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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6화 (6/208)

00006  움트는 새싹  =========================================================================

“어머, 성녀님! 세상에 울었던거에요?”

얼굴이 퉁퉁 부은 성녀를 보며 핀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제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장 큰 불안함은 그녀가 아무래도 누군가의 착각때문에 이곳에 온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후작이 착각한 것일수도 있고, 왕이 착각한 것일수도 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어쩌면 신께서 착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밤은 모든 생각을 부정적으로 바꾸는 마력을 지녔고,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함께 하던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마저 불안해서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죽일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냉찜질을 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녀의 붉은 얼굴에 서린 차가운 감촉에 비올렛이 기겁하며 도망치려고 하자 핀이 말했다.

“쉬이, 착하죠 성녀님? 이건 얼음이에요.”

그녀의 다정함에 비올렛은 얼음의 차가운, 그 생경한 감촉을 견뎌냈다. 그녀는 얼음을 그녀의 얼굴에 대는 것 따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얼음은 겨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고, 지금 이런 따스한 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귀했다. 이것을 그저 얼굴의 붓기를 가라앉히는데 쓴다고? 어떻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도련님들을 뵐 시간인데 못난 얼굴로 갈 순 없잖아요, 그렇죠?”

도련님들, 그녀는 긴장으로 몸이 딱딱히 굳었다. 꽃의 거리에 일부 찾아오는 귀족 도련님들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폭력적이었으며, 거만했다. 비올렛이 술을 가져다 주다가 술을 엎질렀다는 이유로 어느 귀족 도련님은 비올렛을 온 다리가 시커매지도록 매질을 했다. 그런 그녀가 귀족가의 도련님이랑 함께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애원하듯 간절한 얼굴로 핀을 바라보았지만 핀은 그것을 무시했다. 비올렛 역시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올렛은 천천히 걸었지만 도련님들이 기다리실거에요, 라는 핀의 재촉에 혹여 흠이라도 잡힐까 서둘렀다. 그녀를 기다리느라 아침을 못먹은 그들이 얼마나 흉포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긴 테이블이 보였다. 그녀는 덜덜 떨었다. 가운데 후작의 자리로 보이는 의자, 그리고 후작의 오른편에 있던 의자는 비어 있었고 가운데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줄줄이 소년들이 앉아 호기심어린 눈으로 비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얜 뭔데? 귀신같이 머리만 하얘서는.”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소년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비올렛은 그 노골적인 탐색의 시선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살짝 보는 얼굴은 그녀가 상상하는 거만한 귀족도련님이었다.

“에이든.”

뒤에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후작의 손이 더 빨랐다. 인사를 하려는 그녀를 만류하였다.

“성녀님이시다. 에이든, 바로 인사 드려라.”

“뭐, 뭐라구요?!”

소년이 펄쩍 뛰었다. 그는 비올렛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는데 얼굴에는 말 그대로 ‘말도 안 돼’라는 불신이 섞여 있었다. 거의 적개심까지 서린 얼굴에 그녀는 어쩔줄 모르고 쩔쩔맸다.

“실례잖아 에이든.”

그 옆에 있던 차분한 음성의 소년이 일어났다. 소년의 머리는 옅은색의 금발이었고 후작과 같은 짙은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에이든이라고 불리우던 소년보다는 키가 컸으며 나이가 들어보였는데, 그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처음뵙겠습니다 성녀님, 다니엘 에르멘가르트입니다. 성녀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년은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지 못한 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로서는 저런 미형의 남자는 처음 보았다. 그녀는 예법에 무지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가 떠올리는 귀족의 이미지에 부합했다. 그녀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셔야죠.”

그녀는 누군가가 해준 말에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일어나세요.”

다니엘이 일어나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싱긋 웃었다. 친절한 미소에 잠시동안 긴장이 풀리려고 할때였다.

“저거 완전 팔푼이 아니야?”

볼멘 소리가 들려 보니 아까의 그 소년이 팔짱을끼며 얼굴을 찡그린 채 그녀를 쳐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푸욱 숙였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언제나 고트 할망구는 그녀에게 똑같은 말을 했으니 말이었다. 역시나 귀족 도련님들은 그녀를 싫어할게 뻔했다.

