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움트는 새싹 =========================================================================
말도 안되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할 수 밖에 없었다. 성녀가 교황파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게 만든다면 이 쪽은 성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성녀들의 태생은 대부분 귀족 아가씨들이었다. 가끔 평민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신전에서 훈육을 받았다. 만약 귀족의 여식이라면 그들은 성년이 될 때까지 집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허점을 이용하여 에르멘가르트는 성녀를 입양하였다. 본디 영지민은 영주의 것이었으므로 그는 이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천민가에서 발견된 성녀가 그러했지만, 그 성녀를 입양한다는 일이 말이 될 리가 없었다. 대신관들은 수염을 부르르 떨며 격노했고 에르멘가르트 후작은 뻔뻔하게 말할 뿐이었다.
“제가 그분을 다치게 했다면, 그 분을 제 딸로서 들이고 갚아야 마땅할 일, 저로 인해 부모를 잃었는데 제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아닙니까? 더블린 대신관, 신관께서는 어떻게 책임을 지실거냐 물으셨소? 이게 바로 내 대답이오.”
아직 티게르난 공작은 교황령, 아니면 공작령에 머무르느라 오지 못했으니 이틈에 몰아붙여서 빨리 끝내야 한다. 만약 공작이 와 있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성녀를 데려갈 것이었다. 어쩌면 무력도 불사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에르멘가르트 후작은 완고했다. 그는 영지민의 소유권을 들먹이며 신전에 그들을 넘기지 않겠노라고 했다. 영지민의 권리나, 신권이냐. 만약 여기서 신전의 권리가 우선 된다면 교황파의 귀족 역시도 그들의 살을 깎아 먹는 행위가 된다. 결국 교황파도 완강하게 그것을 반대할 수 없었고, 영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신관들만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 사이 왕은 성녀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이 도박이 성공하길 바라면서. 그러나 왕은 성녀의 힘을 빌어 교황을 찍어누르는데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이 가져 최고의 패를 쓰느니, 비록 이곳에서 효과적으로 쓸 수 없는 패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나았다. 별 볼일 없는 패가 상대에겐 최상의 패로 작용한다면 막는게 도리 아니겠는가.
아니, 물론 이 성녀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일까. 드레스를 입은채로 어색한 걸음걸이를 본 왕도, 귀족들도, 신관들도 실소했다. 자그마한 소녀는 어깨를 잔뜩 움츠러뜨리며 목을 집어넣은 채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 이마의 성흔과 생김새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녀가 성녀라고 결코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르멘가르트를 지목했다. 사실 아무리 멍청한 자라도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신전을 선택하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때의 소녀는 정말로 마치 누군가 그러라고 계시라도 내린 것 처럼 단호하게 후작을 선택했다.
이 나라 안에 성녀의 위에 있는자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교황마저 성녀가 이렇게 공식적으로 의견을 표명한다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왕의 도박은 성공한 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숙한 천민계집아이는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
비올렛은 시선을 올렸다가 내리 깔았다. 차마 얼굴조차 마주할 수 없었다. 자기가 있을 곳은 자기가 선택하라 했던가. 선택은 했지만 그녀는 그 두 곳중 어느 곳도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성녀님.”
마차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 앞을 보았다. 검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곰처럼 커다란 중년남자의 시선은 따가울 정도로 인상깊었다. 겨울 바다와 같이 깊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톨의 호의도 애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희 집엔 여자가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무뚝뚝한 말투였다. 여자가 없다니?
“여자가 없어요? 많이 있던걸요?”
사용인들을 생각하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후작은 씁쓸한 얼굴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무엇인가 실수를 한 것일까. 그녀는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다.
“사용인들을 제외한 집안의 여자 어른은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녀는 아직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의아해 하다가 결국 말문이 막힌 것 같은 후작의 얼굴을 보고 다시 침울해져 고개를 숙이는 비올렛을 보고 후작이 말했다.
“그러나 모시는데 한치의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분명 꽃의 거리에 있을 때는 쳐다도 못볼 높은 귀족님이 지금 자신을 모신다고 하고 있었다. 비올렛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은 돼서는 안된 과분한 자리에 덜컥 올라 선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되는 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불편했다. 뭔가 가득 얹힌 느낌이었다. 어떤 말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녀는 말을 삼켜버렸다. 후작은 그녀를 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의 좁은 창문에 달빛이 들어와 비쳤다.
