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원에 핀 제비꽃-2화 (2/208)

00002  움트는 새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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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배에 서린 격통에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차가운 나무 바닥의 차가움이 그녀의 잠을 깨웠다. 비올렛의 앞에는 중년의 여자가 서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고트 할망구가 서있었다.

“이년아, 빨리 식사 준비 안해?”

그녀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여자는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녀는 여자의 눈치를 보며 잠자리를 정돈했다.

“널 데려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 아니었으면 노예로 팔려가 미친놈들 사이에서 평생 놀잇감이 되었다는걸 모르지는 않겠지?”

비올렛은 감히 여자를 올려다 보지 못하고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은 말라붙은지 오래였다. 그녀는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요사이 그녀는 꿈에 시달렸다. 사실 이 꿈은 어렸을 때 부터 이어오던 꿈이었다. 꿈 속에서는 언제나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다가갈 법 하건만 그녀는 왠지모르게 소름이 끼쳐 그 목소리로 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어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여느때처럼 도망가려 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두 팔로 그녀를 옭아맸다.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머, 비올렛 아침부터 큰일 한번 치렀나보네.”

식탁에 앉아있던 젊은 여성이 제법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늦잠을 잔 제 잘못이에요.”

“어머나, 착해라.”

금발 머리의 여성은 파리해 보이는 안색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힘들어보였다.

“리나, 몸은 괜찮아요?”

“응, 괜찮아. 마녀할망구, 어린애한테 이게 뭐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비올렛의 부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비올렛이 미약한 고통에 으, 하고 신음소리를 흘리자 그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비올렛의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여자아이의 몸에 얼마나 상처가 나면 날까 하겠지만 비올렛의 피부나 손목사이에는 멍이 가득 차 있었다. 고트 할망구의 표독스러운 매질때문이었다.

“야, 비올렛, 한눈팔지 말고 어서 일하지 못하겠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이 이번에는 그녀를 톡 쏘아붙였다. 비올렛은 재빨리 그쪽으로 뛰어갔다.

“미안해요 로즈.”

“또 할망구한테 맞고 싶어서 그래?”

그녀의 뾰족한 말에 비올렛은 배시시 웃어보이며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침이라고 해 봤자 거의 점심이다. 이곳 ‘꽃의 거리’의 아침은 늦게 시작했고 밤은 늦게 끝났다. 리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마시다 로즈에게 핀잔을 듣고는 일을 도우기는 시작했다.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주변이 꽃의 거리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이곳이 꽃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홍등가였고 젊은 여성들이 몸을 파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여성들은 꽃에서 따온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로즈(Rose-장미)나, 나시사(Narcissa-수선화), 아이리스(Iris-붓꽃),쟈스민등이 그러했다. 그리고 비올렛(Violet-제비꽃)역시 그러했다. 꽃의 거리, 꽃의 이름을 지닌 여성들, 꽃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은 밤마다 꺾이고, 꺾이고, 또 꺾일 것이다.

비올렛도 그런 미래를 가진 여자아이중에 하나였다. 그 옛날 소박한 꿈을 꾸었던 어린 아이는 사라지고 암울한 미래만 드리워졌다. 이제 점심을 먹고 청소 후에 여자들은 자신들의 얼굴에 새하얀 분을 바르며 또 붉은 루즈를 바를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인 고트 할망구, 마녀라고 불리는 그 여자도 짙게 화장한 후에 이곳을 찾아오는 남자들을 끌어들이겠지. 그리고 그런 여자중에 하나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녀의 미래인 것이다.

세상에서 깨끗하면서도 더욱 깨끗한 걸 모으는 곳이 있는 것 처럼 더러운 것들 중에 더러운 것만 모아놓은 곳도 있는 법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꽃의 거리가 그러했다. 이곳은 온갖 더러움을 모아놓은 진창과 같은 곳이었다. 밤에는 붉은 조명이 반짝이며 손님들을 화려하게 맞아들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들을 찾는 주제에 그녀들을 무시하고 손가락질 한다.

