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후작님 외전 =========================================================================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는 법일세.”
라이셀 백작이 말했다. 그는 무척이나 피곤한 듯 이마에 머리를 짚고 있었다. 에르멘가르트 후작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아래 두개의 태양은 없다. 하지만 태양은 두개였으며, 태양이 될 수 없는 것이 태양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은 또 다른 태양을 보내주었다.
“신전에선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처음에만 시끄럽고 조용하군, 공작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어.”
라이셀 백작이 그렇게 말하며 은잔에 잔을 기울였다. 커튼사이로 희미한 햇볕이 스며들었다. 후작은 그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은잔과 대비되는 적포도주가 빛을 투과해 붉게 빛났다.
“교황측 에선 자네에게 어떤 접선시도도 없는가?”
라이셀 백작의 물음에 후작이 대답했다.
“아니, 전혀, 없다네.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야. 그렇게 요란스럽게 등장한 성녀에게 그 신전에선 달리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으려 하다니 말일세.”
“…….”
“알다시피 폐하는 이번 결정을 좋아하지 않고 계시네. 만약 그 천민출신 성녀가 유용한 패가 아니라면 폐하의 상심도 크시겠지.”
라이셀 백작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에르멘가르트 후작이 대답했다.
“유용한 패가 아니기에 침묵한다면 확실히 실망이 클법도 하군.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말일세, 너무나 유용한 패라 그쪽에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않을 수도 있다네. 패의 가치를 결정하는건 그들이니 말일세.”
“……그러길 바라야겠지.”
라이셀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에르멘가르트 후작역시 피곤함을 느꼈다. 며칠 사이 국왕은 예민함을 도를 넘어섰고 신전과의 기묘한 대치상태에 긴장하느라 며칠동안 잠을 못 이루는 듯 했다. 게다가 티게르난 공작은 성녀의 출현으로 급하게 이곳으로 온다는 전보를 보냈으나 다시 교황령에 머물렀다. 그것은 무슨 저의인가. 언제나 알 수 없는 기묘한 사람이었으나, 이번 결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도 교황의 명령인가. 아니면 그의 의지일까.
“폐하가 신전을 증오하시는 이유도 이해하네만 말일세, 이대로 가다간 선왕의 전례를 따를…….”
“말을 삼가시게.”
후작은 라이셀 백작의 말을 일갈했다. 그러나 라이셀 백작의 추측은 타당했다. 신전에게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다간 '그일'이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뿐이다. 아직도 암암리에 회자되는 그 일이 말이다. 성녀가 사라지고 신의 대리인 없던 100년간, 신전은 타락했다. 티게르난 공작이 움직이자 신전의 타락은 더욱 더 심해졌다. 신전 내의 엄격한 규율로 그것을 다스려야 마땅했으나 교황은 그것을 방관했다. 그들의 권한은 왕권을 위협할정도로 커졌다. 신관들의 만장일치로 교황의 자리에 올라 선 자, 왕을 무릎 꿇린 자, 교황 '린도'의 즉위 이래로 신전은 더욱 더 타락했고 이미 왕권과 신권의 충돌은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왕의 패배였다.