*
후작가에 다시 들어선 비올렛은 핀을 찾아 헤맸다. 핀을 보자 마자 뛰어가 그녀의 손을 꼭 잡는 비올렛을 보더니 후작이 눈짓했다. 집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성녀님을 모셔야 할 것 같다.”
핀은 고개를 숙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들었죠, 성녀님? 이제 성녀님을 제가 모시게 되었어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안심이 된 것인지 비올렛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후작은 그것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도련님들께 소개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내일 아침에.”
그는 그렇게 짤막하게 말하며 돌아갔다. 비올렛은 그런 그를 보더니 허리룰 꾸벅 숙였다.
“성녀님, 그러지 마십시오!”
“…….”
집사의 호통과도 같은 말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후작은 비올렛이 무슨 짓을 한지 모르다가 이내 집사의 모습을 보고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눈치 챘다. 그는 다가와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성녀님?”
“…….”
“성녀님은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여성입니다. 성녀님과 대등한건 국왕폐하나 교황성하밖에는 없습니다.”
“…….”
“그러니 제게 고개를 숙이셔서는 아니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낑낑거리는 강아지의 신음소리처럼 작았지만, 모두가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그 목소리는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후작님은 제 아버지가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후작이 당황한 듯 했다.
“아버지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하는 건 틀린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는 그 어떤 의도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물음이었다. 후작은 잠시동안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는 잠시 시선을 피하다 말했다.
“아니요, 틀린게 아닙니다.”
“…….”
후작이 비올렛의 얼굴을 흘낏 보더니 말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성녀님.”
그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올렸다. 묵직한 손이 시야에 가득 차 자신의 머리위로 향하자 그녀는 습관처럼 자신을 때리는 줄 알고 몸을 크게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후작이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말 없이 돌아나섰다.
*
“자, 성녀님 옷을 갈아입으세요.”
거추장 스러운 옷이 다시 벗겨지고 그녀는 편한 잠옷을 입었다. 말없이 핀을 올려다 보자 핀은 웃으며 그녀의 긴 머리칼을 정돈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신기하네요, 올때만 해도 온 몸이 상처투성이었는데, 흉 하나도 없이 깨끗해요, 이게 성녀의 힘일까요?””
그러고 보니 고트 할망구에게 심한 매질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 언제나 몽둥이를 막느라 멍이 들어있던 팔목은 상처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녀는 헐렁한 소매를 걷어 보았다. 치마를 걷어 허벅지도. 그러나 얼룩덜룩했던 몸은 밀가루와 같이 새하얬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있었던 고통도 없었다.
“성녀님은 참 말이 없으시네요.”
“…….”
핀이 입을 닫아버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침대에 눕혔다.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에도 그녀는 불안하게 시선을 굴리고 있었다. 단 하루만에 바뀌어 버린 환경을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목이 없이 쓰러져 있는 로즈와 리나의 시체가 떠오른다. 그 둘이 살아있었다면 좋을텐데. 리나와 로즈는 아마 그녀가 국왕폐하를 만났다는걸 믿지 않을 것이다.
“안녕히 주무세요.”
핀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깥으로 향했다. 곧이어 촛불이 꺼지고 방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창아래 달빛이 쏟아들어져 침대를 푸르게 비추고 있었다. 언제나 다락에 쭈그리고 잤던 그녀가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은 분명 신이 그녀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꽃의 거리가 불에 타 없어졌다는 것, 다신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 이 달라진 환경에 누구 하나 마음을 의지할 곳 없이 없다는 것, 신이 실수했음이 틀림없다. 아마 신께선 그녀가 아니라 다른 여자애를 선택했어야만 했다. 아니야, 사실은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 없다.
혼자 남은 침실이 고요했다. 방은 지나치게 넓었다. 흑,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몇방울 쏟아졌다. 한번 쏟아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엉엉 울 수 없었다. 분명 또 울면 차가운 시선이 쏟아질 것이다. 이젠 울어도 달래줄 이 하나 없다. 엄마가 보고싶다. 고트 할망구에게 매질을 당해도 언제나 그녀를 위로해주던 언니들이 보고싶었다. 이 방은 너무나 넓고 무서웠다. 새로운 상황에 처한 두려움과 외로움에 소녀는 벌벌 떨며 숨죽여 흐느꼈다.
============================ 작품 후기 ============================
남주는 다다음 편에 나올 예정입니다... 표지가 남주인데 아직도 나오지않아... 아참! 뜰에가면 여자주인공 커미션 맡긴 얼굴이 있어요~ 되게 예쁘게 그려주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