언제나 매질을 당해 익숙하지 못했던 부엌일도, 청소도 익숙해졌다. 언제나 뛰어놀던 들판은 산적들의 습격에 불 타 없어졌으며 부모 역시 산적의 손에 눈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흘러들어온 곳이 이곳이다. 제 욕정하나 풀러온 산적놈 하나가 돈은 변상하지 못하고 비올렛을, 이 아이를 팔아 넘겼다.

고트 할망구의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노예의 낙인이 찍힌 채 귀족님네들의 장난감이 되는 것은 그녀가 산적들에게 붙잡히고 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그녀의 미래중 하나였다. 비올렛은 겪었을 수도 있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덜덜 떨었다.

산적놈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을 때는 지옥이었다. 그곳은 언제나 사내들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가득했으며 그만큼 가학적이며 폭력적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을 가벼이 여겼으며, 비올렛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비올렛은 팔려온 이곳에서 최선을 다했다. 또 산적들에게 붙잡히는 것은 사절이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피가 낭자한 살육은 벌어지지 않았다. 고트 할망구는 너무 무서웠지만 리나는 그녀에게 다정했고, 로즈는 언제나 까탈스러운 듯 했지만 알게 모르게 그녀를 챙겨 주었다. 더럽디 더럽다고 손가락질 하는 곳에도 언제나 온기는 존재했다.

기나긴 꽃의 거리의 밤이 끝나면 여자들은 다시 한 번 부엌에 모인다. 비올렛이 간식을 준비하면 그들은 다시 술을 퍼마신다. 그것은 돈을 세고 있는 고트 할망구의 눈을 피해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사실 고트 할망구가 안다고 해도 그녀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상품이었으며 고트 할망구의 매질을 당한다면 그 상처가 여과 없이 고객들에게 보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신이 우릴 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로즈가 머리카락 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눈과 혀는 술기운으로 이미 풀려 있었다.

“오늘 받은 손님은 신관이었어. 아주 끝내줬지 최악이었어.”

“신관이 여기에 온게 한두번이니? 새삼스럽게. 아, 우리 기사님처럼 멋진 사람만 오면 얼마나 좋아!”

프리지아가 우쭐해 하며 얄밉게 말했다. 그녀는 요사이 찾아오는 매너 좋은 기사 덕택에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 옆에 리디아는 흐느끼고 있었다.

“쟤 오늘 왜 그래?”

“험한 손님을 만났나봐.”

비올렛이 고개를 돌려 쓰러진 리디아를 보았다. 그녀의 팔에는 흉한 매질의 흔적이 그어져 있었다. 마치 그녀처럼.

“그 사람도 신관이었어. 원래 신관 놈들이 더 한다니까.”

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리디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난 여기가 신성왕국이라는 게 밑겨 지지 않아. 왜 성녀님은 나타나서 우릴 구해주지 않는 거지? 왜 저 신관놈을 그냥 두냔 말이야.”

“그런게 있을 리가 있어? 백년동안이나 안 나타나셨다는데. 사실 그런건 다 거짓말일거야. 아니면 신께서 우릴 버렸다든지. 아님 사실 나타나셨더라도 우리 같이 더러운 사람들을 구해주는데 관심없을지도 모르지.”

로즈가 말했다. 리디아는 로즈의 냉소적인 말에 울먹이다 어린 비올렛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비올렛을 보며 울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는 어떡하니 비올렛.”

리디아의 커다란 푸른 눈엔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리디아는 언제나 이렇게 비올렛을 붙잡고 울고는 했다. 사실 비올렛은 그녀의 그러한 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얼굴도 그만하면 됐다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을 걸? 봐, 우리 비올렛의 매력은 보라색 눈이란 말이야. 예쁘지?”

