김을 몇번 뿜더니 손을 뻗었다. 순간적으로 뻗어지는 손에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런것 따윈 눈치채지 못하는 이 도련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그녀가 머리를 묶은 결대로 쓰다듬어주는 다니엘과는 다르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건지 머리 반대로 쓰다듬어서 그녀의 머리는 단숨에 엉망이 되었다. 그에 에이든이 당황했다. 아마 외사촌인 아나블라라면 꽥꽥 소리를 질를 것이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를 흐트러트린 죄가 있으므로 그는 미안, 이라고 작게 말한 후 그녀의 머리를 다시 정돈해주려고 했다.

“다음부턴 내가 형에게 말할게, 다시는 그런짓 못하도록.”

자신을 믿으라고 가슴팍을 팡팡 치는 소년을 보며 비올렛이 말했다.

“믿을 수 없어.”

깔끔하게 말하자, 에이든이 왜!라고 소리쳤다.

“단 한번도 들어준 적 없잖아.”

그 말에 에이든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라 그녀가 조용히 따지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네 탓이 아닌 거 알아.”

다니엘의 말대로 후작도, 에셀먼드도 이런 잔혹한 구석이 있는 남자다. 원래부터 그는 그랬으니, 그녀는 사실 에이든에게 큰 악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그 역시 사실 충격을 받았을 거라는 것을 짐작 할 뿐이다.

그녀는 토미와는 달랐다. 이젠 토미와 같은 친구가 될 수가 없다. 아무런 권한이 없더라도, 이제 그녀는 단상 위에 서서 무릎을 꿇을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위치였다. 언제건 마을 어귀에 가서 성을 바라보던 때가 떠오른다. 그곳에 살아보는게 꿈이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곳은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야. 또 울어?”

에이든이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안 울어.”

우는 것도 행동이라면 또 그것에 파급되는 결과는 얼마나 엄청난 것일까.

“진짜 진짜 안울어?”

“안 울어.”

“정말로? 얼굴은 그렇게나 슬퍼보이는데?”

“아, 안 운다니까!”

그녀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녀는 자신이 소리쳤다는 것에 겁을 먹었다. 에이든은 그녀가 천민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큰 모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것을 후회하며 에이든을 보자, 에이든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알았어.”

기가 죽어 보이는 소년의 모습에, 비올렛은 사실 정말로 무서웠던 에이든이 생각보다 순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자신보다 한살, 아니, 몇개월 먼저 태어난 소년이었다.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는 것을 보니 어쩐지 그 동안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먹구름이 가시는 듯 해서 살짝 미소지었다. 얼굴에 서린 부드러운 곡선에 에이든이 말했다.

“어! 야, 너 웃었다!”

“안웃었거든?”

“아냐, 이번엔 웃었어! 내가 봤어!”

“안 웃었다고!”

“거짓말쟁이야.”

“안 웃었다니까?”

짜증 섞인 말에도 에이든이 그를 짖궂게 놀렸다. 언제나 그녀를 다독여주던 다니엘과는 달리 에이든은 이상하게도 대하면 어딘지 모르게 감정에 솔직하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나중에는 분해서 눈물까지 맺힌 그녀를 보고 앤이 와서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을 하면은 건강이 조아져요~ 세상이 밝아져요!!

우와, 어제 코멘 40개 가까이 달성!! 저 진짜 행보케여 ㅋㅋㅋㅋㅋㅋ 또 용량 낭낭히 들고와땁니다!!

이번편은 비올렛의 각성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비올렛 조금 변해가고 있는 것 같죠?

사실 내일 다음편을 올릴 생각을 하니 설레네요 ㅎㅎ..

독자님들이 막 나 뺨때릴것가탕.......8ㅅ8

이곳은 비가 많이 와요.... 장마라 후텁지근하네요. 우산 꼭 챙겨가시고 비는 되도록 맞지 마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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