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움트는 새싹 =========================================================================
에이든을 멀리한 비올렛은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 치마자락이 다리로 자꾸 엉겨붙어 부어오른 다리를 쓸어 아팠지만 가장 힘든 것은 종아리에 열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럴 때 그녀의 그 잘난 성력이 발휘되면 좋으련만 항상 원할때는 나오지 않았다. 성력이 있긴 있는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신이 주신 능력이라는 것은 참으로 변덕스러워 어떨때 종아리의 상처는 깨끗하게 싹 낫기도 했고 어떨때는 고통속에 그녀를 방치하곤 했다. 지금은 고통속에 방치되고 있다.
그녀는 아픔의 신음소리를 흘렸다. 사실 견딜만한 매질이었으나 요사이 별로 맞지를 않다보니 이런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비올렛은 나중에 자신에게 더 큰 고통이 느껴오면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야. 그녀는 자신에게 되뇌고 또 되뇌었다.
다니엘이 보고 싶었다. 다니엘은 분명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격려해 줄 것이다. 그는 가끔 시간이 나면 비올렛의 공부를 봐주고는 했다.그래도 다니엘이 있어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오늘도 책을 보고 있을까? 사실 그의 방을 알고는 있으나 찾아가긴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저 책을 읽고 난 후 그가 찌뿌둥한 몸을 움직일겸 이곳에 바람을 쐬길 바랐다. 그때 새가 그녀에게 다가가 짹짹 울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그곳을 보았다. 사실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것도 치유력 처럼 잠깐잠깐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쩔때는 그저 짹짹거리는 소리가 사람의 목소리로 들리기도 했고 어쩔 때는 그저 새울음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식물들이 어떤걸 바라는지 어렴풋이 아는 것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였다. 성력은 이상한데에만 발휘되었다. 차라리 다리를 치료해주지. 그녀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난 너무예뻐 세상에서 너무 멋져,남자가 봐도 반하겠어! 짹짹!”
봄이 오면 새들은 봄이 왔다는 걸 기뻐한다고들 말한다. 저녁 해가 질 때면 새들은 쓸쓸함을 노래하고는 한다고 한다. 까마귀들은 죽음을 노래한다고 하고, 독수리는 전쟁의 피울음을 운다고들 한다. 이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시각인가.
“아름다운 짹짹이여 내 알을 낳아주오!”
그러나 대개 새들의 노래는 이런것이었다. 비올렛은 성녀의 능력중에 쓸모 없는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알을 낳아줘, 이리와! 어디있어! 등등의 말을 새들에게서 듣는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조용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예배당이 보였다. 이곳 아그레시아 귀족들은 예배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었다. 이곳의 예배당은 저택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계단으로 걷기는 조금 불편했다. 예전에는 무서워서 못돌아 다녔지만 이젠 어느정도 익숙해 졌다.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불쑥 나타난 그림자에 깜짝 놀라, 새된 비명을 지르며 넘어진 것은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넘어져 굴렀던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멍든 다리가 너무 아팠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죄, 죄송해요.”
오늘도 또 혼날지도 모르겠어.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인가봐.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며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예배당에서 나온 것은 에셀먼드였다. 그는 무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에셀먼드는 그때 식사 이후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사실 마주치지 않았다기 보다는 에셀먼드는 기사단 일로 바빴고, 아침 일찍 나가 저녁에 들어왔기 때문에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셀먼드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말이 없는 것도 한몫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녀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탓이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손을 내민다. 저번에도 잡았던 손이었지만 별로 잡고싶지는 않았다. 그저 부끄러움에 일어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를 다치신겁니까?”
그가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의 상태를 보고 있다. 붉은 노을이 비치는 소년의 모습이 너무나 가까워 그녀는 도망가고 싶었다. 언제나 첫째 도련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꼴만 보인다.
“말씀하십시오. 다리를 삔겁니까?”
그 어조는 피곤하다는 기색마저 배어있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뿐이었다. 매를 맞아서 아프다는걸 알았다가는 또 비웃음을 살지도 몰랐다. 아니면 또 꾸지람을 듣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면 또, 후작님한테 말해서 저런 아이는 당장 쫓아내야 한다고 할지도 몰랐다. 저 첫째 도련님은 언제나 어려운 사람이었고, 어떤 행동을 할지 전혀 예상 할 수 없었다. 에이든은 그녀를 괴롭혔고, 다니엘은 친절했지만 스쳐지나가듯 보는 그는 언제나 무표정했고 사용인들은 그를 좋아하거나 그를 무서워 하거나 둘중 하나였다.
그냥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에셀먼드는 그녀의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듯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녀의 치마자락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시, 싫어요!”