로즈가 말했다. 리나가 그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맞아 우리 비올렛은 눈이 제일 예뻐. 부럽다니까.”

그녀들의 화제는 가장 어린 비올렛이 되었다. 비올렛은 얼굴을 붉혔다. 남자들이 좋아할 거라며 그들은 비올렛의 외모를 칭찬했다. 하지만 비올렛은 언니들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활짝 만개한 꽃봉오리들 같은 아름다운 아가씨들. 더럽다 손가락질 당하는 여자들이지만 비올렛의 세계에서 그녀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우리 비올렛아 이리오렴.”

로즈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비올렛을 꼭 끌어안았다. 일이 끝난 후 나른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이야. 너는 우리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끄덕끄덕. 비올렛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즈는 활짝 웃더니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비올렛은 얼굴을 찡그리며 남아있는 루즈 자국을 슥슥 지웠다. 리나가 그 모습이 귀엽다고 꺄르르 웃었다. 흐느낌 소리는 커졌다. 그들은 한참동안이나 독한 술을 마셨다.

***

퍽! 발길질에 소녀의 몸이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애써 동그랗게 말았다. 그녀의 몽둥이가 비올렛의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로즈가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운이 나빴다. 언제나 그녀들의 작은 다과회를 본체만체 하던 고트는 이번에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그만해요, 우리가 마신거란 말이야!”

“맞아요 그만해요!”

리나와 로즈가 고트 할망구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의 매질은 거세지기만 했다.

“감히 너희들이 술을 훔쳐먹어?!”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비올렛이 숨을 고통스럽게 내쉬었다. 그 가녀린 몸에 자비없이 쏟아지는 폭력에 어린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디아가 또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지아가 혀를 찼다.

“비올렛,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이년들한테 술을 가져다 주지말라고 했지! 땅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몸을 애써 동그랗게 말려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손바닥이 날아왔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흔들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더러운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비며 싹삭빌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그러나 고트 할망구는 그런게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맞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 발길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요사이 고트 할망구는 장사가 안된다고 잔뜩 화가 나있던 상태였다.

“그만해요, 그만하란 말이야! 이러다 애 죽겠어!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그럴게요!”

리나가 옆에서 빌었다. 로즈가 나서서 말했다.

“그깟 술값 내가 내면 되잖아요!”

그녀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고트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로즈는 이 가게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고 가장 지명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그녀는 알게 모르게 팁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다. 로즈는 자기가 하고 있던 비녀를 고트에게 던졌다. 손님이 선물한 사파이어가 박힌 아름다운 은비녀였다. 고트는 그것을 주워들더니 이리저리 살피고는 비올렛에게 말했다.

“너는 오늘 저녁 없다 비올렛.”

고트는 고통에 차마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는 그녀를 남겨두고 바깥으로 나갔다.

*

온 몸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비올렛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옆에 있던 리나가 물좀 떠와 라는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늘은 이상하다. 사실 이정도는 이겨낼 수 있는데. 대체 왜 일어나기가 힘든걸까. 어서 저녁준비를 해야 하는데. 콜록 콜록 거리는 무의식속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 석은 자들.

나직한 분노가 깃든 목소리였다. 그녀는 언제나 꾸었던 꿈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었다. 목소리는 언제나 그녀를 찾아 헤맸고 그녀를 발견하고, 지금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지켜본다. 그녀의 보잘것 없는 삶을 이렇게.

-이제 시간이 되었어.

목소리가 애절하게 변했다.

-이제 깨어나. 아이야.

애원하는 목소리에 깃든 슬픔에 비올렛은 눈물을 흘렸다.

-어서 깨어나서……해줘. 미안해.”

