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움트는 새싹 =========================================================================
“어머나, 예쁜 아가씨!”
이스킨데르 자작 부인의 일 때문인지, 다음 날 그녀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라이셀 백작 부인을 맞아 들였다. 햇살에 비치는 밀빛 머리에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다갈색 눈동자를 한 이 아름다운 백작 부인은 그녀에게 활짝 미소지어주었다. 마치 명화속에 나오는 그림과 같았다. 이렇게 높은 귀족들은 다 이렇게 예쁜걸까. 비올렛은 긴장하며 자작 부인에게 배웠던 대로 치마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러자 백작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어, 어머어머.”
“?”
물음표를 가지고 올려다 보니 백작부인은 정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일까, 고민해보다가 아무래도 이렇게 인사하는게 아니었나, 뭔가 잘못된건가? 비올렛은 긴장해 잔뜩 굳어있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정말로 예상외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가르칠건 없어보이는데. 정말 내가 가르칠게 있는 건가? 내 딸보다 나은것같은데?”
옆에 있는 앤에게 물어보니 앤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은 그녀가 칭찬받았다는데에 굉장히 뿌듯한 듯 했다.
“후작님께서는 예법 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전반에 대한 교육도 원하고 계십니다.”
“어머, 그렇군.”
백작 부인은 그녀에게 말하며 따스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도 언제 자작 부인처럼 될지는 몰랐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오늘도 회초리를 맞지 않게 해달라며 빌 뿐이었다. 아마 백작 부인은 저렇게 엄청 높으신 분이니만큼 무척이나 엄격하신 분이겠지.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
“그렇게 하는게 아니에요, 성녀님.”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세 걸음 만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백작 부인이 다가와서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걸을 때마다 얼굴이 숙여지네요.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고요. 허리를 좀 더 세우시고 어깨를 조금 더 활짝 뒤로 펴세요.”
백작 부인은 손수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펴 주었다. 자작 부인은 그녀가 손에 닿는 것도 싫다는 듯 그저 명령만 했지만 손으로 잡아주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은 잡혔다.
“어머, 성녀님은 똑똑하시네요. 바로 기억하시네. 제 여식은 가르쳤을 때는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비올렛은 그녀의 긴장을 완화해주기 위해 백작 부인이 그녀에게 해주는 푸념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말해준 것을 기억하고 적용하기에 벅찼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백작 부인과 점심을 먹는다. 그 사실이 벌써부터 걱정 되었다. 사실 식사라는 것은 모든 예절의 집약이었고, 그것을 가족이라 하는 자들에게 몇번이고 지적당하자 언제나 그녀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남들 앞에서는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앤은 언제나 그 점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별반 틀리지 않았다.
“반대 방향이에요, 성녀님.”
그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쥐고있던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생선 살 바르는 방향이 달랐다고 한다. 다시 받은 지적에 너무 깜짝 놀라 나이프까지 떨어트려 나이프는 접시 위에 쨍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비올렛은 의자에서 내려왔다. 어리둥절해 하는 백작 부인의 모습이 보였으나 그녀는 백작 부인의 앞에 다가가 치마를 걷었다.
“이게 무슨 행동인가요, 성녀님?”
백작 부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비올렛은 그저 매질이 적기만을 바라며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제 실수를 인정하고 벌을 받겠습니다.”
“…….”
백작 부인이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설마 이러한게 더 화를 내게 했던 건가 싶어 스리슬쩍 얼굴을 올려다보니 그녀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앤이 바깥에 나가있었으므로 딱히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묻지도 못한채로 백작 부인은 할 수 없이 행위의 주체인 비올렛에게서 답을 구했다.
“이스킨데르 자작부인이 설마 이렇게 훈육시킨건가요?”
그 물음에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백작 부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안때리는 거지. 화가 난 걸까.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움츠러들었다. 그때 따스한 품이 느껴졌다.
“아, 성녀님.”
그녀가 안는 바람에 한껏 걷어올린 스커트 자락을 놓쳐버렸다. 그녀가 그것을 다시 올리려 손을 내리자 백작 부인이 비올렛의 손을 잡았다.
“안심하세요, 저는 성녀님을 때리지 않아요.”
“…….”
백작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속삭인다. 그녀의 한숨 섞인 탄식이 비올렛의 머리 위에 작은 바람으로 느껴졌다. 백작 부인에게선 따스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하지만 비올렛의 몸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정말, 정말로 때리지 않는 다는 것일까. 다른 의미로 벌을 주지는 않을까.
“우리 사이에 매는 없을 거에요, 약속할게요. 매질을 하는건 아주 야만적인 훈육 방식이죠. 세상에나 이야기는 대충 들었지만 이럴줄이야…….”
그녀는 다정하고 친절했다. 다행히 비올렛을 때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비올렛은 백작 부인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밥을 먹었다. 백작 부인은 비올렛이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맞았어요, 바로 그거에요. 라고 말하며 그녀를 다독이며 격려했다. 덕분에 항상 예민하던 식사 문제는 비올렛의 걱정보다는 잘 해결이 되었다. 비올렛은 아직까지도 겁에 질려있었으나, 점차 아름다운 백작 부인은 자신을 때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절반은 믿었다.
시간이 지나며 비올렛의 몸가짐이 조금 편안해 졌으며, 백작 부인의 호들갑 스러운 칭찬으로 그녀는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저 높은 사람이 맞다고 하니까 맞는 거겠지, 그런 신뢰가 들었던 탓이었다.
가끔 가다 만나는 다니엘 역시 그 말이 맞다고 해 주었고. 그녀가 정말로 아가씨같아 보인다는 말까지 해 주었다. 아주 가끔가다 마주치는 에이든 역시 뭐라고 시비를 걸고 싶었지만 걸 수 없다는 듯 입을 씰룩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에 있었다.