선왕은 왕궁에 기거하는 대신관을 쫓아내고, 수도안에 있는 신전을 수색하여 비리를 밝혀내어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신관의 서임권은 그가 가지고 있노라고 선언했하며 신전에도 세금을 부과하고자 했다. 아직 즉위한지 얼마 안된 교황이 꼬리를 내릴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백성들은 신전의 타락을 규탄하고 신음하고 있었다. 민심은 이미 신전에 돌아섰으므로 교황은 그것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황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다. 그는 왕을 말룸에 미혹된 자라고 선포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라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홍수가 일어나고 가뭄이 일어났으며 지진이 일어나고 때마침 역병이 돌았다. 그러나 신전에서는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린도가 기거하는 교황령은 그 어떤 재난으로부터도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그가 기거하는 성도는 은은한 빛이 나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했다. 수도조차 위태로운 그때, 교황은 신관들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다. 신전을 손가락질 하던 백성들은 손바닥 뒤집듯 교황을 찬양했다. 왕은 마귀에 현혹되었으며 왕의 동생이자 교황의 최측근인 티게르난 공작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소리까지 돌았다. 왕은 인내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을 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의 후계까지 위협을 당하는 입장에서 왕이 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후작은 아직도 기억했다. 아니, 모두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은 추운 겨울이었고, 그들이 입은 금속의 갑온은 차갑게 달아올랐다. 당시 왕자였던 현왕의 호위기사이자 벗으로서 현왕의 곁에 있었던 그는 그 굴욕의 시간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왕이, 태양이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아무리 신권이 강한 신성왕국이라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후작과, 그의 아버지도 참담한 심정에 눈물을 참아야 했다. 눈밭에서 교황이 기거하는 대신전에 교황의 사면을 구하던 그 모습을. 머리를 계단에 찧어 선왕의 이마에는 피가 흘렀고, 그의 권위를 상징하던 왕관은 그의 머리에서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그때 왕자로서 그의 옆에 서 있던 왕자, 현왕은 피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후작은 잠시동안 기억해 내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젊은 추기경의 모습을. 맨발로 서 있던 왕을 맞아들인것은 젊은 티게르난 공작이자, 추기경이었다. 그는 선왕의 동생이자 현왕의 숙부였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은 자신의 형을 신전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교황의 사면이 이루어졌다. 교황은 베일 속에 앉아 그저 손으로 지시하자 티게르난 공작이 그것을 읽었다. 비록 선왕의 동생이지만 아들뻘인 공작이었다. 스스로의 왕위를 포기하려 제발로 신전에 들어갔던 공작이었으나. 그가 이런 꿍꿍이었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으리라. 왕은 그의 동생과,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교황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선왕에게도, 현왕에게도 더 없는 굴욕일 것이다.
당시의 일은 차마 역사서에 새길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다. 선왕역시 그 일을 계기로 신전에게 저자세를 보였다. 참으로 우습게도, 그가 사면을 받자, 천재지변이 멎었다. 그는 시름시름 앓다 광증에 걸려 성에 남아있는 신을 향한 모든 성물들을 불태운 채 붕어하였다. 잔잔한 물과 같은 부드러운 성품이었던 선왕, 그러나 신전에게 무릎꿇어야 했던 그는 마지막에 신전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결국 그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린 그와 왕자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과연 무엇일지는 그도 몰랐다. 검은 그저 주인을 따르면 될 뿐이다. 그리고 그저 그의 명령을 받아들일 뿐.
“하늘아래의 태양은 두 개가 될 수 없다라.”
그것은 왕과 교황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교황과 성녀를 이르기도 했다. 성녀는 그런 존재였다. 왕에게도 교황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신의 사자로서 최고위의 지위를 갖는 교황과 신의 대리인이 동급이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를 성녀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패인가. 그렇게 생각해보아도 대신관들의 태도를 보자면 그러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성녀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마에 성흔이 있고 역사서에 나오는 은발에 낮의 하늘과 같은 색의 눈을 가진 소녀가 성녀인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절대 흉내낼 수 없다.
“아버지!”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며 복도에 있던 햇빛이 쏟아져 어두운 방 안까지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라이셀 백작에게 뛰어들어가 폭, 안겼다.
“아이구 우리 시스 왔구낭?!”
후작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딸만보면 저렇게 변모하는 얼굴을 어떻게 적응할 수 있단 말인가. 후작에게는 절대 무리였다. 자신은 절대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후작은 자신이 저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에 두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생글생글 웃으며 백작이 볼을 부비자 딸이 아빠 수염났잖아! 따가워 라고 말하며 백작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바로 앞에 일어난 패륜의 현장에 후작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묘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백작은 딸에게 뺨을 맞음에도 불구하고 볼에 뽀뽀하려고 했다.