애절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그녀는 손을 움찔거렸다. 왜 저 목소리의 사람은 이리도 애절하게 그녀를 부르는 것일까. 무엇을 해달라기에 이렇게 그녀에게 애원하는 것일까. 그저 그녀는 작고 더러운 소녀일 뿐인데,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일어나, 일어나 비올렛!”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올렛이 눈을 뜨자 울먹이는 리나의 얼굴이 보였다. 비올렛은 몸을 일으켰다. 열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인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머리가 멍했다. 리나가 손을 잡았다.

“리나, 왜? 지금은 일할 시간….”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망토를 입은 로즈의 얼굴이 보였다.

“어서, 도망가야 해, 리나, 어서 깨우란말이야!”

“이상해, 얘가 아픈가봐! 흑!”

“지금은 울 시간도 없단 말이야!”

로즈의 다급한 재촉에 비올렛은 무심결에 창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때와 똑같아. 그녀가 살았던 마을이 산적들에게 습격당했을 대와 똑같다. 불이, 불이 꽃의 거리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그제서야 멍한 정신이 돌아오며 주변에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올렛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몸이 달달 떨렸다.

“어서 달아나자.”

로즈의 말에 리나와 비올렛은 그녀를 따랐다. 가게 밖을 나오니 낡은 가게 역시 불이 좀먹었다. 불붙은 기둥이 바로 리나의 옆을 스쳐 지나가자 리나가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리나의 긴 치맛자락에 불이 붙어 그들은 발로 밟아 그 불을 껐다.

“애들아 여기야!”

그때 리디아가 작은 구석 문을 열며 가게 안에 대고 소리쳤다.

“먼저 도망갔어야지 이 바보야!”

로즈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리디아는 가냘프게 웃었다. 그 점이 마음약한 리디아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뒷문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프리지아가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서 가자! 바보같긴 왜 굳이 그 애를 챙겨서 다시 돌아오는 거야.”

프리지아의 말에 로즈가 화가 나 쏘아붙였다.

“못된 계집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얜 이제 갓 열 살이야! 우리 동생이라고!”

로즈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여자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고트 할망구는 어떻게 되었담?”

“알게 뭐야 차라리 죽으라지 뭐.”

프리지아가 쌜쭉거렸다. 뛰어가고 있는 리디아는 겁에 질렸지만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드디어 여길 벗어날 수 있게 된 걸까?”

“그래.”

리나가 대답하며 웃었다. 누군가 쫓아올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목숨을 건진다면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나마 구석진 가게라 다행이도 그들은 산쪽으로 갈 수 있었다. 이 산맥을 넘어간다면 이 나라의 수도가 나온다. 그녀들은 그 기대감에 처음으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신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 밤은 그녀들을 속박했지만 오늘만은 그녀들을 지켜주리라. 로즈는 빚에서 벗어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리나 역시 다른 일자리를 찾아 볼 거라 했다. 프리지아는 그 기사님께 찾아가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리디아는 무엇을 할지 가서 생각해 보겠다며 웃었다.

비올렛은 로즈가 자신의 손을 꼭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매질을 그만 받아도 된다는 사실에 활짝 웃었다. 그 때였다. 그녀들은 숲 바깥에 보이는 횃불들의 모임에 깜짝 놀라 멈춰 서 있었다. 위협적인 붉은 횃불이 어두운 숲을 물들였다.

그리고 더욱 더 위험한 것은 갑옷을 입고 있는 무리들이었다. 스무명 남짓 되어보이는 남자들은 전부 다 칼을 매단 채 도주하는 여자들의 무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안심했다. 그것은 산적들의 모습이아니라 왕국군의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몇몇은 익숙한 얼굴이기도 했다. 겁에 질렸던 그녀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왕국군에 겁을 먹다니! 분명 산적들을 제압하러 온게 틀림없었다. 그때 프리지아가 활짝 웃더니 백마를 탄 기사 앞에 섰다. 비올렛도 몇 번 본 얼굴이었다. 그가 바로 프리지아의 기사님이었다.

