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움트는 새싹 =========================================================================
글을 어느정도 알아가며 그녀가 가장 먼저 읽게 된 문헌이라면 전대 성녀인 아나스타샤에 대한 문헌일 것이다. 약 100여년 전에 사라져 버렸다는 이 환상속의 성녀는 대대로 나타났던 역대 성녀중 가장 막강한 성력을 지녔다고 한다. 마물 말룸을 처단하는데도 가장 단시간이었고 그녀에겐 불과 말룸에게 긁혔던 상처만이 남았노라고 했다.
100년전 데후바스 후작가에 태어난 아나스타샤는 여덟살 때 성녀로서 각성했고, 그 후 신의 사자라고 불리며 여러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가장 큰 것으로는 이교도 군나르 족의 침략을 막아낸데 있었다. 초대 성녀 아그레시아 이후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던 성녀. 신의 기적을 널리 행한 성녀. 그것을 볼때면 비올렛의 마음은 답답해졌다. 일단 이름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라는 귀족적인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은 들꽃에서 따온 비올렛이라는 이름이다. 화려한 궁전이 어울리는 이름이 아나스타샤라면, 그녀의 이름은 꽃의 거리의 보잘것 없는 꽃 한송이의 이름이었다.
게다가 여덟살, 힘을 각성하면서부터 힘을 자유 자재로 사용가능해 왕과 교황의 옆에 나란히 섰던 그녀와는 다르게 비올렛은 아직도 그저 후작가에 업둥이로 와서 아무것도 못한 채 겨우 겨우 배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태생의 차이라는 것일까.
“부인, 성녀 아나스타샤님의 초상화라도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백작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게도 성녀님의 초상화는 볼 수 없답니다. 물론 신전에서도요.”
“왜요?”
“선선대 왕이신 데메트리우스 전하의 명령이었어요.”
“데메트리우스 전하요?”
“선왕의 아버지, 그러니까 현 왕 트라이덴 전하의 조부 되시는 분이십니다. 나중에 왕실의 계보에 대해 배우실 거에요.”
그녀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걸 또 어떻게 다 외우지? 사실 성녀의 계보도 외우기 힘들었다. 이제 글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는데 또 무엇을 더 해야한단 말인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전하의 앞에서는 절대 말하시지 마세요 성녀님. 후작님도 이 화제는 별로 달갑지 않아 하시니까요.”
“알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래도 은밀한 느낌이 나는 말에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의 말은 그녀의 예상을 깼다.
“선선대 왕께서는 성녀를 사랑하셨습니다.”
“…….”
“아주 유명할 정도였습니다. 신의 대리인이신 성녀님에게 빠지고 성녀님을 탐하셨죠.”
“…….”
“당시 기록에 따르면 누구라도 그럴 법 했다고 합니다. 문헌상에 나온 기록으로는 아나스타샤님은 정말 아름다우시고, 현명하시며 자애로우셨다고 하니까요. 선선대 왕께서는 100살이 넘어서 까지 장수하셨다고 하시는데, 죽는 날까지 아나스타샤님의 이름만 부르다가 붕어하신 걸로 유명하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라. 선왕이 성녀님을 사랑했다.
“그래서 왕께서는 그녀의 초상화를 모조리 가져가셨나요?”
“네.”
백작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다 소실되었답니다.”
“네?”
“선대 왕, 아스토르가 전하의 손으로 성녀님의 초상화는 전부 다 태워졌어요.”
“…….”
그 말에 그녀는 선뜩해졌다.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선선대왕은 성녀를 사랑했고, 선왕은 성녀를 증오했다. 아직 비올렛은 어려서 그 감정을 알 수 없었으나. 그저, 몇마디의 사실만 들었음에도 그들 사이의 감정이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그녀는 앤의 허락을 맡고 산책을 나갔다. 정원에 다다르기까지 사용인들 몇몇을 만났으나 그 이전처럼 어딘지 모르게 그녀를 낮잡아 보는 기색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그녀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추운 겨울임에도 꽃들은 싱싱하게 펴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자신의 힘을 실감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피는 꽃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꽃의 향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참동안이나 샛노란 수선화에 정신이 팔려있던 때였다.
