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움트는 새싹 =========================================================================
“편지 할거지?”
다니엘이 다정하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곳에 있는게 익숙해졌는데 또 어디를 가야한다니,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괜찮아,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인걸.”
그건 다니엘에게만 그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옆에서 에이든이 말했다.
“야 나는 편지 필요 없어. 어차피 네 문법은 형편없을 테니까.”
“내가 너한테 준다고 했니?”
그녀의 대답에 에이든이 얼굴을 찡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다니엘이 웃었다. 그래도 에이든은 굴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었다.
“흥, 그래도 네가 보내주면 문법 정도는 가르쳐 줄건데.”
“에이든, 네 문법도 그다지 훌륭하지는 못하던데 말이야.”
다니엘의 말에 에이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앤이 다니엘을 거들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대요?”
“야!”
그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첫째 에셀먼드를 바라보았다. 후작이 없는 저택은 언제나 그가 책임자였다. 그는 아무말도 안하고 그저 그녀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빨리 가라는 의미인 것 같아서 그녀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올라타기 전 그녀는 후작 가의 저택을 보았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에르멘가르트 영지로 내려가는 길은 그전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마차를 탄채 몸만 맡기면 되었다. 앤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올렛의 기분을 말하자면 사실 긍정적인것들 보다는 부정적인 것들이 가득 차 있는데, 그것에 대한 반증으로 그녀는 곰인형만 껴안고 있었다. 영지를 내려갈 때 후작이 선물해 준 인형도 있었지만 그 인형은 너무 예뻐서 차마 안을 수가 없어 상자에 곱게 보관하고 있었다.
후작은 자신의 영지로 그녀를 내려 보냈다. 이제 그녀를 맡아주기 싫은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필요없어진 것일까.
마치 쫒겨나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그들 사이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과 열 두살 생일이 이주일 전인데 그녀는 이제 이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가씨, 서운하세요?”
앤이 물었다. 서운하냐는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갑자기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께서는 아가씨가 걱정이 되어서 내려 보내시는 거예요. 벌써 두 번째니 말이에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두 번째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 두 번째가 뭔데?”
“그거야 나중에 다 크시면 아시게 될 거예요. 제가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경을 칠거랍니다.”
앤의 말에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언제나 이들은 이랬다. 알고 싶어도 정작 진실에 대한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자신에 대한 일은 알고 싶은데도 언제나 침묵해서 답답했다.
“정말 잠깐이에요, 두달 정도만 묵으면 된답니다.”
“정말?”
그녀의 말에 앤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차 밖의 창문을 열었다.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한번 눈이 내렸다. 시린 겨울 더욱 더 시린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어느정도 거친 도로를 지나고, 몇번 쉬다 보니 영지가 나왔다.
쾅, 하고 철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며 마차가 오르내렸다. 육중한 문소리가 들리며 성문이 열렸다. 후작의 영지에 진입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작 가의 문양이 커다랗게 찍힌 마차와 후작이 돌아 온 것 같은 규모의 호위병들의 행렬에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조용히 창을 열어 마차 너머 사람들을 보았다. 불과 그녀도 얼마 전에 저기에 서 있었다. 물론 어떤 짖궂은 아이들을 만나면 그녀가 꽃의 거리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 손가락질을 받고는 했었다. 높으신 나으리들이 오시는데 어떻게 감히 네가 앞에 설 생각을 하냐며 아줌마들의 욕설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렇게 마차에 앉은 채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가 슬쩍 시선을 돌리자 앤은 그런 것이 익숙하다는 듯 비올렛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싱긋, 미소를 짓자 비올렛은 어쩐지 부끄러워 창을 닫았다.
“성에 도착하시면 전보다는 더 자유로워 지실 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에이든 도련님도 안계시고 아가씨가 싫어하시는 에드 도련님도 없답니다, 그리고 예절 교습도 당분간 쉰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요!”
그 말을 듣고보니 분명 좋은것도 같았다. 무서운 후작님도 없고 첫째 도련님도 없다. 다니엘을 못보는건 아쉬웠지만 다니엘은 사실 워낙 바빠서 잘 만나지도 못한다. 한번씩 시비를 걸어오는 에이든 역시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굉장히 편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점점 표정이 풀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말울음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멈춰섰다. 잠시 짐 정리를 하는듯 여러 소리가 일어나더니 마차의 문이 열렸다. 새파란 겨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성(castle)의 모습도 들어왔다. 저택이나 왕성(Palace)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크기는 그녀가 머물렀던 후작 가의 저택보다는 컸다. 사용인들 여럿이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어색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은 얼굴로 인사를 받아들였다. 앤이 뒤에서 백작 부인의 교육의 성과가 있었다며 뿌듯해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말이었다. 성문을 들어오니, 생각보다 척박한 환경은 아니었다. 들어오는 좁다란 입구를 따라 화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앙상한 가지였지만, 분명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들을 필 것이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는거야?”
