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 움트는 새싹 =========================================================================
마차에 탄 비올렛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너 편에 앉은 후작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작은 원래 과묵한 편이었고, 비올렛역시도 이런 상황이면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어려운 사람 앞에서는 차라리 입을 다물어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뼈아픈 생존방식이었다. 어지러워서 잠깐 쉬고 싶었지만 그녀는 차마 눈도 감지 못했다.
“알겠습니까 성녀님? 국왕전하를 알현할 때나, 왕족들을 대할 때 조심, 또 조심해야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실수를 할까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눈치를 보며 쉬자 후작이 말했다.
“특히나 신관들을 마주할땐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신관이요?”
그녀의 되물음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을 언제나 데려갈까 기회를 옅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누군가가 곁에 있을 테니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만약 혼자 있을 때 신관을 만난다면 피하십시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한 열기를 띄고 그녀의 발앞에 조아리던 신관들에 대해 잊을 수 없었다. 밤에는 그렇게 리디아 언니를 때렸던 사람들이 낮에는 그녀에게 비굴할 정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올렛이 단 하나 확고하게 결정한 것은 그녀는 신전에는 절대로 가고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이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가 도착하고 왕성이 드러났다. 그녀는 왕성의 웅장함을 보는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와서는 안될 곳을 온 사람인 마냥 어깨를 움추렸다. 마중나온 수행원들이 국왕의 접견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접견실은 알현실처럼 넓은 홀이 아니라 작은 방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 있다 왕이 들어오자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시게.”
왕의 말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끌려 비틀거리긴 했으나 겨우 중심을 잡은 그녀는 왕의 허락 하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왕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나라의 나라님을 쳐다본다는 게 아직도 그녀에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편한 점은 없는가?”
그 딱딱한 어투에 그녀는 즉각 말했다.
“어 없습니다.”
한참동안 그녀를 평가하는 듯한 시선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녀는 혹여 그녀의 표정을 왕이 보고 행여 문제 삼을까 고개를 숨어 몸을 더욱 움츠렸다.
“예법 교육이 우선 필요할 것 같소, 후작.”
“이미 가정교사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한숨을 쉬더니 테이블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손짓을 하자 그 둘도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비, 비올렛입니다.”
“이름마저 꽃에서 따왔군.”
왕이 쯧쯔, 하며 혀를 찼다. 비올렛이라는 이름이 잘못 된 것일까. 그러자 여기 있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해 졌다. 애초부터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후작은 이를 알고 있었는가?”
“아, 아니요.”
“이런, 수양딸을 삼는다더니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가.”
왕의 말에 후작이 멋쩍은 표정으로 옆에 앉아있는 소녀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모습이 여간 안쓰럽지가 않았다.
“앞으로 성녀님의 교육은 신관이 아닌 신학자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왕이 하녀가 앞에 내온 차를 마시며 말했다. 비올렛은 차와 다과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차를 마시다가는 또 흠이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교육이 이루어지면, 말룸에 대하여 수련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련이라 함은?”
“검술을 교육시킬 생각입니다.”
검술? 그녀가 깜짝 놀라 후작을 바라보았다.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엔 그녀가 검을 드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오만.”
“노력한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120년 전, 신전에서는 어떻게 성녀를 교육시켰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성녀는 아마 무력도 어느정도 필요 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훗날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내 후작을 믿소만 버겁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구려.”
검술. 그녀가 얼이 빠져 혼자 중얼거렸다. 예의범절, 검술.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연관이 된단 말일까. 그 소리를 듣자 너무 아득하게 들렸다. 그때 왕이 말했다.
“아무래도 후작, 지금 성녀께서는 휴식이 필요한 것 같소.”
그녀는 핫, 하고 표정을 고쳤다. 어느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왕 앞에 서 있었다니, 분명 큰 결례이리라.
“저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후작이 눈짓하자 시종중 한명이 그녀를 안내했다.
“드시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을 따라 나섰다. 왕과 후작의 시선이 따라붙는게 느껴졌다. 그녀는 애써 또박또박 걸으려고 했으나 지나치게 풍성한 스커트는 그녀의 걸음을 방해했다. 그녀의 보폭에 시종이 맞춰주었다.
“이쪽입니다. 성녀님.”
궁 밖으로 나서자 꽃향기가 그득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보자 그녀는 이곳이 신의 낙원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부담감이 사라진 그녀는 용기를 내어 화려한 색색의 꽃들을 지켜보았다.
