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움트는 새싹 =========================================================================
이스킨데르 자작 부인은 정말로 점심이 지나서 왔다. 그 시간까지 비올렛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서 불편한 속으로 끙끙 앓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한 눈에 보기에 엄격해 보이는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신, 아델라 이스킨데르라고 합니다.”
자작 부인은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살짝 꿇음으로서 예를 취했고, 그녀는 그것을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은 너무도 우아했다. 그녀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말했다.
“성녀님, 성녀님 앞에 제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해야 하는 걸까요?”
“네, 네?”
그녀가 눈을 크게떴다.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랫 사람은 평생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일어나란 말이 없이 일어나는 것은 결례입니다.”
“…….”
“여지껏 그런 말도 하지 않고 에르멘가르트 후작 가 분들게 결례를 범하게 했답니까?”
자작부인의 서슬퍼런 말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죄송해요, 라고 작게 말했다. 자작 부인의 갈색 눈이 노기를 띄었다. 아무래도 팔푼이인 그녀는 또 다른 이의 심기를 거슬렀나보다.
“죄송해요. 라고 말한다면 비굴해 보일 뿐입니다. 지금 죄송하다는 말은 몇 번이나 하셨는지요? 출신이 비천하다고 해 그것을 내 보이면 더더욱 약점이 됩니다.”
자작 부인의 호통 아닌 호통에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비올렛에게 준비할 틈도 주지 않은 그녀는 다짜고짜 비올렛의 몸가짐 하나하나를 지적했다. 또한 틈만나면 움츠러 드는 몸을 지적하며 허리부터 펴게 했다. 이스킨데르 자작부인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비올렛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못난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작 부인이 그녀를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가 한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손은 또 어찌하여 다치신 겁니까.”
“제. 제가 그릇을 깨서 치우려다 다쳤어요.”
그녀의 말에 자작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작 부인은 이 상황이 대단히 합리적이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엄한 눈으로 비올렛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손은 일부러 치료하지 않는 겁니까? 모든 사람들게 보이려고?”
“네?”
그녀가 물어보자 자작부인이 말했다.
“‘실례지만,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라고 물으세요. 그리고 치료할 능력이 있는데 치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관심을 받고 싶은 것입니까?”
자작 부인의 말에 그녀의 입이 다물려졌다.
“어떻게 치료하는지를 몰라서…….”
옅은 한숨 소리가 비올렛의 귀에 들려왔다. 자작 부인은 그녀가 후작 가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 위해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힘든 수업이 끝나고 이스킨데르 자작부인이 애써 화를 삭히고 돌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것도, 표정 짓는것도 모든 것을 주의해야 했다. 해가 벌써 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픈 손을 보았다. 얼굴을 찌푸려 끄응, 하고 손에 힘을 주었으나 손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과연 무슨 능력이 있다는걸까. 정말로 자기 의도대로 되는게 아닌데. 핀의 말에 따르면 엄청나게 대단한 어떤 능력을 보여주었으니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정작 그녀는 그녀의 능력이 의심스러웠다.
핀이 시간에 맞춰 간식거리들을 들고왔다. 생과일이 섞인 크림 케이크에 달달한 과일 쥬스가 나오자 그녀는 활짝 웃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아, 이제 먹는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어설프게나마 자작부인이 말했던 대로 먹기 시작했다. 케이크는 환상적일 정도로 달콤했다. 당장이라도 마음껏 먹고싶었지만 그녀는 작은 포크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먹어야 했다.
“핀.”
“말씀하세요 성녀님.”
따스한 갈색눈이 그녀를 보았다.
“만약 내가 완벽하게 예의범절을 익힌다면 다른 도련님들과 후작님과 식사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핀이 웃었다.
“그럼,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전혀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걸 다 고쳐야 해요. 걸음걸이, 먹는법, 말하는 법, 심지어는 생각하는 것 까지도요.”
“네,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바뀐 나는 비올렛일까요?”
그녀가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맑은 하늘빛 눈이 의구심을 띄었다. 그들의 품격은 부럽지만 한편으로는 두렵다. 다른세상에 올라왔다. 달라져야 했다. 그렇게 달라지면 그녀는 비올렛일까. 부모님이 아는 비올렛은 요조숙녀가 아니었다. 리나와 로즈가 아는 비올렛 역시 그러했다. 행동을 바꾸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라고 한다. 귀족 나으리들에게 벌벌 떨었던 천하디 천한 소녀에서, 고귀한 성녀로.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바뀌면 그녀는 비올렛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변화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소리 하시면 안돼요 성녀님.”
“…….”
그 말에 담긴 힐난에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의구심이었고, 그 의구심은 너무도 쉽게 묻혀버렸다. 아직 함께하지 않았지만 핀은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존재일 뿐, 근본적으로는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지겹도록 익숙한 두 눈들, 자작 부인도 핀도 똑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바꾸라면서도 그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어린 비올렛은 그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그녀는 그것을 말로 설명할 정도로 생각과 언변이 발달하지 못했다.