어쩌면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이후로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또한 처음으로 이곳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격렬한 거부일지도 몰랐다. 세상에, 치마자락을 올리다니 세상에!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다. 그녀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치마자락을 내리려 하자 에셀먼드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아, 화나게 했을지도 몰라 어떡하지. 그러나 한심하다는 시선 대신에는 관찰하는 듯 그녀를 훑어보았다. 겁을 먹은 그녀의 얼굴을 본 에셀먼드가 말했다.
“그저 상처만 보려는 겁니다.”
퍽이나 다정한 배려였다. 그 격렬한 반응에도 그는 냉정하게 말하며 스커트 양말 아래에 비단 양말을 벗겨냈다. 아마 그가 보고싶은것은 맨발인 듯 했다. 양말을 벗겨내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수치스러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저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세상에, 모르는 남자가 내 치마를 걷었어! 라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는 순진한 소녀의 얼굴은 에셀먼드의 눈에 여과없이 들어왔다.
“이 상처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비올렛이 아, 맞다. 종아리 상처가 있었구나. 그제야 종아리가 부풀어 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종아리의 상처를 본다면 알수 있었다. 비올렛은 그의 표정이 찡그려진 것도 이해가 갔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예법을 못배워 이렇게 회초리를 많이 받는 여자아이라니. 자작 부인의 말대로 정말 귀족답지가 않았다. 게다가 상처가 주는 혐오감도 있었다. 이런 혹독한 매질이 가해질때 그녀의 여린 살결은 부풀어오르기도 하고, 한번씩은 터지기도 했던 것이다. 로즈나 리나도 이런 상처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으니, 그녀는 그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물었다.
“왜 아까부터 제게 죄송하다고 합니까?”
그 물음에 서린 명백한 짜증의 기색에 그녀는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또 숙이는 바람에 그의 얼굴을 차마 보지는 못했으나 아마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긴 침묵에 견디지 못한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 에셀먼드의 얼굴을 보자 그는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겁에질려 떠듬떠듬 자신의 잘못을 말했다.
“제, 제가 사실 들어와선 안되는 곳에 들어왔는데 들어와서요. 아까 죄송하다고 한 것은 귀족의 예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한심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죄송하다고 한 것이고, 두번째로 죄송하다는 것은 후작님께서 저를 거두어 주셨는데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렇게 매를 맞았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제가 못했다는 거니까요.”
그녀의 어조는 어느새 울음이 섞여 있었다. 차라리 자백을 하니 시원했다. 그녀는 에셀먼드가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이스킨데르 자작 부인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혐오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겠지. 눈물이 뚝뚝 떨어트리던 그가 말한다.
“제가 보기에는.”
그가 한숨을 쉰다.
“그 옷은 아직 성녀님이 입을만한 옷이 아닙니다.”
그 말에 그녀는 다시금 절망한다. 자작 부인도, 에이든도 그리고 저 첫째 도련님도 그 소리를 말했다.
“앞으로 핀에게 말해 옷은 나중에 입는 걸로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알고는 있다. 드레스를 입어 조금 들떴던 마음이 축 늘어졌다. 드레스를 입는것도,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그녀의 전속 시녀인 ‘핀’을 그가 기억하고 있는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똑똑한 귀족 도련님이 기억력이 매우 좋으신 거라 생각하여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첫째 도련님은 그저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울면 또 운다고 뭐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애써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그 상처에 정도 걷는건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여기까지 온 겁니까?”
그가 물었다. 따지는 듯한 물음에 그녀는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다니엘 오빠를 보고 싶어서요.”
“…….”
“묻겠는데 다니엘에게는 이 이야기를 했습니까?”
무슨 의도로 물어본 것인지는 몰랐으나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 이야기'가 자작 부인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혼을 냈다는 것인줄 알았지, 자작 부인의 회초리 질이라는 것을 말하는 줄은 몰랐다. 그 대답에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자신의 몸이 쑥 하고 들어올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꺅!”
지면과 떨어지자 그녀가 비명소리를 냈다. 어느 새 그는 에셀먼드에게 안겨 있었다. 드레스가 무척이나 무겁고 그녀 역시 가볍지 않을텐데도 그는 거뜬히 그녀를 들었다.
============================ 작품 후기 ============================
12시에 봬용! 저도 사실 답답함... 근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어떻게 보면 뇌가 텅텅 빈 여자아이가 이런곳에서 갑자기 규율에 얽매여 무언가를 해야하다니..ㅠ.ㅠ 사실 평범한 여자애가, 그것도 매만 맞아왔던 여자애는 자기에게 처한 불합리함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겠쪄.. ㅠ.ㅠ 참고로 우리 비올렛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뜰에 커미션 맡긴 일러스트 보면 나와있어여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