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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30화 (30/208)

00030  움트는 새싹  =========================================================================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문 앞에서 훌쩍 내리더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어찌할지 망설이다 에셀먼드의 손을 잡았다. 그가 비올렛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비올렛은 그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였다. 그때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뛰어왔다.

“비올렛!”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다니엘이 서있었다. 저 뒤에는 에이든과 앤이 보였다. 왜? 라는 물음도 물어보지 못했다. 갑자기 살았다는 안도가 들었다. 왜 그들이 여기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달려와서  그녀를 꼭 안아주는 다니엘의 품에서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가씨, 세상에 얼굴좀 봐요, 어떡하죠?”

조금 진정되자 앤이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에이든은 아까부터 아무말도 못하고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그는 정말로 이 일에 놀란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까부터 가만히 그들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에셀먼드가 말했다.

“이제 어리광은 그만 받아줘라, 앤.”

“뭐라고요? 아가씨는 아직 어리단 말이에요.”

앤이 반항적으로 말했다. 비올렛은 앤이 저렇게 에셀먼드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처음봤다.

“어린 것이 모든 경솔한 행위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는 법이다.”

“도련님, 설마!”

그녀가 소리쳤다. 에셀먼드의 차가운 시선이 비올렛을 향했다.

“끌고 와라.”

그의 말에 에셀먼드의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앤의 품에서 그녀를 떼내었다.

“꼭 이렇게 까지 하셔야 겠어요?”

앤의 말에 그가 말했다.

“아무리 너라도 이 이상 말하면 위험하리라는건 알겠지.”

그는 그렇게 짧게 말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셀먼드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에셀먼드의 살벌한 기운에 다니엘도 앤도 더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첫째 도련님은,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죄인처럼 에셀먼드에게 끌려갔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알현실이었는데 이곳에 한달 넘게 있었지만 처음와본 곳이었다. 이곳은 좀더 수수하다는 것 빼고는 국왕을 보았던 알현실과 같은 구조였다.  중앙에 깔린 푸른색 비로드를 따라 갑옷들이 나열해 있었다.  두 계단 높은 의자에 그가 걸터 앉았다. 비올렛은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아래에 서 있는 앤을 바라보자 앤은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 그녀는 차마 예상할 수가 없었다.

“형!”

“다니엘, 잠자코 보고 있어라. 에이든, 너 역시도 봐둬야 할 거다.”

에이든은 아까부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비올렛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겨울 바람보다 싸늘한 분위기와 긴장이 엄습했다. 그리고 아이고, 아이고, 사정하는 신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는데 비올렛은 그 소리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 소리는 바로 아는 사람의 소리였던 것이다.

에셀먼드를 보던 그녀의 시선이 오른쪽을 향했다. 갑주가 부딪혀 짤짤거리는 소리, 그리고 병든 이의 신음소리, 울음소리.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어째서인지 병든 할머니는 쌩쌩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으며, 어머니와 토미는 멍투성이 얼굴로 엎드려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심지어 비올렛 역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원망했던 토미가 거기에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겨우 몇계단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 보는데 그녀는 그들을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도 익숙하게 의자에 앉은 에셀먼드가 두려웠다. 그는 마치 왕과 같았다, 아니 왕보다 더 높아 보였다 왕과는 또다른 위엄을 가진 눈이었다. 왜 사람들이 귀족을 무서워 했는지 이순간 비올렛은 실감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수가 있었다.

“내 아버지인 에르멘가르트 후작을 대신하여 나는 이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조아리는 죄수들을 향해 그가 나직하게 외쳤다. 그리고 그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나으리.”

“제발 살려주세요.”

애절하게 말하는 모양새가 비굴하기 그지 없었다. 그에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하건만, 에셀먼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단 하나뿐인 성녀님을 납치하여, 타국에 팔아넘기려 하였다.”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흰 단지 그들의 협박을 받고 있었을 뿐이에요.”

토미의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비올렛은 잘했다며 웃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 이유는 뻔했다. 에셀먼드는 그 말을 다 듣지 않은 채 말을 끊었다.

“성녀의 역할은 말룸을 처단하는 신성한 의무가 있으며 이 의무를 대체할 자는 그녀 이외에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성녀를 적국인 구자르트에게 팔아넘기려 했던 것은 이 나라의 멸망을 원하는 것이다, 틀린가?”

“아, 아닙니다! 저흰 단지 교황께 넘기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저흰 절대로 넘기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네 마음대로 넘길 지 안 넘길지 결정할 수 잇었다면, 그 시점에서 그것은 협박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틀린가.”

