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움트는 새싹 =========================================================================
“내, 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녀가 겁에 질려 말했다. 물론 치마를 걷어올릴때 그러했듯, 에셀먼드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도 이러지는 않았다. 세상에, 자신이 귀족 도련님에게 안겼다. 너무나 황송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첫째라니.누군가에게 안긴 것은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안긴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녀는 매를 맞았을 때보다 더욱 더 겁에 질려 훌쩍이며 말했다.
“자, 잘못했어요. 제발, 제가 다 잘할게요. 제가 어떻게 도련님한테 안길수가 있어요. 제발 내려주세요!”
그녀가 애원하자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에셀먼드가 품에 안은 그녀를 내려보며 말했다. 검청색 눈동자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서려있었다. 비올렛은 설마 그녀가 첫째 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아닌지 무서웠다.
“오라비가 여동생을 안고 가는 게 이상한 겁니까?”
“…….”
그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당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그의 '여동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저 무서운 도련님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그녀의 의견을 일절 무시한채 걸었다. 더이상 저항할 힘도 잃어버린 비올렛은 그저 빨리 그가 걸음을 옮기기를 바랐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조그맣고 깡마른 어깨를 단단히 잡았으나 계단을 내려가 몸이 살짝 흔들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에게 당황해서 그녀가 얼른 팔을 풀려고 하자 그는 그대로 두라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허리를 받치는 팔의 느낌이 났다. 그의 목을 끌어안아 바로 귀에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어깨너머로 그녀가 있었던 예배당이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
“오셨습니까?”
“성녀님의 전속시녀인 핀을 불러와라. 나는 성녀님을 방에 모시겠다.”
귀에 들리는 음성은 그녀가 들었던 그의 음성중에 가장 차가운 음성이었다. 집사의 얼굴을 보니 그는 무척이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수군대며 그 둘을 바라보는 하녀를 보니 그저 보통일이 아니겠구나, 하며 짐작할 뿐이었다.
방문이 열리며 그는 그녀를 테이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는 맞은 편에 앉아 드러난 그녀의 하얀 종아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자꾸 다리를 쳐다보는 건가. 비올렛은 부끄러워 고개를 둘 수 없었다. 그러다가 설마, 이렇게 멍청한 애는 처음 봤다며 혼내려는 걸까, 어쩌면 화를 내며 저녁을 굶기라고 명령하거나, 직접 매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런저런 안좋은 생각을 하며 중대한 고민에 빠져잇을 때 이윽고 핀과 집사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아버님은 이 일을 아시는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의 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무슨 일이라니, 그녀가 얼굴을 들어 집사와 핀을 보자 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왜그러지? 뭔가가 잘못된건가? 그녀는 그제야 지금 그녀가 '혼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다리 종아리의 상처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 다 경악의 시선으로 그녀의 종아리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종아리를 내려보았다. 그저 흔하디 흔한, 매질을 당한 종아리였다. 이게 그렇게나 신기한 것일까? 종아리를 바라보며 겁에 질린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에셀먼드가 하, 하고 실소했다.
“도련님, 도대체 누가. 핀, 너는 성녀님을 모시는 시녀가 아니냐, 이걸 알고 있었던 것이냐?”
그 말에 핀은 도리질을 쳤다.
“저, 전혀 모르고있었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옷시중과 목욕시중을 격렬하게 거부하셨으니까요.”
그녀는 덜덜 떨었다. 애처로운 그녀의 모습은 비올렛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를 닮은 그녀가 저렇게 덜덜 떠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에셀먼드는 그것을 무감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성녀님.”
핀의 말에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열린 문 틈새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에이든이었다.
“형, 이게 무슨일이야? 왜이렇게 소란스러워?”
그는 주변을 한가하게 돌아다니다 이야기를 듣고 온 듯 했다. 그러다가 그가 그녀의 다리에 시선이 갔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 뭐냐 천민! 너 그거 어디서 맞은거야!”
“에이든, 한번만 더 그렇게 무례하게 성녀님을 부르다간 내가 친히 널 단련시키겠다.”
“흡!”
차가운 일갈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너는 전속 시녀임에도 그녀를 방치했다. 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남에도 모르고 있었다. 목욕 시중도 들지 않았고 의복 시중도 들지 않았다.”
“…….”
“나는 네 태만의 죄를 물을 것인가 아니면 방관의 죄를 물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도, 도련님!”
핀이 겁에 질렸다. 비올렛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 그녀는 다리의 상처가 문제라는 것을 알았고, 저 도련님이 화가 나자 사람들이 쩔쩔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이렇게 무서운 사람은 처음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봐왔던 사람중에 가장 차분하고 정돈된 사람이었고 화를 내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지만. 그 분노가 서린 음성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선뜩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두가 다 긴장해서 그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에이든 역시 굳은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시중을 드는 자가 이것을 못보고 넘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모른다면 사용인으로서의 그 자질을 의심받아야 마땅하지.”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올렛은 드디어 그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 줄 알았다. 죽인다, 살린다하며 길길이 날뛰는 망나니 도련님들도 있었지만, 그저 이렇게 말 한마디로도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니에요, 도련님 핀을 벌하지 마세요!”