*
후작가의 저택은 그녀에게 있어서 궁전처럼 넓었다. 물론 궁전에는 이런 저택이 몇채는 합처진 것같은 어마어마한 넓이었지만 우선 이 저택만 해도 커다란 거대한 본채가 있었고 그 뒤에는 예배당, 그 뒤에는 연병장이 있었으니, 성과도 같았다. 비올렛은 조용히 식사를 끝마치고 바깥에 나와 있었다. 항상 방에만 갇혀있지 말라는 핀의 배려였다. 핀의 기대와는 다르게도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방 안에 머물러 있다가 자작 부인이 오면 예의범절과 그 밖의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것이었다. 요사이에는 그녀가 글자를 못읽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자작 부인은 그녀를 더욱 더 다그쳤던 것이었다. 모든 수업이 다 끝나면 가라앉은 얼굴로 항상 창밖을 보고 있으니, 핀에게 그런 말이 나올만도 했다. 제가 바깥에 나가도 돼요? 라는 순진한 물음에 그녀는 어쩐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마든지 다녀도 된다고 했다. 따라가 줄까요? 라는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그것은 여지없는 실수였던 것이다. 못마땅해 하고 있는 청색의 두 눈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야, 너 그 손 일부러 치료안하는거지?”
소년, 그러니까 에이든의 뾰족한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이 다가와 그녀를 관찰하듯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마치 강아지가 새로운 것을 보면 하는 행동처럼 경계심 어린 표정이었다. 고개를 숙이며 묵묵히 그 시선을 감내하자 그가 말했다.
“참 신기해.”
“…….”
“천민이라고 우리랑 다를 줄 알았는데 다른게 하나도 없네?”
그의 말에 그녀의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자작 부인에게 배운 대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이든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안에 감겨져 있는 붕대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너 진짜로 다친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녀가 작게 말했다. 에이든이 그녀의 말에 어라, 말도 할줄 아네. 라며 그녀를 놀렸다.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영락없이 예전 마을에 살던 폴이었다.
“야, 너 왜 요즘엔 밥먹으러 안와?”
그 물음에 그녀의 몸이 경직됐다. 손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의 얼굴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당황해 몸을 빼려하자 그는 손을 꼭 잡았다. 손이 아팠지만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막 굶고 다니는건 아니지?”
“…….”
“에이씨 왜 말을 안해, 재미없어.”
그가 짜증을 내며 손을 뿌리쳤다. 에이든은 씩씩 거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올렛으로서는 이 감정이 어떤 원인에서 어떻게 뛰어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귀족들은 다 이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겁에 질릴 때였다.
“에.이.드.리.언?”
낯익은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자 금발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이름을 끊어 불렀는데 분명 환하게 웃고있는데도 그 모습이 무서웠다. 에이든이 히익, 하며 하악질 하는 고양이처럼 놀라 그녀의 뒤에 숨었다.
“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소년이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세요.”
그녀의 말에 그가 일어났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들째 도련님, 그러니까 다니엘은 그녀의 뒤에 숨어있는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에이든, 이번엔 내 옷에 지네를 몇 마리 풀어놨더구나. 최연소 친족살해자라도 되고싶었던거니, 응?”
“저, 전갈이 아닌거에 감사한 줄 알아!”
에이든이 소리쳤다. 지네? 친족살해자? 뭔가 살벌한 말이 오간 것 같았다.
“어딜 도망갔나 했더니 성녀님을 괴롭히고 있었어?”
“괴 괴롭히다니! 그런거 아니야!”
에이든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진짜아니야, 아니라고! 그녀는 쨍쨍거리며 소리치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싶었다.
“이거 아버지나 큰형에게 일러야 겠군. 아주 멋진 벌을 주실거야, 그렇지?”
“으앙, 살려줘 잘못했어 형!”
“자, 어서 내일 과제를 하는게 좋을 거야. 당장 방으로 돌아가, 당장.”
그 단호한 말에 에이든이 뛰어갔다. 허둥지둥 거리는 뒷모습을 보고 과제하다가 도망온건가 생각할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발전했구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미소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공대를 했는데 지금은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편하게 하는게 싫었니? 성녀님께서 불편하시다면 원래대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투가 다시 변하자 그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이 존대가 가장 불편한건 비올렛이었다. 비올렛으로서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존대를 받은적이 없었다.
“아,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제게 반말하는건….”
푸핫, 웃음소리가 들렸다. 잔잔히 웃고 있는 그 얼굴에 짖궂은 미소가 서렸다. 비올렛은 감히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랐다. 경박하게 웃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의뭉스럽게 웃는 것도 아닌 그는 자작부인이 말한 웃음소리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성녀님께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
그녀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자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 이제 너는 내 여동생이야. 너는 오빠에게 도련님이라고 부르니? 그렇다면 나는 너를 아가씨라고 해줘야할까?”
아가씨!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이 또 어디있을까. 그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봐, 부끄럽지? 그러니까 그런 호칭은 부르면 안 돼.”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라고 물어보려고 했다.
“오빠라고 불러.”
“오빠요?”
“응, 너는 내 여동생이잖아.”
“…….”
그녀가 깜짝 놀랐다. 저렇게 선뜻 말해도 되는 걸까. 겨우 천민 여자아이에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와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소년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비올렛, 맞지?”
“네.”
이름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말해준 적은 없지만. 그녀는 비올렛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 쏟아지던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럼없이 그 호칭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 무언가가 얹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니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많이 힘들지?”
갑자기 그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된 듯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그가 조금 당황한 듯 했다.
“미, 미안, 울리려던건 아니었어. 괜찮니 비올렛?”
괜찮냐고 물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그 눈물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괜찮다는 말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게 사르르 눈녹듯 풀렸다.
“미안해, 내가 널 좀더 일찍 찾았어야 했어, 많이 힘들었구나.”
그 다정한 말은 가슴에 울려퍼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은 친절하고 착한 소년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마음을 탁 놓았다. 천민을 여동생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처음으로 이곳에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다니엘과 친해진 비올렛!
사실 유년편은 조금 답답할지도 몰라요! 저 믿고 달려와주실꺼죠!
재미있으셨다면 추천 부탁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