“글쎄요? 그건 아가씨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안내된 침실이 마음에 든 듯 폭신한 소파에 앉아 조금 들뜬 물음으로 물어보자 앤이 대답했다. 거의 1년 전 무서워서 숨기만 하던 그녀와는 다르게, 지금은 어느정도 기분은 표현하는데 익숙해졌다. 그것은 스스럼없는 앤의 성격이 컸다. 비올렛은 앤을 가장 신뢰하고 있었다.
“아가씨,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응.”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음에 들 법도 했다. 이곳은 비올렛이 태어나고 자란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산 곳은 이런 거대한 도시가 아닌 영지 외곽의 산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으나 분명히 이곳의 공기는, 이곳의 익숙한 전경은 알게 모르게 비올렛을 안심시켰으리라.
그러나 비올렛이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웬만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이 어딘지 파악하지 않는다. 특히나 하층민일수록 그들은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지키기에 바빠 자기가 어느곳에 사는지, 자신을 누가 지배하는지 전혀 신경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높디 높은 귀족보다 매질을 주는 사람이 더 중요했으므로.
“그럼 서재도 있어?”
“물론이죠.”
“그럼 책을 읽어서 다니엘에게 편지를 보낼거야.”
앤이 웃었다. 요사이 글을 배운 비올렛은 다니엘 처럼 책에 열중했다. 어쩌면 다니엘과 잘 맞는 것은 그런 연유일지도 몰랐다. 책을 좋아하는 소년과 이제 막 읽는 재미를 깨닫기 시작한 소녀의 조합은 상상이상으로 좋았다.
여자아이는 섬세하지만 아직은 아이라 단순했다. 단숨에 좋아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앤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서렸다.
“아, 오신 김에 성력을 연습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여긴 영지 내니 소문이 퍼지지도 않을거에요.”
“……성력을?”
그녀의 물음에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도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어차피 나중에 신관님께서 아가씨의 가르침을 위해 오실거에요.”
“신관이?”
그녀의 목소리가 어두워 졌다.
“네, 아가씨는 아무리 그래도 성녀니까 성력을 어떻게 쓰시는지 배우셔야하잖아요.”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성력이라. 손을 들어 꼼지락 거렸다. 사실 어떻게 쓰는지는 감조차 못잡겠다. 그녀가 보였던 성력은 처음에 상처투성이였던 몸이 깨끗이 다 나았던 것과, 그녀의 눈물을 타고 후작가의 꽃들을 전부 다 피워버린게 다였다.
“상처를 치료하거나 병을 낫게하거나 하는 기적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녀가 작게 말했다. 갑자기 성력의 이야기를 하니 해야하는 과제를 안하는 것같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못하는데 정말 뭐든지 해도 되는걸까? 정말 뭐든지? 갑자기 심각해진 얼굴을 보며 앤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비올렛은 잠이 들 때까지도 걱정어린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성력, 성력을 어떻게라도 쓰지 않는다면 그녀는 벌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가 받는 모든 호사스러운 대우 역시 차디찬 시선과 더불어 매질로 바뀌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겁이 덜컥났다.
*
“안녕, 나의 아이야?”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동안 겨울이라 볼 수 없었던 새하얀 초록의 풀밭과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풀들이 누웠다 일어섰다. 그 풀들이 부비대는 소리가 바람의 노래 같기도, 풀들의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앞을 바라보자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다가갈수록 달콤하고 맑은향기가 났다. 하지만 간간히 나는 악취에 그녀는 한번씩 머뭇거리기도 했다. 풀밭 위에 우뚝 서 있는 여자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특히나 감은 눈 사이로 보이는 기다란 속눈썹과 길고 탐스러운 새까만 머리카락이 더욱 그러했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비올렛이 마치 앞에 보이는 듯 그 얼굴을 정확히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힘이 많이 강해졌나보구나, 나를 이제 볼수있겠니?”
“네.”
비올렛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어디에요?”
“여기는 어딜까? 글쎄, 너와 나의 꿈속이라고 해두자꾸나.”
여자가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왠지 그 미소에 그녀는 갑자기 덜컥 울고싶어졌다. 그것은 감정의 분출이 아닌, 너무나 갑작스러운 눈물이었다. 어쩐지 저 여자를 보자 무엇인가 서글퍼졌다. 갑자기 눈물이 고이자 비올렛은 화들짝 놀라 소매로 눈물을 쓱 닦아냈다.
“갑자기 왜그러니? 왜 울다가 또 왜 눈물을 닦는거니?”
눈을 감고 있음에도 다 보이는 듯 여자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비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면 풀들이 또 자라버릴 테니까요.”
“그대로 자라게 두지 그러니? 풀들도 그걸 원할텐데 말이야.”
“…하지만 어떤 신관님이 뭐라고 했어요.”
“그래? 그자가 뭐라고 했니?”
“제가 식물들을 자라나게 한다면 봄에 깨어나야 할 식물들이 더 일찍 깨어나서 겨울을 견뎌야만 한대요. 그러면 식물들이 더 고통스러울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여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참 다정한 사람이구나.”
“…….”
그 미소는 분명 누군가를 닮은 듯 낯이 익었다. 그 미소에 해가 뜨는 듯 모든 것이 밝아보이는 듯한 느낌에 비올렛은 이곳이 꿈속임에도 정신을 잃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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