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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20화 (20/208)

00020  움트는 새싹  =========================================================================

“아버님께서 주의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소년이 사라지자 에셀먼드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힐난이 섞인 서늘한 말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까딱하다가는 신전에 그녀를 빼앗길 수도 있었으므로 화가 날 상황이긴 했다. 그녀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 사람이 무서웠다. 번쩍이는 검을 보자 두려움이 더 강해졌다.

아직도 왕국군을 기억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의 왼쪽 손에는 아직도 검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흉기였다. 그녀는 겁에 질렸다. 그 표정을 본 그가 어쩐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흠칫 하며 그의 손을 피했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더 있고 싶으시다면 같이 있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몇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마치 야생 동물을 안심시키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코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분명 그녀를 깔깔거리며 비웃었던 여자들이 저기 있을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 하녀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녀는 그러려니 하면서 슬피 울며 넘겼다. 하지만, 지금 비올렛은 도저히 그곳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녀는 다시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 안았다. 도대체 언제면 이게 끝나는 걸까.

고트에게 매질을 당했을 때는 그래도 그것이 고트 할망구가 지치는 시간에는 끝날 거라는 희망은 있었다. 비굴하게 잘못했다고 빌고 흠씬 맞고 나면 그래도 언니들은 그녀에게 더욱 더 잘해주었으며 고트도 한번씩은 그녀에게 사탕을 쥐어주고는 했다. 매질을 한 다음에는 오히려 그녀의 사정은 그래도 약간이나마 나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계속 매만 맞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매질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자 다시 절망이 찾아와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늘한 겨울 바람이 몸을 파고들었다.

그때 따스한 무엇인가가 그녀의 등에 덮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얼굴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저 사람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테지. 그래서 핀을 쫓아낸거 아니야? 반항적인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외투를 차마 던져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겁이 많았다. 그녀는 에셀먼드가 들고 있는 검이 너무 무서웠다. 그 살기로 벼려진 흉기가 내려쳐, 그녀를 금방이라도 찌를 것 같았다.  그녀가 한참동안 울고 있을때, 문득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만났을 땐 변성기였던 그의 목소리는 이미 낮게 가라앉아 제법 남자의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원의 모든 꽃들을 다 피워버릴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보았다. 눈이 내리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날에 맞지 않은 나무에 피어난 봄꽃들이 그녀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계절은 겨울이고 서늘한 칼바람이 불고 있는데 꽃이 피어나 있었다. 에셀먼드의 뒤쪽에도 노란 장미가 피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앉아있는 곳 주위로 초록의 풀들이 솟아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똑 떨어져 풀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그 부위에 있던 꽃들이 더욱 더 짙은 향기를 뽐내었다.

“…….”

그녀는 자신이 검을 든 에셀먼드의 앞이라는 두려움도 잊고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꽃들, 그러나 정원사의 손에 다듬어 지지 않은 꽃들이 저마다 피어 나 향기를 뽐내기 시작했다. 겨울의 서늘한 내음이 사라진 채 헐벗은 나무에게는 초록 옷이 입혀져 있었다.

“내가 그런건가……?”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옆에 있는 새하얀 장미 꽃봉우리에 손을 올리자 마치 주인을 만난 강아지가 애교를 부리는 것 처럼 기쁘다는 듯 활짝 꽃이 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데에 성력은 함부로 낭비하는게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반항적으로 대답했다. 내가 저질렀다는 자각도 없었는데 어떻게 조절하란 말이야? 그 생각에 그녀는 화가 났다. 그녀는 첫째 도련님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었다기 보다는 두려웠다. 검을 보니 더욱 더 그러했으며, 그녀는 그와 결단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외투를 벗어 그에게 건넸다. 셔츠만 입고 있는 그는 추울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가 입고있던 외투를 별로 입고싶지는 않았다. 그가 무서운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것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이상한 고집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가져가라고 내밀었다. 그에게 신세따윈 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소년에게 검을 겨누던 그를 기억한다. 그 소년이 신관이라고 밝히지를 않았다면, 아니, 이곳이 아닌 그 어느곳에서 그녀가 만약 성녀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천민인 그녀는 그의 손짓 하나에 죽을지도 모른다. 어린 그녀는 리나와 로즈의 죽음 이후로 자신들의 목숨은 생각만큼 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적의 잔당을 소탕한다며 여자들을 무참히 살해하던 그들을 기억한다. 아마 저기 눈 앞에 있는 남자도 그런 남자들 중 하나일 것이다.

