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챕터: 에필로그
눈을 떴을 땐 언제나처럼 병실에 누워 있었다.
비익의 대가인지라 내가 아픈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였다.
“서하야아아아!”
와락, 날 보며 달려드는 다정 언니를 보며 엉거주춤 끌어안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계속 미루다 못해 결국 손이석한테 끌려간 게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언니…… 모습이 왜 그래?”
그게 무슨 꼴이냐, 하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가다듬었다.
그도 그럴 게 다정 언니의 옷은 거의 거적때기나 다를 바 없었고, 머리는 산발이었기 때문이다.
흡사 맨 처음 그녀가 하산했던 때를 보는 것 같았다.
“헤헤.”
“오는 길에 산에서 한바탕 굴렀다.”
뒤이어 손이석이 대신 변명을 해줬다.
글쎄. 하루이틀 구른 것 같지가 않은데.
하지만 다정 언니가 말없이 수긍했기 때문에 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셨네요.”
“병문안차 잠시 온 것뿐이다.”
속세를 멀리하고 산에 틀어박혀 살던 그가 날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지만, 아마 수십 년 만에 다시 도심으로 내려온 것일 터였다.
“언니. 수련은 끝났어? 아예 내려온 거야?”
“응! 다 끝났어!”
환하게 웃는 낯이 그간의 고생을 반증하는 것 같았다.
“이제 서하랑 같이 놀 수 있어……!”
“아직 내 성에 다 차진 않지만.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는구나.”
손이석 기준에서 저 정도면 대단한 칭찬이었다.
“히히. 하산하고 바로 오느라 모습이 좀 그렇네.”
“아냐. 와줘서 고마운걸.”
“네가 입원했단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그래도 많이 다치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걱정끼쳐서 미안해.”
꽤 훈훈한 광경이었다.
손이석이 뒤에서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저 녀석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훈련도 금방 끝날 수 있었지.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냐.’ 하고 핀잔을 주는 것만 빼면.
***
똑똑.
“저희 왔어요~!”
“와, 과일 바구니들 뭐예요?”
반가운 얼굴들이 뒤이어 찾아왔다.
특히나 류라임과 정로운은 따로 재단을 설립하여 나간 뒤로 한창 바빴으니 말이다.
“냉장고도 음료수로 가득하군…….”
신도아가 가져온 음료수를 냉장고 안에 넣으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이들이 과일 바구니나 음료수를 한가득 보낸 탓에 병실이 빈틈이 없었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고마워요.”
“서하 님, 어디 많이 다치신 건 아니죠? 걱정돼서 밤을 꼬박 새웠단 말이에요.”
진통제를 투여한 덕에 온몸을 짓누르던 통증도 많이 가셨다.
사실 몸 상태는 정상인지라 아프다고 하기도 뭣했다.
“멀쩡해요. 입원만 좀 하다가 퇴원할 것 같고요.”
“다행이다!”
“과일 좀 깎아 드릴까요?”
“같이 좀 먹어줄래요? 보다시피 과일이 너무 많아서…….”
나 혼자 다 먹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 말에 정로운이 알겠다는 듯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정로나를 수년간 간호한 탓일까. 그 모습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신도아 씨도 같이 올 줄은 몰랐네요.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
“대장이 아프다는데 얼굴을 비쳐야지.”
“이제는 전청운 씨가 대장이잖아요.”
신도아는 대책 본부에 끝까지 남게 됐다.
윤강백 대신 전청운을 보좌하기로 한 것이다.
“괜찮겠어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윤강백의 광신도나 다름없던 신도아가 그 없는 홍염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이다. 나 역시 스스로 일어서야지.”
더 이상 윤강백에게 집착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게 퍽 듣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 나왔다.
“서하 님! 앞으로 저희 재단에서 여기 소아 병동으로 봉사를 올 것 같은데, 서하 님도 와서 구경하실래요?”
