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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3화 (3/208)

00003  움트는 새싹  =========================================================================

신성왕국 아그레시아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모든 것을 창조해 냈던 신과 그런 신을 미워하여 그 신이 만든 모든 것을 원망했던 악마. 악마는 그것을 위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저주하는 말룸(Malum-신을 저주하는 자)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모든 것을 악마가 원하는 데로 파괴했다. 모든 나라의 유명한 기사와 군사들이 동원되었지만 그들은 말룸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어둠의 시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죽어나가는 시대, 그러나 그 암울한 시대의 종막을 내린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신의 대행자, 초대 성녀 아그레시아였다. 신화의 그림속에서는 언제나 조그마한 여인의 몸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는 이 성녀는 신의 권능으로 말룸을 격퇴하고 소멸시키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길한 예언을 하나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악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신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에르멘가르트 후작은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래, 저 신화는 아름다운 건국신화라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문제는 성녀와 말룸은 정확히 120년 전까지도 나타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말룸과 성녀 그들의 신화는 점차 잊혀져 갔다. 오로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어리석은 민중들뿐이었다. 그들은 성녀의 재림과 성녀의 기적을 바라며 오늘도 공물을 바친다. 나라가 아니라 신전에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 하하.”

단 위에 위치한 붉은 단상에 앉은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에르멘가르트 후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라이셀 백작가와 눈을 주고 받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하필이면 자신의 영지에서 성녀가 나왔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성녀의 재림. 그것은 환영해야 할 일이었건만 그 누구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아마 교황파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만큼은 아닐 것이다.

왕의 허탈한 웃음이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교황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후작, 내 대에 성녀가 나타나다니, 참으로 뜻깊지 않소!”

그가 웃었다.

“신은 나를 버리신게지.”

“폐하!”

후작의 말에 왕이 웃었다.

“이로서 겨우 찍어 누른 교황파들이 득세하겠소. 그렇게 요란하게 등장하였으니 숨길수도 없소. 성흔을 이마에 새긴 성녀의 등장이라. 하하.”

그는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렸다. 성녀를 손에 넣은 교황파들은 더욱 더 득세할 것이다. 비록 자신의 권위가 성녀보다 약해진 다는 점은 그들에게 있어서 달갑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것 역시 어린 성녀를 잘 구슬리면 될 일이다.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은 선왕을 보며 그 치욕을 되갚자 해 주었건만, 신은 정녕 왕을 버린 것인가 모두가 한탄하는 그때였다. 에르멘가르트 후작의 푸른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이 스쳤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폐하, 방법이 있습니다.”

*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모든 신을 믿는 신실한 자들이 신이 만든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러나 악마는 신을 믿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답니다. 그리하여 악마는 신을 저주하는 괴물을 만들었어요.  말룸이라고 불리는 그 악괴물은 신을 믿는 인간들의 목숨을 하나 하나 빼앗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답니다. 푸른 눈이 아름다운 사내 아이도, 붉은 옷이 잘 어울리던 소녀도, 한 나라의 왕도, 그 왕을 지키던 기사도 모두 다 안타깝게 죽고 말았답니다.

많은 이들이 말룸을 무찌르려 했어요. 힘 센 청년도, 날랜 다리를 지닌 소년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노인도 모든 살아있는 이들이라면 다들 말룸의 소멸을 바랐지요.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말룸을 이길 수 없었답니다.

신은 인간을 가여워 했어요. 그리고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 신의 사자를 보냈답니다.

그 사자는 힘이 세지도 않았으며 날랜 다리를 지니지도 않았고 머리가 똑똑하지도 않았어요. 신이 보낸것은 평범하디 평범한 작은 소녀였답니다.

계곡에 흐르는 물줄기와 같은 투명한 은발을 하고, 하늘은 담은 눈동자를 지닌 그 소녀는 이마에 신의 낙인을 새기고 있었어요. 그 누구도 신의 대리인인 소녀가 말룸을 무찌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힘센 청년도, 날랜 다리를 지닌 소년도, 똑똑한 노인도 그녀를 비웃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승리했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 승리한 셈이지요. 사람들은 기뻐했어요, 그리고 소녀의 아름다운 싸움이 승리한 이곳에서 소녀의 이름을 따서 나라의 이름을 지었답니다. 아그레시아, 라는 아름다운 이름을요.

그러나 소녀는 말룸이 포기 하지 않을거라고 말했어요. 사람들 사이에 어둠이 있는 한, 말룸은 포기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사람의 마음 속에 희망이 있다면 신도, 그녀도 인간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그 말대로 말룸은 언제나 나타나서 인간들을 멸망시키려고 했어요, 하지만 신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소녀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주었답니다.