“어…….”
그녀는 글을 읽지 못했다. 물론 자작 부인이 글을 가르쳐주고 다니엘이 도와주었으나 완벽하게 글을 숙지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자작부인은 그녀가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이해의 범위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식으로 가르치는 바람에 다니엘이 그녀의 선생이라 봐도 무방했다. 비올렛이 당황하여 백작 부인을 보자 백작 부인은 비올렛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바로 눈치 챘다.
“괜찮아요, 글은 우리 천천히 배우도록 해요. 그러면 이제, 우리 성녀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어요? 물론 필기하진 않으셔도……아, 이건 말해도 소용이 없겠네요.”
보드라운 말씨에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녀가 알던 이야기와 비슷했다.
악이 세계를 침범하여 어둠에 물들어 가던 세상, 그 누구도 신을 믿지 않았고 신의 이름을 부르며 탄식했다. 악마의 하수인인 말룸은 너무나 무시무시해서 제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신의 대리인, 초대 성녀 아그레시아가 모든 어둠에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악은 사라지지 않고 재림하며 성녀 역시 나타나 악을 물리쳤다. 성녀가 태어난 나라가 이곳 아그레시아였고, 그녀는 이곳에서 말룸을 무찔렀다. 그리하여 나라의 이름은 초대 성녀의 이름을 따 아그레시아가 되었다. 어머니가 해준 동화속 내용과 똑같았다. 동화속에는 소년과 청년, 노인이 나왔지만 역사적 사실로 접하는 이야기는 달랐다. 마치 동화속에 나타나는 성녀는 역사속의 위인들과 똑같이 취급되어 인물의 하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그레시아라는 나라의 개념이 생겼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언제나 아그레시아는 그 옛날부터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었다.
“신은 바로 우리에게 축복을 내린 거에요. 성녀님을 이렇게 빨리 찾아내실 수 있게 하신 거니까요.”
성녀는 신의 상징이다. 신이라 하면 만인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애’로 이루어진다. 신의 대리인인 성녀는 신전의 최고의 지위에 오른 교황,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과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녀님입니다.”
왕과 교황과 같은,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높은 지위.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그녀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공경은 하되, 그녀를 경멸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은 후작 가의 하녀들만 해도 그러지 않았던가. 핀만이 유일하게 친절한 하녀였지만 쫓겨났다. 다행이도 앤도 친절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나타나 세계를 구하는 성녀. 그것이 바로 성녀님이세요.”
리나와 로즈가 성녀님을 기다린다고 했다. 성녀는 어떤존재일까.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속 공주님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전대 성녀인 아나스타샤와 그 전대 성녀인 루치아는 어떠했을까. 그녀와는 달리 정말 공주님 같았겠지.
“저도 말룸을 무찔러야 하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리고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룸은 언제 오나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올 수도있고, 내일 올수도 있으며, 10년 후에도 올 수 있어요.”
“………”
그녀는 덜컥 겁에 질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반푼이 성녀였다 그런데 어떻게 말룸을 무찔러야 한단 말인가? 정말 신이 잘못 생각한 것같은데, 비올렛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성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기록들에 따르면 말룸들은 적어도 성녀님이 어느정도 성장 하신 후, 성년이 된 후에 나타났으니까요. 신께서는 그러한 것들도 안배를 해두시는 거랍니다.”
“…….”
성년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앞으로 적어도 6년은 무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신이 실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었다.
“나는 할 수 없어요.”
갑옷을 입은 사람들만 봐도 무서운데 어떻게 말룸을 무찌른단 말인가. 크기는 성 하나와도 같다고 하는 붉은 눈의 그 무서운 괴물을 어떻게?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그럴 힘도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그 괴물과 어떻게 맞서 싸우란 말인가,백작 부인이 말했다.
“천만에요, 할 수 있어요. 역대 성녀님들이 모두 다 해오신 일인데요.”
그 말에 그녀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백작 부인은 따스한 말로 그녀를 격려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모두가 다 해온 일이다. 그래서 그녀도 해야 했다. 마치 강요와도 같았다. 어느날 갑자기 성녀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에게 듣던 무시무시한 괴물을 죽여야만 한다고 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글도 못읽으며, 걸음조차 우아하게 못 걷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기껏해야 그녀의 능력이라고는 가끔가다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밖에 없었다. 새에게 부탁해서 말룸을 죽일수는 없지 않는가.
“전대 성녀님인 아나스타샤님께서도 하셨고 그 전전대 성녀인 루치아님도 그러셨는걸요, 성녀님도 할 수 있어요.”
아나스타샤도, 루치아도 분명 그녀와는 다른 정말 동화속의 공주님 같은 아가씨들일 것이다. 천민이었던 그녀와는 격이 다르다. 비올렛은, 천민인 그녀가 성녀가 된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자작부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역대 성녀들은 모두 다 귀족 가문들의 귀한 여식들이었다는 것을. 자작 부인은 그런 말을 하며 그녀가 진짜 성녀가 맞는지 가끔가다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고는 했다. 그녀의 부모의 직업을 물어보고 도축하는 푸줏간집 이라고 하자 마치 더러운 것을 들은 듯 얼굴을 흉하게 찡그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성녀라는 사실을 가장 의심하는건 비올렛 자신이었다.
왜 그렇게 해야 하지? 그녀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나일까. 그러나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이렇게 매질을 맞지 않고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 맛있는 식사를 먹고 예쁜 옷을 입으며 편히 잘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묻지 못했다. 아니, 그 근원적인 물음을 가슴속으로 파묻었다. 그것을 질문하는 것 자체가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러나 그 물음은, 언제나 존재해왔던 물음이었다. 그리고 100년만에 다시 하늘에 새겨지는 의문이기도 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