“소아 병동으로요?”
“어린 시절부터 병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많거든요. 그 애들을 위해 여러 가지 공연도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그럴 거예요.”
류라임과 봉사라. 예전이라면 그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싶었겠지만 이제는 옛날 얘기다.
그녀는 나름대로 그 안에서 재미를 찾는 것 같았다.
“애기들이 대장 얘기하는 걸 엄청 좋아하거든요. 류라임 씨랑 애들이랑 되게 잘 놀아요.”
정로운이 그 비결을 작게 속삭여줬다.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헌터가 우상이 되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서하 님이 와주시면 애들도 좋아할 거예요.”
“언제 하는데요? 가능하면 저도 참석하고 싶네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류라임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
-……한편 ‘타르타로스’의 내부적인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국제 연합 측은 이번 사태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밝…….
-이어서 국제적인 빌런 조직 ‘블랙메일’의 수뇌부가 이 타르타로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수사 당국은 아직 조사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
삑.
채널을 돌리자 이번엔 음악 방송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여러 가수들의 공연 가운데 1위 후보로 ‘엘리사’의 이름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기다리면 그녀의 무대를 볼 수 있을 터였다.
삑.
그런데 돌연 TV 화면이 꺼졌다.
“엘리사.”
“당사자 옆에서 이런 걸 보면 어떡해요. 부끄럽다고요.”
엘리사가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직접 보고 왔다.”
에녹이 뒤에서 사과를 깎다 한마디 덧붙였다. 묘하게 자부심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내가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자 황급히 변명을 잇는다.
“그, 그건 오빠가 보고싶다고 졸라서……!”
엘리사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렸다. 나는 에녹이 예쁘게 깎아준 사과를 포크로 먹으면서 조금 더 놀려줬다.
사과로 토끼모양을 내다니. 손재주가 좋은걸.
“아냐. 엘리사. 그럴 수 있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떻게 네 친오빠랑 똑같을 수 있겠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 그럼 한번 초대석을 준비해보긴 할 텐데…… 너무 기대하진 마요!”
엘리사의 기대 반 걱정 반 섞인 얼굴을 보자 묘한 뿌듯함이 가슴속에서 솟아났다.
탑에 갇혀 있던 어린아이가 어느덧 이렇게 성장했는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가사에 담은 노래라서…… 요정님 앞에서 부르자니 민망하단 말이에요.”
“알았어. 가사에 집중해서 들으면 된단 얘기지?”
“안된다니까요!”
엘리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나는 에녹과 마주보고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자기가 놀림받았단 걸 알았는지 엘리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
“오, 지구의 병원은 신기하게 생겼네. 그 기계는 뭐야?”
“에드.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뒤이어 에드문드와 벨제부브까지 들어왔다.
늦은 밤 예고 없는 방문이었다. 에드문드와 벨제부브는 대놓고 움직일 수는 없는 신분이니.
어쩔 수 없이 몰래 밤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특히나 에드문드는 특유의 회색 피부가 말끔히 사라지고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테오도르가 건네준 물건이 제 효험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집에만 있을 땐 몰랐는데, 지구엔 신기한 물건들이 많다니까? 왜 테오도르가 지구를 그렇게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아.”
에드문드가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을 했다.
엘리사와 만난 뒤부터 저렇게 장난스러운 표정도 짓곤 했다.
벨제부브도 그의 그런 변화가 기꺼운지 핀잔을 주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다음엔 엘리사 공연할 때 다 같이 갈까?”
“엘리사가 기겁을 할걸?”
“그래도 노래하는 모습 보고 싶은데.”
아쉬움을 가득 담은 채 중얼거리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요란을 떨었다.
“그, 그 매니저인가? 그걸 하면 엘리사 노래부르는 것도 구경할 수 있고 그러겠지?”
“그렇기야 하지만…….”