“감기라도 걸리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저 존댓말도 싫었다. 언제나 저렇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 그런것도 싫었다. 꽤나 엄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지만 그녀는 그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은 그의 짙푸른 눈이 그녀를 향하는것이 무서웠지만 말이었다.

“아까 그 신관을 따라가지 않는게 후회되십니까?”

그 말은 그의 말투에 처음으로 섞인 비아냥이었다. 그 말에 더더욱 기분이 나빠진 그녀가 원망을 담아 대답했다.

“네, 안 따라간게 후회 돼요!”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며 다시 다른 쪽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사실 그녀가 뛰었던 것은 이곳으로 부터의 도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에셀먼드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따라가 버릴 걸 그랬다. 분명 망설이긴 했었지만 그 아름다운 소년이 신관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어쩌면 신관이 아니었다면 덥썩 잡았을 지도 몰랐다. 정말 말하는 대로하는데, 자기가 만나고 싶은것도 아닌데 왜 언제나 저 첫째도련님은 그녀를 보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인가. 그냥 모든게 다 싫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그녀를 쫓고있던것이다. 그녀는 겁에 질려 더욱 더 빨리 뛰었지만 얼마 안가 그에게 허리를 붙잡혔다.

“놔요, 놔!”

그녀는 발버둥 쳤다. 어쩐지 화가 났다. 그가 꽤나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올렸지만 그녀는 도망가고 싶었다. 제발,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여긴 아니야, 이상해, 너무 무서워. 그녀는 엉엉 울었다. 또 눈물이 떨어지는 곳에서 풀이 자라난다. 이제보니 눈물이 똑 떨어진 곳에서는 은색의 빛이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사가 고생좀 하겠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을 흘리는데도 어떠한 위로도 없이 정원사의 걱정을 하는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다니엘이라면 이러지는 않을텐데, 왜 항상 말을 이렇게 한단 말인가.

“이거 놓으라니까요, 당신이 제일싫어!”

그녀가 말했다. 그가 잠시 멈칫 하는 것 같았으나 곧 더욱더 팔을 단단히 잡았다. 어찌나 꽉잡았던지 뱃속에 있는 내용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이미 여기 있기로 결정한 이상, 벗어나는건 무리라는걸 알아두십시오.”

“그 존댓말이 제일 싫어!”

그녀가 악에 받쳐 씩씩대며 말하자 그가 몇초 동안 아무말이 없더니 말했다.

“그럼 피차 원하던 일인 것 같으니 말하겠다. 너는 절대 여기서 벗어날 수 없고, 신전에 돌아갈 수도 없어.”

“이거 놔!”

“그리고 난 널 놔주지 않을거다.”

서늘한 그의 음성에 그녀는 두려움에 달달 떨었으나 그의 옆구리에 끼여서 가는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짐짝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안을 수 있단 말인가.

“네 어리광은 잘 봤으니,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명예에 맞게 행동하길 바란다.”

저 사람을 왕자님으로 봤던 내눈이 이상했던 거야, 어떻게 저런 남자를 왕자로 봤을까. 아, 뒤에서 보면 얼마나 우스운 꼴일까. 누가 보면 분명히 또 비웃을 거야. 그녀는 수치심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을 안은 남자가 너무 미웠다. 신분이 천하다고 나도 짐짝처럼 대하는건가 하는 생각 조차 들었다. 너무 화가 나니 눈물이 계속 뚝뚝 떨어졌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눈물을 받은 대지는 신이나서 꽃들을 피워냈으며, 그들이 가는 곳을 기점으로 짙은 꽃내음이 풍겨왔다. 내려놓으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싶었지만 그렇게 그를 함부로 하다가 그 검에 찔려 죽을수도 있으므로 싫다고 말은 하면서도 차마 제대로 반항하지는 못했다. 성큼성큼, 후원을 지나 정원으로 간다. 차가운 공기 바람에 눈물이 점점 말라갔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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