“다음 부터는 꽃을 이렇게 많이 피우시면 아니되십니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어제의 데자뷰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미소였다. 너무나 호의적인 얼굴에 오히려 그녀는 당황했다.
“누구세요?”
“글쎄, 지나가던 신관 나부랭이입니다만.”
신관이라는 말에 그는 뻣뻣이 긴장했다. 이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은 타오르는 듯한 어두운 루비색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 늘어트렸으며 군청색에 금색의 장식이 달려있는 긴 코트를 입은 채로 갈색의 호피가 둘러진 화려한 털옷을 입고 있었다. 지나가는 신관 나부랭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차림새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 그녀는 깨달았다. 저 금안 때문일지도 몰랐다. 국왕 전하의 눈도 금색, 저 사람의 눈도 금색, 어제 만났던 그 아름다운 소년의 눈도 금색. 세상에는 금색의 눈이 많구나. 그녀는 혼자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의 주변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소년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익숙한 느낌이 무엇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어제 아름다운 기적, 잘 보았습니다. 몸은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몸을 뻣뻣하게 긴장시키며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이었다.
“……저를 경계하시는군요.”
어린 소녀의 경계는 어른의 눈에 확연히 드러났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다른 의미로 남성적인 얼굴이 드러났다.
“후작님의 허락을 받고는 오신건가요? 집에는 다니엘이 있어요, 다니엘은 이걸 알고 있어요?”
그 말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둘째 영식은 제 방문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와 성녀님이 만날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제가 돌아간 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시들어가는 장미를 보며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 표정이 보였다. 작은 장미가 조용히 시들어 가는것이 자신의 고통인 양 얼굴을 찡그리는 그 표정을 보고 그녀는 호기심이 일었다. 저 남자는 누구일까?
“당신은 누구세요?”
그 물음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체자레입니다.”
“…….”
의외로 그는 쉽게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체자레, 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신관이라니, 어떻게 후작 가에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것일까.
“저를 데려가실 거에요?”
그 말에 그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가식으로 짓는 미소가 아니라 잔물결처럼 흘러가듯 고요한 미소였다.
“성녀님이 원하신다면 데려갈겁니다. 하지만 원하시지 않는다면 여기 계속 있으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올렛은 이 애정어린 행위에 깜짝 놀랐다. 차마 피하기도 전에 쓰다듬어졌기 때문인지 그녀는 뻣뻣이 굳어 있었다. 남자의 손에서는 짙은 향수냄새가 났다.
“차라리 제 양녀로 들였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리고 시들어가는 하얀 장미를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은색의 빛이 새어나오며 꽃은 다시 살아나 싱싱해졌다. 와아, 그녀가 탄성을 지르자 체자레가 웃으며 말했다.
“성녀님께서는 저보다 더 고귀한 실력을 지니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 장미를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힘을 발휘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식물들을 되살리지는 마십시오.”
깨끗하고 고운 장미를 바라보던 비올렛은 남자의 말에 왜요? 라고 물었다. 남자는 그 반문에 기분이 나쁠 법 한데도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아십니까? 겨울이 되면 식물들은 잠을 자다 봄이 되면 다시 깨어나 소생합니다.”
“…….”
“성녀님은 잠든 식물들을 깨웠습니다.”
“……….”
“그리고 이들은 다시 또 잠들어야 합니다. 또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모르시겠지요.”
“…….”
그녀는 놀란 얼굴로 꽃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정원에는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따스한 기후 속에서 피어날 꽃들이 추운 겨울을 견뎌낼리가 없었다. 저 꽃들은 노래를 하고 있는게 아니었다. 추위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꽃잎이 아름답다고? 그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시각에 불과했다. 비올렛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은 무슨 짓을 한걸까. 꽃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는……그건 제가 하고싶어서…했던 일이 아니었어요 일부러 그러려던게… 제 눈물을 타고, 그게 땅이 그걸 먹어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남자는 어제 만났던 소년처럼 그녀의 얼굴을 다정하게 지켜보았는데, 다른 말은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어제 눈물을 보이셨습니까?”
“…….”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또 눈물을 흘리면 식물이 자라날까봐 그녀는 그것을 옷으로 슥슥 닦았다. 예법에 어긋남에도 이 멋있는 사제는 그것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