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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10화 (10/208)

00010  움트는 새싹  =========================================================================

“핀, 둘째 도련님, 아니 둘째 오라버니는 어떤 분이신가요?”

방에 돌아와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는 핀에게 물어보자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어머, 다니엘 도련님을 만나셨나요?”

“네, 셋째 도려, 아니 오라버니도 뵈었어요.”

“그렇군요. 어때요, 참 친절하신 분이죠?”

“네.”

그녀가 말하자 핀이 작게 미소짓는 듯 머리에 닿는 손 끝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주인 마님을 가장 많이 닮으신 분이세요, 가장 온화하시고 사려깊으시죠. 만약 다니엘 도련님이 계시지 않으셨다면 말썽쟁이 에이드리언 도련님은 과연 누가 돌보셨을지, 아마 막내 도련님은 지금보다 더욱 더 천방지축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래요?”

비올렛은 그녀의 뒤에 숨어있던 에이든을 찾아내 능숙하게 보내버리는 다니엘의 모습을 회상했다. 확실히 에이든은 그를 무서워했다. 방긋방긋 웃는 미소 어디에 무서운 게 있나 했지만

“공부도 곧잘 잘하셔서 수재소리를 듣고는 하신답니다. 나라에서 큰 일을 하실분이에요. 그분께서는 벌써 성인이 학습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섰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를 동생이라고 해주었다. 오빠라니 어쩐지 뿌듯함이 밀려들어왔다.

“성녀님이 드디어 집에 관심이 생기신 모양이군요. 역시 둘째 도련님이시라니까요.”

관심이 없던게 아니라 감히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또 한소리를 들을게 뻔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남자에 대해 물었다.

“그럼 첫째 도련님은요?”

실수다, 결국 도련님이라고 말해버렸다.

“성녀님도 참. 도련님이 아니라 오라버니죠.”

하지만 그 사람은 도저히 오라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지금 그때 이후로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따스한말은 커녕 악의적인 말조차 주고받은 적 없는 사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오라버니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에드, 그러니까 에셀먼드 도련님은 가장 후작님을 닮으신 분이에요.”

“후작님을요?”

“성녀님, 에르멘가르트 가문이 왕을 지키는 검, 대장군을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계자시잖아요. 왕을 지키는 검은 절대 첫째라고 해서 후계자가 될 수 없어요. 하지만 열 세 살때 도련님은 이미 후계자로서 인정을 받고 교육받아 이번 해에 무려 왕실 제 1기사단에 입단하셨답니다.”

“제 1기사단이요?”

“네, 겨우 열 다섯 살에, 그것도 정예만 모이는 1기사단이라뇨, 참 대단하죠?”

어쩐지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 같아서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의 자식이라도 자랑 하듯 핀은 첫째 도련님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학력 역시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며 과묵한 편이지만 친절한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면서 까지. 글쎄, 그가 친절한건가. 그녀는 고민해봤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첫째 도련님의 얼굴이란 그저 후작을 닮은 어린 소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뚝뚝한 표정과 고저없는 차가운 말투. 어딜 봐서 그게 친절한것인가. 그녀는 고민했다.

*

비올렛은 자신 앞에 놓여진 드레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쁜 드레스들이었다. 분명 어렸던 그녀가 꿈꿔왔던 알록 달록 예쁜 옷들이었다. 마을에 살았을 당시 가장 부자였던 세라도 이정도의 옷들은 입지 못했다. 다들 하나같이 얼마나 눈이 부셨던지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며 차마 손을 들어 만져보지도 못했다.

“봐요, 후작님께서 사주셨어요.”

이게 내거라고? 그녀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며 핀을 올려다 보았다.

“정말 제 거에요?”

“네, 물론이죠. 국왕폐하를 알현하러 갔을때도 입으셨잖아요?”

핀은 그렇게 말하며 입어 볼까요? 라고 속삭였다.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을 알현하러 갔을 때는 그녀는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한순간에 달라져 버린 환경과 불안함에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어떤 옷인지도 모른 채 멍하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했다.

