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움트는 새싹 =========================================================================
현관에 다가오자 그가 그녀를 내려주었다. 거칠게 짐짝처럼 던져버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땅 위로 내려주었으나, 비올렛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고 그녀는 그를 홱 노려보며 현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리광 따위는 부모의 죽음에 부려보지 않은지 오래였다 자기가 뭘 안다고. 그녀는 씩씩거렸다. 사용인들이 그녀를 보며 인사를 했으나 보통같으면 그 인사를 비굴하게 받아주던 그녀는 그 인사를 무시한 채로 자신의 방에 걸어가 문을 쾅 닫았다. 가기 싫어. 모든게 싫다. 자기가 뭐라고. 자신의 상황에 분노조차 못느낀 채로 겁에 질렸던 그녀였지만 한번 분노를 느끼자 그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앤이 돌아왔다.
“세상에, 아가씨 여기 있었군요!”
“…….”
그녀는 앤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앤도 뒤에서 다른 하녀들 처럼 그녀의 험담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불신의 눈초리로 앤을 보았다.
“아가씨, 우셨어요? 얼굴이 빨개요.”
앤의 걱정스러운 어조에도 비올렛의 의심스럽다는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저 말할 뿐이었다.
“나 생일 파티 안갈거야.”
“어머, 세상에. 후작님께서 모처럼 신경쓰셔서 열어주었는 걸요 아가씨?”
“난 그런거 한번도 바란적이 없어!”
그녀는 빽 소리를 지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신경질적인 반응에 앤이 당황해 하는게 느껴졌다. 후작님께 혼나겠지? 분명 혼날거야. 어떡하지? 앤이 혼나면 엄청 아플텐데, 매를 맞을지도 몰라. 매는 아픈데....... 그녀는 걱정되어 이불을 살짝 내리며 앤의 눈치를 살금살금 보았다 . 앤의 얼굴은 아니나 다를까 무척이나 심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불에서 다시 나와 죄인처럼 침대위에 앉았다. 앤은 멍하게 그녀가 하는 양을 보고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푸핫,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 소리가 어찌나 방정맞았던지 비올렛은 그 웃음소리에 또 화가났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앤은 도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야!”
“아가씨가 화라는 것도 내네요, 도대체 우리 아가씨 화를 내게 한건 누굴까?”
“누구긴 누구겠어! 첫째로 재수없는 첫째 도련님이지 뭐.”
본디 그녀는 천민소굴에서 자라왔었고 이미 거친 말투를 습득했다. 물론 그녀는 그런 말투를 즐겨쓰는 편도 아니었고, 언니들도 여자는 그런 말투를 쓰면 안된다고 말했기에 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건 아니었으므로, 무척 용기를 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앤의 웃음소리가 뚝 멈추었다. 비올렛은 너무 잘못 말한게 아닌가 겁에 질렸지만 웃음소리는 이내 더욱 더 커졌다.
“에드 도련님이 아가씨를 화나게 했다고요?”
“그래, 날 마치 짐짝처럼 안았단 말이야! 이렇-게!”
그녀가 침대 위에 있던 라이셀 백작이 선물해준 곰돌이를 껴안고 흉내내자 그녀는 손뼉까지 치며 배를 잡고 웃었다.
“앤은 뭐가 그렇게 우스운건데!”
“아니에요, 아아, 힘들다! 아 참기 힘들어!”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사실 후작님이 배려가 없긴 했어요. 아직 예법도 다 익히시지 못한 아가씨에게 사교계같은 파티를 열어주다니. 분명 어디 이상한 조언을 듣고 와 해준 걸 테죠. 아이 참, 아가씨한테 물어보는게 빠를텐데, 아가씨는 제가 물으니가 기껏해야 케이크를 먹고싶다 했으니 말이에요. ”
아 그래, 파티에 분명 커다란 케이크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책잡힐까봐 그것에 입도 하나 대지 못했다. 게다가 남는건 라이셀 백작님의 이 곰돌이 밖에 없었다.
“아가씨는 성녀에요. 아가씨가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요. 대신에 아가씨는 꾀병을 부려야해요. 아셨죠?”
“…꼭 그래야해?”
“안그러면 제가 혼나니까요.”
그 말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드레스도 갈아입지 않은채 다시 이불을 돌돌 말았다. 앤이 혼이 난다던데 혼이 나는건 정말로 무서운 일이므로, 그녀는 그것에 따르기로 했다.
“어머, 그게 아픈척 한거에요?”
“…….”
그러자 비올렛은 얼굴을 찡그리며 낑낑거리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앤이 새끼강아지같아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트리다가 후작님께 말하고 올게요, 라고 말하며 밖을 나섰다.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는 후작이 올 것을 대비해 최대한 아픈 표정을 짓고 있으려고 했다. 그녀는 곰돌이를 꼭 껴안았다. 곰돌이의 쌔까만 눈알은 검은 보석인듯 차가웠다. 따스한 방 안에 따스한 곰돌이와 누워있으니 어쩐지 몸이 노곤해졌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분명 갈아입어야 하지만 그녀는 그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몸이 무척이나 피곤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
다음날 아침, 어째서인지 품에 안았던 곰인형은 서랍장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리본의 색도 바껴있던것 같았다. 분명 연두색이었던 것 같은데 왜 보라색으로 바뀌어 있을까? 어딘지 모르게 인형도 달라보였다.
“앤, 인형이 바뀌어 있어.”
씻을 물을 가져온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착각인가? 얼굴을 씻고 말리고 난 후 그녀는 인형을 꼭 껴안았다.