“에이든!”

다니엘과 후작이 동시에 나무랐다.

“어서 인사 드려야지.”

그 말에 에이든이 혀를 내밀었다.

“어차피 내 여동생이라면서요. 내가 여동생한테 무릎을 왜 꿇어요?”

그의 반항적인 말에 후작의 주의를 주려 하자 에이든이 말했다.

“아 진짜! 천민한테 어떻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세요?”

그 말에 그녀가 흠칫 굳었다. 그래 맞았다. 보통이라면 이런 일은 절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다시 숙였다.

“에이드리언.”

그의 음성에는 나직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한동안 다른이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후작은 아무말없이 그녀를 끌어다 식탁에 앉혔다. 후작의 왼편이었다. 후작의 오른편에는 형제들이 앉았는데, 에이든이 그녀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에셀먼드는 아직인가?”

후작이 옆에 서 있던 집사에게 물었다.

“아니요, 도련님께선 먼저 나가셨습니다.”

그 대답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오늘은 식사를 하라 기별을 넣었건만.”

“도련님의 성정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후작은 침묵대신 불편한 숨소리를 냈다. 후작이 나이프를 들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큼지막한 닭고기를 보았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자 에이든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밥도 못먹는 팔푼이네. 하긴, 네가 언제 이런걸 먹어 봤겠어?”

그 말은 진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에 놀란 것은 말을 했던 에이든이었다.

“에이든, 이제 그만 둬.”

“형.”

“네가 식사 예절을 조금 더 잘 안다고 해서 네가 저 분을 무시할 권리는 없어.”

다니엘의 단호한 말에 에이든이 입을 삐쭉였다. 핀이 옆에서 일러주었다.

“성녀님 맨 오른쪽에 있는 스푼을 쓰는거에요. 자.”

식사는 어려웠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먹는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찔해져왔다. 그녀는 넘어가지 않는 식사를 그들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입 안으로 넘겼다. 에이든은 그녀가 실수 하나라도 할때마다 노골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를 조롱했다. 많이 먹으면 많이 먹는다고 뭐라 할 것이고 적게 먹으면 또 적게 먹는다고 뭐라 할 것이다. 언제나 귀족들은 제멋대로였다. 이미 못마땅하게 본 이상 그녀는 무엇을 해도 비웃음 당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보다못한 후작이 한마디 거들었다.

“가정교사를 데려와야 할 것 같습니다.”

거의 한숨이 섞인 말에 그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나니

따스한 눈으로 다니엘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에이든이 원래 많이 짓궂어요, 성녀님.”

“네에.......”

그녀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생각 외로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에 얹어졌다. 그 따스한 감촉에 흠칫 놀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아질 수 있을 거에요.”

분명 다정한 말이었으나, 그녀의 식사 예절이 형편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었다.나아질 수 있다니, 그녀는 나아질 자신이 없었다. 얹힐대로 얹힌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방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핀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성녀님!”

그녀의 뒤를 따라 몇몇 하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수군수군 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토했다. 평생 먹을 수 없었던 달콤한 하얀 빵도, 고소한 스프도, 양념이 적절하게 스며든 뛰어난 맛의 양고기도 그녀는 전부 입속에서 게워냈다. 토해낸 음식물이 죽처럼 질척질척했다. 핀은 어쩔줄 몰라하며 그녀에게 맑은 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몸에 묻은 토사물들을 다시 씻어냈다. 목욕을 하는데 시중을 들러 하녀 몇이 왔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그들의 시중을 거부했다. 그녀는 여기 이곳 사람들이 너무 불편했다.

거울 속에 있는 낯선 모습의 소녀가 보였다. 은색으로 변해버린 머리색, 푸른 색으로 변해버린 눈 색, 잃어버린 제비꽃의 보라색. 그녀는 심지어 지금 자신의 모습도 견딜수 없이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콜록 콜록 기침했다. 아직도 입안에는 위액의 쓴 맛이 남아 있었다.

============================ 작품 후기 ============================

구르는우리 비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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