“으앙 아빠 그만하란 말이야!”
그녀가 찡찡대자 백작은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로 시스를 내려놓았다. 여자아이가 후작을 보더니 깜찍하게 인사한다. 그는 잠시 동안 집 안의 여자아이가 그렇게 인사 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시수일레.”
그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생글생글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인다. 문득 후작은 머리에 손을 얹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츠리던 여린 존재를 떠올렸다. 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아빠 일 언제 끝나! 아빠 너무 배고프단 말이야.”
“후작님 가고 나서 같이 간식 먹자~ 요리사한테 크레이프 케이크 만들라고 해둘게.”
“진짜?”
“응~ 엄마한텐 비밀이다?”
“알았어, 아빠가 제일 좋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백작의 볼에 뽀뽀했다. 백작은 후작의 관점에선 다분히 바보같은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저런 얼굴을 보면 속이 불편했다. 그 누가 그가 이 나라의 재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언제나 저 남자는 참으로 알수없는 사람이었다. 딸을 안아든 그가 후작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집에 있는 태풍의 눈 말이야, 잘 지내고 있는건가?”
“…….”
후작은 어딘지 모르게 불쾌해져 왔다. 무엇일까, 저 의기양양한 얼굴은. 부럽지? 부럽지? 너도 받고싶지? 라는 시선은 언제나 봐도 구토를 유발했다.
“그때 내가 보냈던 크림빵 말이야, 잘 먹었냐 이말일세.”
“먹고 토했다네.”
“뭐?! 여자아이가 크림빵을 싫어해? 거 참 까다롭군.”
“……자네의 입맛이 생각보다 저질일지도 모르지.”
후작이 보기 드물게 얼굴을 찡그리며 독설을 내뱉었다. 호기심 어린 두 눈이 후작과 백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섬세하고, 예민하지, 언제나 도자기 인형 다루듯이 조심, 또 조심히 다뤄야한한다네. 그렇지 않으면 상처받아 깨져버리고 말지. 그건 천민이건 왕족이건 마찬가지야.”
“…….”
“쯧쯔, 남자 셋만 있는 그곳에서 성녀님도 버티시기 힘들겠구먼. 그렇지 시스?”
“성녀님이 그곳에 있어요?”
“그렇단다. 귀여운 우리 시스.”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떤 분이에요?”
“성녀님은 천민 출신이라서 시스가 보고 싶지 않아할지도 몰라.”
“아니에요, 성녀님은 그 자체로 고귀하신 걸요. 천민이 뭐가 나빠요?”
분명 어린 말이었지만 백작은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운 듯 그녀의 뺨에 다시 뽀뽀했다. 그녀가 으윽, 하며 그를 밀어냈다. 수염 싫단 말이야! 그렇게 떽떽거리자 백작은 그 얼굴에 허걱, 하며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후작은 그 얼굴을 한대 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그의 집에 있는 태풍의 눈이 떠올랐다. 그가 물었다.
“시수일레, 여자아이들은 무엇을 가장 좋아하지?”
후작의 말에 시수일레가 깜찍하게 눈을 두세번 깜빡이더니 말했다.
“그거야 물론 예쁜 옷들과 귀여운 인형 같은 것들이죠!”
그 말에 후작은 고민하는 표정을 했다. 예쁜 옷들과 인형이라. 그래, 생각해보면 여자아이가 좋아하는것은 이렇게나 단순한데, 이런 것은 신경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여동생 역시 어렸을 적 그것을 퍽이나 좋아했더랬다. 물론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라이셀 백작이 속으로 폭소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후작은 그 길로 밖으로 나가 집사를 불러 드레스를 사게 만들었다. 크림빵 따위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다.
이런 것도 아내가 있다면 해 주었을 텐데, 라는 씁쓸함이 남았다. 아마 천사같던 아내는 저 소녀를 감싸안아주고 신경써주지 못한 부분을 신경 썼으리라. 이스킨데르 자작 부인이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그 드레스가 불러올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에 봅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