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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4화 (4/208)

00004  움트는 새싹  =========================================================================

“이게 뭐야.”

“자 어서 봐요.”

하녀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거울 앞에 있는 자신을 보며 숨을 멈추었다. 이건 알고 있다. 신관들이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커다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문양이 왜 그녀의 이마에 새겨진 것인가. 점 하나와 세개의 꽃잎과 같은 푸른 색의 문양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 낯선 흔적을 지우려고 했다. 하지만 문질러도 이마만 빨갛게 일어날 뿐 그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건 성흔(聖痕)이에요.”

그녀는 이마에 새겨진 흔적을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신조차 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신에게 선택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한참동안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변해버린 얼굴, 그 이마에 새겨진 낙인.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 시녀가 엉엉 우는 그녀를 안아주며 달랬다. 그때 문이 열렸다.

“핀! 어서 성녀님 옷을 갈아입혀!”

“응?”

“왕궁으로 오라는 국왕폐하의 명이셔!”

“세상에, 이제 기침하셨단 말이야!”

“어쩔 수 없어, 성녀님 실례할게요!”

울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녀의 옷이 강제로 벗겨졌다. 엉엉 울고 있는 그녀를 향해 짜증스러워 하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 갑자기 옷이 갈아입혀지고 머리를 잡혀 묶인다. 비올렛은 그러면서도 울었다.

“아이 참, 울지 말라니까요, 폐하를 알현하러 가시는거라구요.”

“애버린, 너무 말이 심하잖아.”

“나 참, 누가 꽃의 거리에서 온 아이 아니랄까봐. 지금 상황파악도 못한채 울면 경을 치는건 우리란 말이야.”

그녀가 짜증을 냈다. 핀은 짜증을 내는 그녀를 말리지도 않으며 우는 비올렛을 달래는데 쩔쩔맸다.

“성녀님, 울지 말아보세요, 성녀님.”

핀이라고 불리던 하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다시 봐도 엄마를 닮아있었다. 그녀의 눈에 서린 두려움을 알기라도 하듯 핀이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다 잘 될거에요 성녀님은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시니까요.”

마차를 타고 핀의 손을 꼬옥 붙잡은 그녀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마차라는 것은 처음 타 봐 굉장히 무서웠다. 무서운 아저씨가 그녀의 곁을 호위했는데 그녀는 갑옷을 보자 마자 로즈와 리나의 기억이 떠올라 자지러질 뻔했다. 지금 그녀는 그녀를 둘러 싼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로지 그녀 혼자만이 서 있었고 주변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급류의 가운데의 돌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한발자국이라도 떼었다간 그 물살에 휩쓸러 떠 내려갈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마차라는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이 입고있는 옷이 상당히 불편하고 치렁치렁한 옷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녀님, 내리십시오.”

궁에서 나온 검은 정복을 남자가 그를 안내했다. 금실로 수놓아진 옷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 그녀는 차마 그 남자를 보지도 못한채 고개를 푹 숙이고 내리려다 하마터면 긴 옷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잘 다녀오세요 성녀님.”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핀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마 핀은 이 곳에 못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울음을 참고 덜덜 떨며 걸음을 뗐다. 만약 지체하다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움직였다. 차마 다른사람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푹 숙이고 돌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바닥의 대리석에 새겨진 섬세하게 조각된 늑대의 문양은 그녀를 마치 힐난하는 것 같아 더욱 더 위축되었다.

“이곳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문 너머에는 알 수 없는 고함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마음대로 그렇게 하실수 있으십니까, 폐하!”

“에르멘가르트 후작, 말좀 해보십시오!”

“이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성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겁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남자의 말에 일순 조용해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소리에 그녀는 다시금 오금이 저렸다. 남자가 그녀를 억지로 끌고 들어왔다.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다른곳과는 달랐다. 그녀는 덜덜 떨었다.

“허.”

어떤 남자가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소리에 서린 비웃음에 동감하기라도 하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엔 곧바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폐하의 앞입니다.”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가 속삭이자, 대신관이 소리쳤다.

“성녀가 어떻게 왕 앞에 무릎을 꿇으오리까!”

하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자 마자 무서워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의 앞이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나랏님이 앞에 서 있었다. 다들 그녀를 성녀라고 말한다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목숨으로 경을쳐도 모자랄 것이다. 아니면 죽을때까지 매를 맞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고트 할망구보다도 더욱 더 심하게 매질할 것이다. 아직도 실감나지 않은 현실 속에선 공포만이 선연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붉은 카펫이 보이며 단상위에 있는 의자와 두 다리가 보였다. 붉은 빌로드가 길게 늘어트려져 있었다. 섬세하게 세공 된 팔걸이가 위에는 반지를 낀 남자의 두 손이 보였다. 손이 까딱 거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성녀여, 고개를 들라.”

차가운 그 목소리에 그녀는 달달떨며 자꾸 숙여지려는 고개를 억지로 들었다. 금관을 쓴 거친 풍채의 남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보석으로 장식된 금관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샛노란 금색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맹수의 눈빛 같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왕이 역정을 낼 것이 무서워 그러지도 못했다.

“일어나거라.”

옆에 있는 남자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단상에서 내려온 왕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금관을 쓴 중년의 남자는 싸늘하게 겁에 질린 연약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왕이 자신을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을 알았다.

“그대들의 의견이 그렇게 판이하다면 직접 선택을 하라 하면 되지 않겠소?”

왕은 손을 들어 비올렛을 세웠다. 비올렛은 얼어 붙어 하마터면 숨쉬는 법 조차 잊어버릴 뻔 했다. 앉아있던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시오, 후작.”

그 말에 덩치가 큰 남성이 일어나 다가와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신 베오른, 에르멘가르트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덜덜 떨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하얀 옷을 입은 신관들이 앞다투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지 말라는 명령에도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성녀님, 세상에나, 성녀님!”

한 신관의 얼굴을 본 그녀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리디아를 괴롭히기로 유명했던 신관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듯 마치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태양이라도 된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저 거만하고 나쁜 신관이 그녀에게 무릎을 꿇다니 그녀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 성녀여. 네가 있을 곳을 선택하라.”

왕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에르멘가르트 후작 가의 양녀로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신전에 들어가 신의 품에 안기겠느냐.”

“당연한 일이 아니옵니까, 성녀는 신의 사자입니다. 반드시 신전에 있어야 합니다!”

대신관이 겁도 없이 말했다.

“무엄하다, 신관은 지금 짐의 말을 가로막는가!”

그 서늘한 일갈에 대신관은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거라. 그 누구도 그대의 선택을 막을 자는 없다. 후작가에 양녀로 돌아가 그대로 머물겠느냐, 아니면 본디 그대가 있어야 할 신전으로 들어가겠느냐.”

하루 아침에 성녀라는 것도 모자라 어딜 기거해야할지 정해야 한단다. 저 남자의 집에 사는 것, 그리고 저 신관들과 함께하는 것.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실 답은 너무도 명백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녀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그녀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선택해야만 했다. 저 옆에 있는 신관할아버지가 간절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 하나 확실한게 있다면 적어도 저 신관과 함께 있는 것은 절대로 싫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것이었다. 그녀는 후작 가에 양녀로 들어가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잠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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