“세상에, 윌, 여기 있다뇨! 당신을 찾아가려고 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금발의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비올렛은 그 표정이 풀리지 않자 불안함을 느꼈다. 활짝 웃는 프지지아에 비해 그녀의 고객이었던 기사는 그동안 봐왔던 표정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나와 로즈 역시 비올렛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 비올렛의 손을 꼭 잡았다. 리디아가 왜 저런 표정이시지? 불안하게 되뇌었다. 오로지 프리지아만이 교태섞인 목소리로 명랑하게 이야기 할 뿐이었다.

“오, 나의 기사님! 왜 대답이 없나요?”

그녀의 목소리에 기사는 그녀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은빛의 섬광이 반짝였다. 리디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로즈와 리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올렛, 오직 비올렛만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기사의 커다란 칼이 프리지아의 배를 관통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프리지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피를 털어내던 기사가 그녀들을 바라보며 죽음을 고한다.

“에르멘가르트 후작 가의 명령으로 산적의 잔당을 소탕한다.”

쓰러진 시체, 피, 비명을 지르는 언니들, 그들은 정신을 차리며 달렸다. 어째서, 라는 것도 소용이 없다. 우리가 산적의 잔당이라니, 그들은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변호하려 멈춰 선 순간 저들의 검과 철퇴는 그녀들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않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잘 익은 빵처럼 부풀던 희망은 썩어 문드러져 사라지고 절망만이 남는다. 먼저 창에 꿰뚫린 것은 리디아였다. 로즈와 리나는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리디아의 신음소리를 뒤로 하고 뛰었다. 비올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다시 아비규환인 꽃의 거리 쪽으로 뛰고 있었다. 그때 마을 속에서 몇몇 무리들이 뛰어나왔다. 왕국군의 갑옷이 불빛에 붉게 번쩍였다.

뒤에도, 앞에도 왕국 군이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도망지도 못한 채 공포에 질려 그저 꺅 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앞 방향에서 쫓아온 병사들은 여자들의 조합을 보고 섵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비올렛의 얼굴을 본 그들은 더욱 더 주저했다. 그들이 머뭇거리자 말을 탄 기사가 소리쳤다.

“뭐하는거지? 후작가의 명령을 거역할 셈인가!”

그에 정신을 차린 듯 몇몇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철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누군가가 비올렛을 세게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철퍽한 소리가 들리며 그녀는 자신을 꽉 껴안는 사람의 손이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을 껴안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얼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피가 튀어 비올렛의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의 분수를 그대로 맞았다. 아버지의 목이 잘렸을 때와 똑같다. 그녀는 생각했다.

옆에 비명소리가 들렸고 이내 조용해졌다. 비올렛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로즈이고 누가 리나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머리가 으깨진 채 저만치 날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젠 평생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비올렛도 죽을 것이므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어,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 병사가 휘두르는 철퇴가 그녀의 머리에게 가해질 고통을 생각하며 그것을 눈을 감지도 못한 채로 지켜보았다.

-깨어나!

머리가 아팠다. 이마가 깨질 듯 아팠다. 그녀는 자신이 철퇴를 맞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의 고통과 동시에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신의 품에 안긴 것일까. 이제 죽은 건가? 눈을 멀게만 느껴지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그저 멍하게 서 있엇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시야가 다시 돌아오며 그녀는 아직도 숲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렬한 붉은 횃불이 그녀의 옆에 쓰러져 있는 언니들의 시체를 비추었다. 그리고 시체가 한 구 더. 그것은 분명 언니들을 죽이고 그녀를 죽이려던 남자의 시신이었다. 그가 휘두르던 철퇴에 그 자신이 맞기라도 한 것 처럼 머리가 터진 시체를 바라보며 그녀는 겁에 질린 채 주변의 병사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병사들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말발굽 소리였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가왔다. 몇몇 병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서, 성녀님.”

어디선가 사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슬픈 웃음 소리였다.

============================ 작품 후기 ============================

두번 올려서 죄송합니다아 잘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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