“이제 저택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대답하면서도 화려한 정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후작 가 역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그곳을 바라보자 푸른 새가 그녀에게 장난을 치듯 지저귀었다. 그녀가 꺄르르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맑은 웃음 소리에 궁금해 하는 시종이 물었다.
“저 애가 반갑다고 인사하고 있어요.”
그녀의 손 끝에는 푸른 새가 앉아 있었다. 시종의 표정이 이상했다.
“새의 말을 알아들으십니까, 성녀님?”
“네, 이상하게도 알아들을 수 있네요.”
“그건 성녀님께서 신이 내린 피조물 모두에게 사랑받아서 그런겁니다.”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 피조물에는 인간도 포함이 될 진데, 사랑 받은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가락 위에 앉았다. 포동포동한 깃을 부풀리며 내는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수다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해가 뜨고 있다. 햇살과도 같은 은빛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새파란 하늘을 담은 눈동자를 보며 미소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꿈결과도 같았다. 과연 신에게 선택받은 신성의 소녀였다. 시종은 넋을 잃고 그녀가 새의 노래를 듣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럴수가, 여기 계셨군요!”
잠시 새에 걸음을 지체하자마자 누군가가 따라붙었다. 흰색의 신관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그가 다가서자 마자 새는 날카로운 울음을 내더니 날아가버렸다. 노인이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 신의 종 베른카스텔 인사드립니다.”
그녀는 뭐라고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나 놀라서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성녀님. ”
“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하루 사이에 수척해 지셨습니다만, 에르멘가르트 후작이 비열한 수를 써서 성녀님을 꼬여 내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냈어야 했습니다.”
“…….”
“성녀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무릎을 꿇은 노인이 일어나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서 신전으로 가야합니다. 추기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례합니다, 성녀님께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옆에 있던 시종이 말했다.
“하찮은 시종 따위가 감히 신의 사도인 내게 무례를 고하느냐! 지금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것이냐! 신의 분노를 살 것이다!”
그가 노호성을 지르자 시종이 움찔 했다. 억세게 잡은 손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집착과도 같은 그 질척거림에 비올렛은 두려움에 떨었다. 신전에게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거처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신관들이 만약 태도를 바꾸어 리디아를 대했던 것처럼 그녀를 대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신관이 나가면 쓰러진 채로 흐느꼈던 언니들처럼 되고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시종이 대신관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름잡힌 손을 꽉 깨물었다.
“아악!”
예상치 못한 고통에 힘이 풀리자 그녀는 뛰었다.
‘특히나 신관들을 마주할땐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그녀의 머릿속에는 후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뛰어가자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그마한 체구의 그녀가 샛길로 새어버리자 그녀를 찾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비올렛은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로같은 정원에는 큼지막한 꽃이 피어있었으며 나무는 일정하게 손질이 되어 어디가 어디인지 지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쳤을 때 왕성쪽으로 도망쳤어야 했다. 그나마 아는 곳이 그곳이었으므로. 여기서 잘못 하다가는 신전에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앞서자 그녀는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며 걸어다녔다.
“어떻게 해야하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때 뾰로롱, 하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그 쪽을 바라보자 예의 그 파랑새가 울었다. 파랑새는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듯 다시 한번 울더니 그녀의 근처의 나무에 걸터 앉으며 다시 울었다.
“행운나무가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고?”
그녀가 물었다. 새가 다시 한번 울었다. 그녀는 그 새를 따라갔다. 새는 그녀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그녀가 이따금 늦을때마다 재촉하듯 울음소리를 냈다. 새에 정신이 팔려있던 비올렛은 누가 자신을 잡는 손길에 크게 놀라며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등 뒤에 있는 팔이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채자 이번에는 꽈악 하고 그 팔목을 물었다. 그럼에도 팔은 단단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어느새 파랑새는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챈 팔이 신관 노인의 팔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더 힘이 넘치는 팔의 감촉에 그녀는 버둥거렸다.
“가만히 계십시오.”
변성기가 온 듯한 중저음에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있었다. 아니, 사실 그는 청년이 아니라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분명 키는 청년처럼 훤칠하게 컸지만 얼굴은 앳된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년은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금색 실과 화려한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아주 협소한 그녀의 생각으로는 저런 옷을 입는 멋진 사람은 하나였다. 분명 리나나 로즈가 이야기하던 것을 들은 적이있다. 궁에는 왕자가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왕자님이다. 저 사람은 비올렛의 상상속의 왕자님과 너무도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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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남주 후보가 등장했네여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