핀이 골라준 연노랑 드레스의 프릴이 앙증맞았다. 비올렛은 그것을 입고 거울을 보았다. 드레스는 분명히 예뻤다. 그녀가 꿈꾸던 화려한 드레스 였다. 하지만 스커트는 너무 길어 거추장스러웠다. 보기엔 어여뻤지만 막상 입으니 숨이 막히게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아직 코르셋을 입지는 않았지만 튼튼한 선이 그녀의 다 자라지 않은 몸을 억지로 성숙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입고 있던것은 언제나 편한 홈 드레스 정도였고 진짜 드레스를 입으니 숨이 막혀 헉헉 거렸다. 원래 어색해서 핀의 수발을 거절하고 항상 혼자 옷을 입었던 비올렛이었으나 핀이 중간에 들어와 마무리를 해 주어야 할 정도였다.

“와, 성녀님 정말 예쁘네요.”

과연 그럴까요? 비올렛은 우울하게 생각했다. 후작님은 왜 이런 것을 사주셨을까. 이런 것을 여러 벌 사준 것을 보니 그녀는 부담스러워졌다. 어떻게 귀족 아가씨들은 저런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그녀는 이것을 선물해 준 후작에게 생각이 미쳤다. 아마도 저 드레스를 입을 정도로 더욱더 성장하라는 소리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자작 부인이 오실 시간이네요. 차를 내오도록 할게요.”

핀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갔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의자에 앉아 그 드레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스 옆에 위치한 화려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있는 그녀는 아직도 낯설었다.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거울 속에 위치한 소녀의 눈 역시 깜빡였다. 다른 생김새의 소녀는, 마치 정말로 귀족의 아가씨와 같았다. 방금 이 드레스를 보았을 때는 기뻤다. 하지만 이젠 언제나 저런 옷을 입어야만 한다는 것이 암담했다. 드레스를 입는다고 정말로 귀족이 되는 건 아닐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며 자작 부인이 들어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엄하디 엄한 자작 부인을 보았다. 언제나 차가운 자작 부인이고 그녀에게는 깍듯했지만 자작 부인은 잠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금 무엇을 입고 있는거죠?”

자작 부인이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비올렛은 그 말투에 서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날이 선 목소리였다.

“후작님께서 주셨어요.”

이제 그녀는 겨우 겨우 자작 부인의 목소리에 대답할 수 있었다. 자작 부인이 알려준대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아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음에도 부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주름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후작님께서 이것을 왜 주셨는지는 아시고 계시겠지요?”

“더욱 더 열심히 하라고 주신 것 같아요.”

“네 맞습니다. 그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시니 다행이군요.”

이스킨데르 자작부인이 말했다. 자작부인은 걸려진 드레스에 다가갔다. 자작 부인은 잠시 감탄사를 내다가 그 주인이 성녀라는 것을 알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작 부인은 비올렛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심술궂은 그녀였으나 이번에는 왜인지 모르게 화가 난 것 같았다.

“걸음걸이 연습을 다시 해보죠.”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또박 또박 시선은 정면을 향하며 허리는 활짝 턱은 살짝 치켜들며. 그렇지만 그것은 자작 부인의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그만, 그만!”

그 짜증스러운 얼굴 표정에 비올렛은 덜컥 겁을 먹었다. 그녀가 회초리를 들고 왔다.

“종아리를 걷으십시오.”

그녀는 종아리를 걷었다. 하얀 종아리는 언젠가 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붉은 자욱이 새겨졌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새로운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자작 부인은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자작 부인은 조금만 틈이 보이면 그녀의 종아리를 때려왔었고, 그녀는 그 매질을 묵묵히 감내해왔다. 사실 그녀가 나아진 것도 그녀의 매질때문이었다. 언제나 넌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말을 듣고 자란 비올렛은 그 매질이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오히려 회초리를 맞자 안심할 정도였다. '매'라는 것이 귀족들에게도 있다니 말이다. 물론 이쪽은 회초리였으니.