어머니가 말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푸줏간에서의 고된 일이 끝난 후 어머니는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는 그녀가 딛고 있는 이 나라, 아그레시아의 건국 신화였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신의 현신이 나타나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인간들을 굽어 살피려 한번 씩 내려온다는 그런 흔한 이야기였다.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울까. 얼마나 천사같이 어여쁠까. 그녀는 아그레시아라고 불리는 성녀의 얼굴을 생각했다. 튀는 물줄기처럼 반짝거리는 은발, 하늘은 담은 눈동자.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노라면 집에서 항상 풍기던 고기 비린내도 사라지는 듯 했다.

비올렛은 고개를 쓰다듬어 주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어 몸을 틀었다. 하지만 머리가 반쯤 뭉개진 로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비린내는 고기의 냄새가 아니라 짙은 피비린내였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도망갔다.

“살려줘 비올렛.”

로즈가 말했다. 아름다웠던 그 붉은 머리카락이 피로 젖어 있었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둥에 누군가가 닿았다.

“비올렛.”

그녀가 알고 있는 그 목소리에, 그러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리나의 긴 갈색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입이찢어진 채 웃고 있었다…….

*

잠에서 깨어난 비올렛은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부드러운 옷을 입고 있으며 폭신한 침대위에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이곳은 어디지. 바로 머리맡에 쓰러진 시체에 크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났다. 욱, 비올렛은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갓 열 살이 된 여자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허용범위를 넘어섰다. 산적놈들에게 목이 잘려버린 아버지나 결국 유린당하고 죽임을당한 어머니의 충격보다 더욱더 커다란 충격이었다. 비올렛은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 흐느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하녀 한 명이 들어오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 깨셨나요?”

비올렛은 차마 하녀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리디아가 언제나 되고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고급하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만나는 귀족 집안에서 하녀로 일하는 여성들은  마치 자신이 귀족이라도 되는 것 처럼 대체로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녀들을 경멸하고 욕을 뱉고는 했었다. 그녀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자 하녀는 어쩔줄을 몰라했다.

“여,여긴 어딘가요?”

비올렛의 말에 하녀가 안심한 듯 말했다.

“여긴 에르멘가르트 후작 가의 저택이에요.”

“네, 네?”

후작 가라니. 후작 가라면 높은 귀족님들이 사는 곳이 아닌가? 에르멘가르트? 그건 무슨 가문이란 말인가.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름이었지만 딱히 기억나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녀는 달달 떨었다. 비올렛은 자신이 어디 잡혀왔나 바르르 떨었다.

“성녀님, 어디 아프세요?”

성녀님? 그녀는 귀가 번쩍 뜨여 성녀라는 인물을 찾아보았다. 어머니가 말하는 성녀님이 어디 계시는거지? 성녀님?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성녀라는 인물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성녀님?”

그 물음에 그녀는 겨우 겨우 고개를 들어 하녀를 보았다. 따뜻한 갈색 눈동자의 얼굴이 순박해 보였다. 마치 엄마를 떠오르게하는 얼굴이었다. 덜덜 떨고있는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손길에 그녀는 겨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저, 저를 부르는거에요?”

“네, 성녀님.”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나, 나는 성녀가 아니에요. 잘못 아신거에요.”

그녀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성녀라니, 아무래도 누군가가 잘못 알고 그녀를 데려온 것이 틀림없다.

“자, 잘못했어요. 전 그런거 아니에요. 사, 살려주세요 속이려고 그런건 아니에요. 제발.”

그녀가 울며 애원했다. 하녀는 매우 불쌍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소리 말아요 성녀님, 신께서 들으면 노여워하실거에요.”

하녀는 비올렛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침대에서 내려다 주었다.

“자, 거울을 봐요.”

참고로 비올렛은 이렇게 큰 거울은 처음 보았다. 가장 잘나가던 로즈의 방에도 얼굴을 겨우 비추는 거울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섬세한 금으로 세공되어 있는 거울은 바라만 보기에도 황송해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울먹이며 하녀를 바라보았지만 하녀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거울을 가리켰다. 그러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이상했다. 얼굴이 이상했다. 아니다, 모든게 다 이상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평범하디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금발처럼 빛나는게 예쁘다고 다들 말해주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색깔이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세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백발이 된 것이 아니라 투명한 은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은을 뽑아 만든 것 같은 머리카락이 자신에게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들어 보았다. 아까부터 비올렛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머리색이 바뀐거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눈동자. 아버지는 어린 그녀가 가진 자색의 눈동자를 따와 그녀의 이름을 비올렛으로 지었다. 그런데 그 보라색 눈동자의 눈이 온데간데 없고 투명한 하늘색으로 변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가끔씩 그녀의 원래 눈 색깔이 투과되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충격으로 잠시동안 숨을 쉴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 계속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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