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움트는 새싹 =========================================================================
“어머, 저기 후작님이 오셨어요.”
앤의 말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후작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다시 긴장으로 뻣뻣이 굳었다. 후작은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는 듯 하더니 곧장 이곳으로 왔다.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성녀님.”
그녀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살작 허리를 숙였다. 사실 에이든의 축하보다 더 받기 싫은것이 후작의 축하였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만든 후작이 싫었다. 그저 방에 편안히 놔두는게 생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것인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생일이란 그저 그 날 조금 맛있는걸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일까. 게다가 그녀는 사실 이런 곳에 처음이어서 상당히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물론 예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러했다. 그녀는 후작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옆에 계속 서 있었다. 다라서 그녀는 더욱 더 부담이 되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생일을 축하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후작의 말에 그녀는 우물쭈물했다.
“그냥, 식탁위에 햄이 나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말에 후작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실 그 햄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귀족들이 먹는 부위로만 만든 귀한 햄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는 웃었다. 이제는 돌아 갈 수 없는 그날의 생일,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자 다니엘과 후작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없어진 그들에게 여러 무리의 귀족들이 다가왔다.
“오, 오오오오!”
적갈색 콧수염을 가진 남자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약간 머리가 벗겨졌는데 눈썹만은 숱이 많아서 언뜻 보면 눈에 눈썹이 파묻힌 것처럼 느껴지는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성녀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과하게 정중한 남자의 인사에 그녀는 예법에 맞게 답례를 했다.
“성녀님, 제 남편이랍니다.”
그 옆에있는 라이셀 백작 부인이 웃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라이셀 백작이었다. 그는 흥미가 이는 눈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때 후작이 앞으로 성큼 걸어 그녀를 그의 시야에서 차단했다. 후작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더욱 날카로워 그녀는 후작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닌지 순간 겁에 질렸다.
“왜 그런가. 자네의 그 산만한 몸을 치워주지 않겠나? 나는 성녀님을 더 보고싶은데 말일세.”
“…….”
후작은 분명 그를 보고 있을텐데도 말이 없다. 비올렛이 볼 수 있는건 후작의 너른 등과 넓은 어깨 뿐이었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것인지는 저 라이셀 백작만이 아는데 저 사람은 분명 좋아하고 있었다.
“베오른 자네. 정말.”
“…….”
후작은 말이 없었다. 마치 바위와 같이 서 있을 뿐이었다.
“자넨 매일 보지 않는가.”
“나도 매일 못본다네.”
그 말에 라이셀 백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내 그리도 일렀거늘, 성녀님. 후작님은 참 딱딱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녀가 후작의 시야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며 그를 관찰하듯 바라보자 그가 호오, 라는 나직한 탄성을 지르며 결국 껄껄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도 귀여운데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우리 딸로 데려왔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녀님! ”
“…….”
백작 부인이 웃었다. 후작은 말이 없었다. 넓은 등만을 보인 후작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말에 동의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데려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의 입장을 이제 이해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녀는 높은 사람이니, 어떻게 보내지도 못하는 것이다.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게나.”
그 반증으로 후작의 목소리는 그녀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크게 짜증이 배여있었다. 백작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뭐가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뼉을 몇번 치더니, 시종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
번쩍거리는 분홍색 상자에 새빨간 리본이 예쁘게 매듭지어져 있었다. 그녀의 허리까지 올라오는 조금 커다란 박스였다.
“자, 생일이면 응당 선물이 있어야겠죠? 원래는 따로 시종을 통해 드려야 함이 옳으나. 제가 성녀님께 직접 드리고 싶어서요.”
예쁘게 포장된 박스를 백작이 건네주었다. 커다란 박스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선물이다. 선물을 받아보는 것도 무척이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꽃의 거리의 언니들은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지만 생일까지 챙겨줄 여력은 없었다.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것? 그녀들은 태어난 날을 저주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선물을 받았다.
아무리 이 곳이 불편하다고 한들, 어린 소녀가 난생 처음으로 받은 커다란 선물을 싫어할리는 없었다.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이것을 말해도 되는지 안되는지 몇번이고 망설였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느꼈다.
“성녀님, 백작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 함이 옳은줄 압니다.”
후작이 날카롭게 말했다. 냉정한 질책에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언가를 받으면 감사하다고 함이 당연했다. 후작은 자신이 아직도 기본적인 예법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황급히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 말에 백작이 빙그레 웃었다. 어떡하지, 다시 자신이 없어졌다.
“우와.비올렛.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렇지?”
마침 다니엘이 옆에서 말을 해주지 않았으면 그녀는 말할 용기도 못낸 채 선물 상자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백작은 사람좋은 미소로 너그럽게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백작 부인 역시 웃는 것을 보아 아직 그녀는 큰 실수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응.”
그녀가 그 말에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한 얼굴로 선물을 보는데, 그들은 행여 성녀가 성력이라도 써서 투시라도 하는건 아닌지 생각했다. 아주 심각한 얼굴의 그녀는 한참 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번 열어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백작은 그녀의 말에 기쁜듯 말했다. 귀엽다는 말이 작게 들렸으나 잘못 들었겠지 생각하며 그녀는 한쪽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예쁜 매듭이 풀리는 것은 안타까웠으나 안에 들어있는 선물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와아.”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탄성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복슬복슬한 털이 인상적인 곰인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손에 담자 털의 느낌이 보드라웠다. 갈색의 곰인형의 목에는 연두색 리본이 매여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안아 얼굴을 묻었다. 폭신폭신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비올렛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이셀 백작님.”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라이셀 백작님이 말했다.