그 말에 토미의 어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에셀먼드가 웃었다. 그녀는 에셀먼드가 말이 없고 무뚝뚝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꽤나 잘 웃었다. 물론 부정적일 때만 말이었다. 그의 미소는 모든 사람들을 선뜩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비올렛은 사람의 미소가 그렇게 차가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산적 잔당들에 피해를 입은 너희들의 편의를 봐주었고 정착할 집을 내어주고 일을 주었다. 그러나,  너희는 성 안에 있는 성녀를 빼돌려 목숨을 위협받게 했고, 더 나아가 나라의 멸망으로 몰아갈 뻔 했다. 이는 국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할 일이나, 이것은 에르멘가르트 영지의 일, 나는 너희들을 신전이나 나라에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올렛은 그런 에셀먼드를 보며 그들을 용서해 주는가? 생각했다. 그러자 아쉬움이 들었다. 왜 그들을 놔주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던 비올렛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천민 비올렛이 아니었다. 에셀먼드와 같은 시선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그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비올렛은 자신이 했던 생각에 깜짝 놀랐다. 지금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어째서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느낀 것일까. 하지만 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네 할머니는 병에 걸렸다고 들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건강한가?”

그 말에 토미가 덜덜 떨며 말했다.

“서, 성녀님께서 봐주셨습니다. 다 죽어가는 할머니를 성녀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그에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내가 그랬다고?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칼자국이 나 있는것 빼고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생각해보면 그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노인의 손을 잡았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조화일까. 그러다 비올렛은 자신의 손을 잡은 노파의 힘이 강해졌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무엇을 한 것일까?  에셀먼드가 의자 옆에 서있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었다.

“모처럼 성녀의 은총을 받았는데도, 아쉽게 되었군.”

갑자기 그런 말을 하던 그가 검을 들어 덜덜 떨고 있는 노파의 심장을 찔렀다. 노파는 숨소리 하나도 제대로 못내고 절명했다. 시체가 늘어졌다. 푹, 하고 피가 튀는 소리에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너희를 영지 법에 의거하여 즉결 처형한다.”

비올렛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인에 깜짝 놀라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꾸라진 노파를 보며 토미가 겁에 질려 흐느끼고 있었다. 토미와 눈이 마주쳤다.

“사, 살려줘 비올렛, 제발 살려줘!”

비올렛은 토미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발버둥이었다. 연약한 목숨이, 그 목숨을 몇분이라도 더 살기 위한 허망하고 쓸모없는. 비올렛은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비올렛은 토미였다. 그 어린날, 살려달라고 자비를 구걸하던. 산적들에게 자비를 구걸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배신한 토미가 미웠다.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꼭 그가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비올렛은 단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아, 안돼요, 안돼요 도련... 아니, 오라버니, 제발 부탁이에요.”

하지만 그는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올곧게 뻗은 은빛의 쇠붙이는 붉은 빛으로 물들어 금방이라도 그들의 목을 내려칠 것 같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이건 정말이다. 그는 정말로 죽이려고 하고 있다.

“제발 부탁이에요, 제 잘못이에요, 제발 부탁해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

그녀가 빌었다. 그것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에셀먼드가 말했다.

“너는 네 선택이 어떤 결과를 일으켰는지 깨달아야 한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그녀의 애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하녀를 쫓아낼때도 그러하듯이.

“제발 부탁드려요, 제발!”

아무리 미워도, 배신을 당했어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제 유일한 고향 친구란 말이예요, 제발.”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잠시동안 그의 행동이 멈추었다. 에셀먼드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는데, 그녀는 그가 행동을 멈춘 이유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비올렛에게 시선을 거두었다.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똑똑히 깨달아라, 비올렛.”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렸지만, 절대로 기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생명을 앞에 둔 이의 절박한 비명에 가까운 외침소리가 들렸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역시 그러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위에 올라탄 산적놈들을 없애려 칼을 들었지만 그는 산적들에게 쉽게 제압당했다. 아버지는, 산적들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오래전 잊었던 그 목소리가 들렸다.

에셀먼드는 피가 닦이지 않은 검을 들었다. 그리고, 칼을 내리쳤다. 은색의 섬광이 번쩍였다.  아아아아악!엄마! 토미의 비명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킥킥킥킥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의 저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가득 찼다. 비올렛은 산적이 던져준 무언가를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받아 꽉 잡았다.

저 표정좀 봐, 킥킥킥 .

손에 있는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냥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 동그란 것은 어찌보면 익숙한 촉감이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낯선 촉감이기도 했다. 까슬한 털의 촉감, 말캉함. 이게 무엇일까. 소녀는 자신이 손에 쥔것을 보았다. 갈색의 털뭉치가 보였다. 어린 비올렛은 그것을 뒤집어 보았다.

꼭 자기 아빠 머리를 공을 쥔것처럼 쥐고 있잖아? 발로 차기라도 하려는거니, 아가야?

아버지는, 아니 아버지의 머리는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그때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꼴사납게 비명따윈 지르지 않았다.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칼질 한번에 단번에 잘린 여성의 목이 데구르르 굴러왔다.  부릅떠진 여자의 눈이 공허했다. 그러나 그 공허한 두 눈은 비올렛에게는 마치 그녀를 원망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과 닮았다. 붉은 피가 푸른 비로드를 적셨다. 토미의 울부짖음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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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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