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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26화 (26/208)

00026  움트는 새싹  =========================================================================

“이제 돌아가요 아가씨.”

비올렛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가씨의 말에 그녀역시 기분이 들떴다.

“말을 보는게 그렇게 재미 있었어요?”

“응. 재밌었어.”

비올렛이 해맑게 웃었다. 곰인형을 선물 받을 때와 같은 미소가 그녀의 입에 걸리자 한 겨울에도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성녀이기 때문인 것일까. 어린 천민 여자아이의 미소는 악한이라도 분명 마음이 흔들리게 할 만한 어떤 힘이 있었다. 그러다가 앤은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이것은 겨울에서 절대 날 냄새가 아니었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향기, 그것은 풀냄새였다.

“아, 아가씨?”

“응?”

“왜 풀냄새가 나는 걸까요?”

“정말?”

그녀가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돌아가는 길 근처에 조그마한 화단안에 풀이 촘촘히 자라나 있었다.

“내가 한 것 같아, 나는 지금 정말 기분이 좋거든.”

“풀들이 겨울을 나기 힘들어서 쓰시지 않기로 한거 아니었나요?”

“괜찮아, 내가 보고싶어서 감내하고 피어난 거라고 했어.”

“……누가요?”

“꿈속의 사람이.”

그녀는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꿈이라도 꾼 것일까. 누군가를 딱히 만난 기색은 없다. 성녀는 뭐 다른 꿈이라도 꾸는가보지? 앤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앞에 있는 소녀가 굉장히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굳이 막고 싶지는 않다는 것 이었다.

“이젠 힘을 퍽 잘 쓰시네요. 어떻게 쓰시는지 깨달았나요?”

“응, 이제 좀 알 것 같아.”

사실 성력을 어떻게 다루는지 몰라 잘 읽히지도 않는 책들을 잘 읽고 있는 비올렛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이 일을 알면 후작도 기뻐하겠지. 하지만 앤은 언제나 그녀가 성녀라는 것을 자꾸만 잊었다. 이제 겨우 싹의 틔운 작은 꽃처럼 연약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

처음 이름을 불렀을 때는 토미가 자신이 아는 토미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자 그녀는 마을에 살았던 토미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집을 천한 집이라고 언제나 무시하고는 했었는데, 토미네 집 식구들은 언제나 그러했으며 토미 역시 그녀에게 매우 심술궂었다.

“저를 알고 계시나요?”

그가 호기심에 얼굴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앞에 서있는, 너무나 고귀해서 차마 올려다 볼 수 없는 성녀를 감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털모자를 벗었다. 긴 은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하늘을 담은 새파란 눈동자도. 그러나 그 눈 색안에 아주 살짝 남아 있는 색은 보라색이었다. 보라색, 그리고 낯익은 얼굴. 마을 푸줏간집 딸.

“비올렛?”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성녀님의 얼굴에 서린 것은 기쁨이었다. 이제 갓 열 한살이 된 소녀가 정말로 자신의 신분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것은 올라 선 신분의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라 같은 신분이었던 자들의 태도 변화였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출신은 변화가 없었지만 지금 그녀가 가진 지위는 왕과 교황에 버금갈 정도였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정말로 성녀님이 너란 말이야?”

“응 그래.”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그는 정말로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넌 천출이잖아, 어떻게 네가 성녀님이 될 수 있어?”

그런 말을 여기서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토미가 재빨리 그녀를 달랬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비올렛. 내말을 들어봐, 너도 알잖아 천민이었던 성녀님은 없다고.”

비올렛은 언제나 그녀를 괴롭히고 업신여기던 그가 이렇게 쩔쩔매는 것을 보고 신기함을 느꼈다. 화를 내고 싶다가도 사실을 틀린말은 아니었고, 비올렛은 토미를 잃고싶지 않았다. 겨우 만난 고향의 사람이었다. 어딘지 모를 우쭐함을 느꼈던 그녀는 그와 동시에 기쁨을 느꼈고, 종종 말을 본다는 핑계로 자주 토미를 찾아갔다.

그녀가 찾아가면, 마굿간 할아버지는 토미를 불렀는데,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인 것같았다.

“정말 몰라보겠어, 멀리서 너를 봤는데 너는 정말로 아가씨 같았거든.”

“그래?”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구나.  그래도 교육 받은대로 잘 행동했다는 뜻이어서 그녀는 뿌듯함을 느꼈다. 사실 비올렛으로서는 몇몇사람 이외에는 그녀를 제대로 대우해 준 적이 없어서 토미가 그녀를 우러러 볼 때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토미는 그녀를 사실 아주 못살게 굴었던 전적이 있으므로, 더욱 더 그러했다.

“할아버지가 네가 오면 좋아 하더라. 말들이 너를 기다린대.”

“진짜?”

그녀는 얼굴에 다이아몬드 무늬가 있는 갈색 암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말들은 히힝,거리며 퍽 기뻐하는 듯했다. 아직은 새와 같은 작은 동물의 목소리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이런 말들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비올렛은 자신의 품에 가져왔던 빵을 가져왔다. 토미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 먹었다. 그는 어떤 말이 가장 성격이 사나운지에 대해 말했다.