그녀가 다리를 절뚝이며 그에게 걸어가 소리쳤다. 에셀먼드의 청색 눈동자가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의 걸음걸이를 보았다. 아무래도 역효과인듯 했다. 어 어떡하지, 뭔가가 잘못됐어. 그녀가 겁에 질려 말했다.
“피, 핀은 아무잘못이 없어요. 그냥 제가 숨겼어요, 정말이에요. 부디 핀을 벌하지 마세요!”
그녀의 어조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비올렛이 애처롭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언제나 처럼 무표정이었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깊은 시선을 그녀는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가 집사에게 말했다.
“클래하들. 그녀에게 그동안 일했던 급료의 세배를 챙겨줘라. 그리고 퇴직금도.”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그녀는 덜덜 떨었다.
“도, 도련님!”
그녀가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아, 안돼 핀이 떠나다니. 핀은 친절했다.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하지? 후작님께 부탁해봐야 하나? 어떻게하면 좋담? 그녀가 쫓겨나버린다.
“저는 도련님이 아니라 당신의 오라비입니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리고 이 저택의 모든 권한을 맡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집사에게 무엇이라고 지시하며 그녀를 한번 훑어본 후 나갔다. 핀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멍하게 핀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핀. 정말 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가려 걸음을 옮기자 핀이 고개를 돌렸다. 핀은 그녀가 처음으로 보는 낯선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핀은 소름끼칠정도로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 시선은 비올렛이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온 시선이었다. 경멸어린 시선. 그동안 알고 있던 핀의 얼굴과는 달랐다.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아니겠지, 핀이 화가 나서 그런걸 거야. 집사가 핀을 끌고 나갔다. 핀은 끝까지 그녀를 쏘아보았다. 방에는 훌쩍이고 있는 그녀와 충격을 받은 에이든 만이 남았다. 하지만 너무 충격을 받아 그녀는 소리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야, 야, 울지마!”
핀이 자기 때문에 여기서 쫓겨났다. 에셀먼드가 쫓아내버렸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잘못은 다 그녀에게 있었다. 그래도 핀이 있어서 안심 할 수 있었는데, 저 첫째 도련님이, 귀족 나으리가 핀을 빼앗아 가버렸다.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그랬다. 에이든이 그녀를 달래주었으나 그녀의 울음은 쉬이 그칠 줄 몰랐다.
“진짜 싫어 으아아앙!”
“야, 야. 이런 젠장, 왜 다들 나가서는.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 진짜!”
그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젠 다 몰라, 그녀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우는 것도 이렇게 천박하게 우는게 아니라 손으로 가리며 눈물을 흘려야 함이 옳았으나, 지금 비올렛에게는 아무것도 생각나는게 없었다. 지금 옆에 있는게 그 두려워하던 셋째 도련님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다 싫어 다 싫어!”
에이든이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숨을 들이마쉬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내, 내가 아버지께 말해볼께, 그러니까 울지 마라, 응?”
“흑 흑흑.. 진짜에요?”
눈물을 쏟아내며 올려다 보자 에이든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비올렛도 에이든도 똑같이 필사적인 마음이었다.
“그, 그래, 아버지에게 말하면 될거야!”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자기만 믿으라고 가슴을 팡팡 치는 소년을 보고 그녀는 부탁한다고 말했던 것도 같다. 그는 서투르지만 다정하게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핀은 그 다음날에 저택에서 사라졌으며 아침을 여는 것은 낯선 시녀였다. 한 낯선 시녀는 다정하게 그녀를 깨웠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가씨’라는 호칭에 사실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녀는 언니 또래였는데 핀과는 다른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기껏해야 그녀보다 서너살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를 보고 비올렛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핀은요?”
그 말에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후작님도 많이 화를 내셨어요, 아무래도 그 여자가 돌아오진 못할 거에요. 그녀는 오늘 아침에 떠났답니다.”
어딘지 모르게 ‘그 여자’라는 말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포함된 것 같으나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고였다.
“오, 아가씨. 저는 아가씨가 절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 믿어요.”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비올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이름은 앤이에요.”
“네.”
“어허, 아가씨. 아가씨는 하녀에게 존대를 쓰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저보다 더 나이가 많잖아요.”
그녀의 말에 앤이 피식 웃었다. 귀여워 죽겠다는 애정이 담긴 미소였으나 비올렛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시무룩 했다. 핀이 보고싶었다.
“그래요? 그렇게 불편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앤이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저는 아가씨랑 친해지고 싶은데, 아가씨는 저랑 친해지고 싶지 않으세요?”
그 말에 그녀의 하늘을 담은 투명한 눈이 앤을 올려다 보았다. 앤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같이 친해져 봐요. 상냥한 아가씨.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불안하고, 두려웠다. 앤의 따스한 말은 그녀를 안심시켜 주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그 마음은 와 닿았다.
============================ 작품 후기 ============================
다음편 또 올라와용! 아차 제가 미래의 비올렛 커미션이 뜰 어디 올렸는지 밝히지 않았는데
'일상을 트위터처럼' 이라는 란이 있답니다. 표지 원본과 또다른 커미션 일러스트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