“맘에 드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서 살았을 적에 그 마을에서는 그나마 형편이 좋았던 세라 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헝겊으로 만든 귀여운 곰 모양의 인형은 세라에게 자랑거리였다. 비올렛은 그 인형을 만지고 싶었으나. 푸줏간집의 천민따위가 어떻게 더럽게 내 인형을 만지냐고 그녀의 손을 탁 쳐버렸고 그녀는 차마 그 인형을 가지고 싶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인형을 달라고 졸라보았지만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서 그녀는 다시는 인형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세라의 인형이 정말로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이 인형은 그 인형보다 훨씬 크고 더 귀여웠다. 아마 정말로 그것보다 더 폭신하고 부드러울 것이었다. 그녀는 인형을 끌어안은채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가지고 놀고 싶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모두가 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무슨 잘못을 한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그때 갑자기 짙은 꽃향기가 확 하고 풍겼다. 그 꽃내음을 그녀만 맡은 것은 아니었는지 모두가 다 의아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어떤 꽃을 장식한거죠? 향기가 좋네요.”
백작 부인의 말에 후작이 미묘한 얼굴을 했다. 앤이 말했다.
“하얀 세이라 꽃으로 장식했습니다. 보통 세이라 꽃은 이렇게도 짙은 향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꽃 향기는 짙었지만 독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 편안한 향기를 즐겼다. 그러다가 백작 부인이 비올렛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머나, 성녀님. 성녀님이 성력을 쓰신거로군요!”
“그렇군!”
또다시 모여드는 시선에 깜짝 놀랐다. 저 멀리 떨어진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사실 무슨 일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성력이란 라이셀 백작 부인이 모르는 미지의 것이었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습득할 수 없으니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식한 봉오리 꽃들이 모두 다 활짝 펴 있었다. 비올렛은 그리고 처음으로 저 꺾인 꽃들이 생일을 축하해, 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이 느껴졌다.
*
“그 인형은 방에 가져다 두시는게 어떠신지요.”
얼마나 안고 있었는지 후작이 넌지시 말하자 그녀는 시무룩해졌다. 앤이 인형을 갖다두겠노라고 가져가자 손이 허전해졌다. 그녀는 쭈뼛쭈뼛 거리다가 바깥공기를 쐬겠다며 바깥으로 나섰다. 다행히 후작은 붙잡지 않았다.
이제는 완연한 겨을이 되어 후작가는 싸늘했다. 아직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었고, 후작가는 난방이 잘되어 따스한 편이라 그녀는 그나마 여유롭게 둘러 볼 수가 있었다. 사실 이러한 자리는 처음이라 아직도 불편했고 그녀는 조금 쉬고 싶었다. 아까 앤과 같이 방에 갈 걸 그랬나, 하지만 아무래도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녀는 쉴만한 장소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열려있는 문중에 하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정말 후작께서도 마음이 넓으시기도 하시지.”
“그러게요, 세상에.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천민 계집애를 위해 이렇게 몸소 생일파티까지 열어주고 말이에요.”
“사실 열네 살이 되어 국가에서 주관하기 전까진 딱히 챙겨줄 이유도 없는데 말이죠.”
“어떤 여자애인가 궁금해서 와 보았는데. 저렇게 멍청해보여서야.”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분명 별로 춥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무척이나 추웠다. 역시나 이렇게 눈에 보였던 것일까.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피곤해도, 그녀는 사실 들떠 있긴 했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귀족 나으리들이 이곳에 방문했다니, 정말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 마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렇게 들뜬 비올렛의 마음은 한순간에 무너지고야 말았다.
“어차피 후작께서도 교황파들을 견제하려고 노력하려고 하는 거겠죠.”
“그럼에도 그 천민… 아니 성녀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 초대장을 보냈던 후작의 저의가 무엇인지.”
“사람들 봤어요? 거의 오지 않았던데요.”
“사실 초대장을 받는 것도 모욕이라고 할 수 있죠.”
“맞아요, 그래도 미래 일은 어떻게 될 줄 모르잖아요? 절친한 벗이신 라이셀 백작 내외를 제외하시고는 다 그런 계산 하에 오셨을 테지요.”
“맞아요, 그게 아니라면 누가 이곳에 오겠어요?”
깔깔 거리는 목소리가 서늘한 복도에 울려퍼졌다. 비올렛은 추웠다. 그러나 그것은 복도가 추운 것이 아니라 저 말들이 주는 차가움에 얼어붙고 있는 것만 같았다.‘절망’이라는 단어를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단어가 그녀를 좀먹어 가고 있었다. 분명 저 사람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왜 저사람들은 나를 비웃는 것일까. 천민이라서? 천민이기 때문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그녀 생각으로도 사람들은 생각 이상으로도 적었다. 왜 생일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는 울음을 참느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채 밖으로 나왔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앗다. 꽃이 져버려 황량한 정원을 보며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그녀가 흘린 눈물 한 방울 한방울 마다 그녀의 머리칼 같은 은빛이 나며 땅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겨울이 되어 시들었던 장미가 빠른속도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걸어가는 걸음 하나마다 다시 장미가 피어올랐다. 어디서 울어야 할까. 예배당? 아니면 어디가 좋지? 아무도 날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장소는 없을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자 이번에는 봄에 피어야 할 수선화가 미리 피어났다. 짙은 향기를 뿜고 있음에도 엉엉 우느라 코가 막힌 그녀는 향기를 맡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머리가 띵해왔다. 사람이 없는 후원쪽으로 가자,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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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다음편 곧 올라와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