“천한 핏줄이라 하여 배움의 속도가 미진한 줄은 예상하였으나 이리도 느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말에 비올렛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은 식사 예절부터 다시 연습 해보죠.”

정말로 자작 부인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가 겁에 질려 자작부인을 보았다. 자작 부인은 그저 못마땅한 듯 그녀를 노려 볼 뿐이었다. 하녀들이 준비했던 약식 식사가 나왔다. 자작 부인의 눈엔 불덩이가 담겨 있는 듯 했다. 손을 달달 떨어 시키는 대로 한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자작 부인이 쨍그랑 소리가 나게 신경질적으로 나이프를 내려 놓았다. 비올렛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몇번이나 말해야겠습니까!”

자작부인이 소리치자 그녀가 그 소리에 놀라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자작 부인의 눈에 여과없이 들어왔다.

“치마를 걷으십시오!”

그녀는 조용히 의자에서 내려와 치마를 걷었다. 그날 따라 매질의 강도가 조금 세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매질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으며, 꽃의 거리에서 고트 할망구에게 맞았던 것 보다는 약하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종아리는 퉁퉁 부어올라 피가 터져 있었다.

“후작님께 체벌하였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녀는 후작을 실망시켰다는 죄책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를 거둬준 사람이다. 저렇게 예쁜 옷을 선물해 주었는데도 또 오늘 몇번이고 회초리를 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저번처럼 한숨을 쉬고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눈물을 훌쩍이고 싶었으나 그렇다면 또 운다고 혼이날 것을 알았다. 어느샌가 그녀에게서는 예법 선생인 자작 부인과 포주인 고트 할망구의 경계가 모호해진지 오래였다.

“지금 입고 계신 드레스가 성녀님께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무말도 못하는 그녀에게 자작 부인이 말했다.

“언제나 처럼 아랫것들에게 창피하니 그 상처는 보여주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 고개를 끄덕이는건 예법에 어긋납니다. 아랫사람에게나 하는 것이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자작 부인.”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자작부인이 가고 난 뒤 그녀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며 침대에 앉았다. 부어오른 다리가 아팠다. 후작님은 이걸 아시고 계시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다니엘은 언제나 친절하게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창피해서 매를 맞았다는 말은 못했지만 언제나 너는 나아지고 있노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문득 그 따스함이 그리웠다. 사실은 그 역시도 귀족이라 역시나 그를 대하는것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핀 다음으로 가장 위안이 되어주었다.

어느 순간 부터 며칠째 계속되는 회초리 질에 사실 걸어다니기가 힘들긴 했으나 예전에는 이것보다 더 심한 매질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녔다. 핀은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인지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바깥에 나갔다. 다니엘을 보고 싶었다.

해가지는 저녁 바람이 후작 가에 불어왔다. 조금 나가다 보니 이쪽을 기웃거리던 에이든이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오다가 그녀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훑어보았다. 사실 비올렛의 성격이라면 진작 날쌔게 도망갔을테지만 에이든은 재빨랐고 드레스는 너무 무거워 그녀는 도망칠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야, 천민!”

에이든이 그녀 옆을 알짱 거렸다.

“오늘은 어울리지도 않게 드레스를 입었네?”

그는 쓱쓱 거리며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언제나 느꼈지만 천민이라는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그녀는 정말 천한 핏줄이기에 이렇게 열등한 것일까. 자작 부인의 말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에이든의 말도.

“어울리지 않은거 알아.”

“어?”

처음으로 그녀가 한 말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에이든이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약간 어설픈 걸음 걸이로 사라졌다.

“쳇, 뭐야. 걸음걸이도 이상한게.”

에이든이 짜증을 내었다. 그러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라질 줄 몰랐다.

============================ 작품 후기 ============================

다다음편 즈음에는 우리의 후작님 외전도 나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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