토미는 처음에 그녀를 아주 어색하게 대했으나 스스럼 없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그도 그녀를 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퍽 빠르게 친밀해졌다. 그들은 말에게 여물을 주거나 말에 대해 이야기 하다 여물더미에 앉아서 쉬며 종종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

“너희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어?”

“돌아가셨어.”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날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실 상상만 해도 그때의 장면은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산적들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잔인하게 그녀를 대했는지 물어보라면 그녀는 아마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토미에게도 같은 질문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너무도 마음아픈 질문이라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던 대답과는 다르게 토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살았어.”

“그러니?”

그래도 다행이다. 그들이 살아있다니, 비록 비올렛에게 친절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 몇이 생존했다는데 그게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토미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마을 밖에서 일하시고 계시고, 할머니는 병에 걸리셨지. 사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매일 매일 싸워.”

“…….”

그렇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하긴 토미의 할머니는 아버지쪽이니 토미의 어머니와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을 것이고 괴팍한 것으로 기억나는 토미네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이가 좋을리는 없었다.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건 나라서, 후작님의 성에 와 있는 것으로도 감사할 뿐이지.”

“그렇구나.”

“그래도 너는 좋겠구나. 신이 너를 선택해 줬으니 먹고 살 걱정은 없으니까 말이야.”

비올렛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도 힘들었노라고, 아직도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불과 얼마 전 열 한살의 생일에서는 생일을 축하한다던 사람들이 뒤에서는 그녀를 험담하고 비웃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 사람들 중에서 그녀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토미에게 사치였다. 많은 경멸과 업신여김과 더불어 먹을 것을 걱정하던 그녀는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토미의 말대로 먹고 살 걱정은 해결이 된 상황이었다. 경멸과 업신여김은 언제나 그녀를 향하던 것이라,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하는 말은 투정에 불과하는 것이다. 혹여 나중에 말룸의 제물이 되더라도 지금 그녀는 토미보다 나은 상황이었고 토미는 그녀의 불평을 들으면 화를 낼 것이다. 비올렛은 토미의 헐렁한 옷이 가슴이 아팠다. 가죽 옷이기는 했지만 분명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옷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머플러를 벗어 그의 목에 씌워주었다. 그저 목도리를 씌워주었는데도 벌써 따뜻해 졌는지 토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따뜻하지?”

그녀의 말에 토미가 멍하니 서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웃자 소년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비올렛.”

“응?”

“괴롭혀서 미안했어.”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비올렛은 그러자 마음이 환하게 밝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다 잊었고, 오히려 반가운 마음인데도 오히려 사과를 해주다니 너무나도 기뻤다. 이제 그를 미워 할 이유가 하나 사라졌다.

*

“목도리는 어디에 두셨어요?”

앤의 물음에 그녀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그녀는 더듬대며 아주 힘들게 버렸다고 말했다. 앤은 흐응, 하며 눈을 가늘게 뜨며 납득하는 듯 침대자리를 정돈하다가 물었다.

“마굿간 지기 소년과 친해지셨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가씨.”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던 비올렛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은 앤에게 여과없이 전달되었다.

“들었어요, 고향 친구였다죠?”

“…….”

그녀가 아무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앤을 바라보자 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비올렛은 덜컥 겁에 질렸다. 그녀는 대충이나마 그녀가 이제는 아랫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려 놀면 안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레 겁부터 먹은 그녀를 보고 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차피 나중에 수도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제가 아가씨의 행복을 어떻게 막겠나요?”

“……진짜?”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은 신경을 쓰시는게 좋아요. 아무래도…하아.”

그녀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말하는 것을 망설였다. 비올렛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 보다가 이내 앤이 할 말을 깨달았다.

“그 애랑 내가 어울려 놀면 내가 또 천민이라서 그렇다고 손가락질 받는다는거야?

비올렛의 말은 누가 들어도 느낄 만큼 날카로웠다. 앤은 그녀의 물음에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타당한 이유였지만 비올렛은 적어도 앤에게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토미가 아무리 그녀가 아가씨 같다고 칭찬해주어도 비올렛은 천민 출신인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앤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비올렛은, 이번에는 단단히 화가 났다. 고향 친구다. 자그마치 약 4년간 만나지 못했던 아이였다. 갑자기 억울함이 밀려들어왔다. 친구 한 명도 없이, 이렇게 살아왔는데. 겨우 만났는데. 어울리면 천민이라 손가락질을 받으니 자제하라니 너무한거 아닌가.

“너무해.”

그녀가 말했다. 앤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비올렛은 서운함이 배로 몰려들어왔다.

“정말 너무해, 앤.”

그렇다고 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투정아닌 투정을 부리며 입을 다물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앤이 그녀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비올렛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화가나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보다 혹여 앤을 화나게 했을까봐 가슴이 세차게 뛰느라 앤을 차마 보지 못한 것에 있었다. 나 먼저 잘게, 비올렛이 그렇게 말을하자 앤이 불을 꺼주고 나갔다. 어떡하지, 앤에게 화를 냈어. 막상 감정을 표출해놓고서도 불안에 떠는 그녀는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해 뒤척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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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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