“아가씨도 참, 그렇게 인형이 좋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앤이 웃었다. 귀여우셔라. 분명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며 후작이 들어왔다. 딱딱한 얼굴의 후작은 그녀가 곰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더니 어쩐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괜찮아요.”
“의원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그래도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점에 그녀가 뜨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눈을 굴렸다. 하지만 후작의 얼굴은 어쩐지 심각했다.
“성녀님, 성녀님께서는 어제 너무 방대한 양의 성력을 쓰셨습니다. 그 티게르난 공작마저 놀랄 정도로요.”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 말에 서린 걱정의 기색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티게르난 공작이라는 이름을 또 들었으나, 높으신 분이 그녀와 연이 있을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그녀를 천하다고 비웃는 사람중에 하나겠지.
어차피 후작은 그녀가 생각하는 걸 말해봤자 들어주지 않을게 뻔했다. 핀을 쫓아낸것처럼 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을 듣는게 당연하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걸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
그 단절의 얼굴에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곰돌이에 머물렀다.
“곰인형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래도 이건 대답할 수 있었다.
“네, 너무 좋아요.”
그 말에 후작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었다.
“성녀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 곰인형과 함께해도 됩니다. 언제, 어디든지요.”
우와, 다행이다. 분명 생일 파티 때는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의외로 관대한 말에 안심했다. 그녀는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서리자 다시 한번 짙은 꽃향기가 풍겼다. 이번에는 화병에 장식 해 놓은 자색의 아이리스였다. 그러나 풍겨오는 꽃 향기에도, 후작의 시선은 곰인형을 품에 안은채 웃고 잇는 소녀의 시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성녀님, 몸은 괜찮으세요?”
라이셀 백작 부인이 그녀가 오자 마자 건넨 한마디였다. 사실 꾀병을 부린건데 자꾸 괜찮냐고 물어보는 통에 민망해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 부인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놀랐어요, 세상에 정원의 꽃을 그렇게 꽃피우시다니. 쓰러질만도 하시죠.”
사실 쓰러진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것이었다. 괜히 꾀병을 부린 모양이다. 그들에게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기 보다는 사실 거짓말을 하는 상황 자체가 불편했던 비올렛은 어제의 선택을 후회했다. 하지만 돌아가봤자 그런 사람들과 보기 싫은 에셀먼드가 있으므로 속으로 잘한거야, 잘했어. 라고 되뇌었다.
“제가 그렇게 많은 꽃을 피웠나요?”
그 말에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께선 혹시 눈치채지 못한건가요? 지금 창문에 가 보세요.”
“…….”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열었다. 아. 그녀가 탄성을 질렀다. 제 아무리 귀족가라도 정원은 황량하기 마련이었다. 추운 겨울 나무들은 바르르 떨며 변해버린 옷을 떨구었고 꽃 역시 시들어갔다. 생명의 안식을 뜻하는 겨울, 그러나 지금 후작가의 정원은 봄이었다. 분명 실제로 나가면 춥겠지만 그날 따라 하늘은 맑아서 햇살은 평화롭게 꽃들을 내리쬐었고눈처럼 떨어지는 꽃잎들은 봄을 연상케 했다.
“…어.”
노랑 빨강, 분홍, 보라. 여러 색깔의 꽃들이 마음대로 자라나 있었다. 정원사가 고생하겠군, 이라고 중얼거렸던 것은 이런 의미였을까. 비올렛은 덜컥 겁이 났다. 저 많은 꽃들을 내가 피워낸 거란 말인가. 정말로?
“갑자기 취소된 파티에 여러 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바깥에 나서자 마자 저런 꽃을 보고 성녀님에 대해 불평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
“더군다나 후작께서는 몇송이 꽃을 그들에게 주었어요. 그거 아나요? 겨울에 피는 꽃은 한정되어 있고, 특히나 저런 아이리스는 정말 구하기 힘든, 불가능한 것들이지요.”
자색의 꽃을 보았다. 꽃병에 꽂힌 꽃들은 자신들이 꺾여서 이곳에 와 있음에도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바로 이게 성녀님이 신께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랍니다.”
비올렛은 꽃을 보았다. 그 싱싱해 보이는 싱그러움을 안았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힘이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 그때, 그녀는 소년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그 아름다웠던 신관 소년…….. 새하얀 옷을 입은 소년은 그 자체로도 빛이 나는 듯 신비로웠으며 성스러워 보였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런 모습일까. 그런 모습으로 비올렛에게 나타난 것일까. 그런 소년에게 검을 겨누었던 첫째 에셀먼드의 생각이 나자 그녀의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다. 비올렛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리광, 명예? 그렇게 보는 줄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막상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나빠왔다. 분명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열심히 수업을 받아야겠다고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 작품 후기 ============================
비축분이 이틀 양 밖에 안남았네여..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를 글쓰는 머신으로 만듭니다..
코멘 없으면.. 없다.... 글쓸힘... 어둡다 세상......없다 인생의 낙...
참고로 다음편에는 가장 궁금해 하셨을 그분이 등장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에요.
언제나 말하지만 유년기는 답답하실거에요. 쓰는저도 답답한데 읽는 분들은 오죽하시겠나여 ㅋㅋㅋㅋ 여러분들이 당연하게 의문을 가지는것도 이해합니다!
이것도 나중에 풀어갈 생각이니 걱정 댓츠 노노 ㅋㅋㅋㅋ
세개정도의 큰 사건이후에 이제 성년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