나는 살짝 걱정어린 기색을 비쳤다. 그의 임시 신분으로 취직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마! 테오도르한테 부탁하면 될거야!”
어쩐지 만능 척척박사가 된 테오도르였다.
‘어느새 불법의 영역까지 손을 뻗은거야…….’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잔뜩 신나하는 에드문드를 보니 말릴 수가 없었다. 지구로 돌아와서 처음보는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으니까.
벨제부브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별다른 얘기 없이 그를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 날 반쯤 죽어가는 이들이 병문안을 왔다.
“……저 대신 두 분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겠는데요.”
“걱정 마세요. 오늘 병문안을 오려고 3일 철야를 한 것뿐이니까요…….”
백목련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옆에서 박노아도 희게 질린 얼굴로 애써 미소 짓고 있었다.
“……박노아 씨는 이제 개인 연구 진행하고 있지 않나요?”
백목련에게 시달리는 것도 아닐 텐데 안색이 영 나쁘다.
“……하하. 보고 배운 방식이 이런 거라 그런가……. 더 효율이 좋은 방법이 있는데 쓰지 않으면 비합리적이잖아요……?”
자신의 체력과 건강을 갈아 넣어서 효율을 뽑아내고 있단 소리였다.
백목련의 방식을 고대로 배워 간 모양이다.
“좀 누워서 쉴래요?”
“괜찮아요. 그보다 꽤 멀쩡해 보이네요. 또 입원했다고 하길래 반쯤 죽어가는 줄 알았는데.”
어깨를 으쓱, 했다.
진통제를 맞은 덕에 통증이 잦아들어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나보다는 백목련과 박노아가 더 심각해 보였다.
“누워서 좀 쉬다 가세요.”
침대 자리를 비켜주고 간이 침대까지 꺼내줬는데도 둘이 한사코 만류했다.
강제로 둘을 침대에 눕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쿨쿨 골아떨어졌다.
잠에 빠져든 백목련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나는 의자에 앉아서 나무 조각을 다듬었다.
***
백목련과 박노아가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조각을 계속했다.
손이 가는 대로 다듬다 보니 어느새 그럴듯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또 조각이야?”
어느샌가 시야의 끄트머리에 누군가의 발이 잡혔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블랙메일을 잡은 일등 공신이신데. 직접 만나뵈러 와야지.”
살짝 비꼬는 어투였다.
“이운우.”
고갤 들자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온 햇빛이 그의 은발과 부딪치며 아름다운 빛깔을 뽐냈다.
처음 봤을 때보다 한층 성장해있는 그는, 내 마지막 기억보단 앳된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상부에서 조정 결과 나왔어.”
그가 이제까지 열심히 수습하긴 했지만 이번 일은 블랙메일이 얽혀있다 보니 결국 상부까지 보고가 올라갔다고 했다.
“마침 국제 연합에서 비리도 터졌고, 타르타로스랑 같이 블랙메일도 집중적으로 정리할 거라 하더라. 타이밍이 좋았어. 그 덕에 블랙메일을 소탕한 게 국제적으로는 큰 호재라서, 일단 묻고 넘어가기로 했나 봐.”
국제적으로 칭찬받는 일을 내부에서 처벌하기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판단이겠지.
어찌 됐든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부턴 솔직하게 말해. 썸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알겠다니까.”
이운우나 혜원 언니나 그 뒤로 최도윤과 나에 대해서 어찌나 캐묻던지.
심지어 표연원도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떠보는 바람에 아주 이골이 났다.
두 번 다시 그런 핑계는 대지 않으리라 얼마나 다짐했던지.
“어쨌든. 블랙메일도 소탕됐으니 이걸로 넌 자유의 몸이네.”
임시로나마 대책본부에 속해있던 것이 드디어 풀렸다.
뭐, 이운우를 도와 소일거리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얽매여 있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니까.
“이제 뭐 하면서 지낼 건데?”
“그냥 지금하고 비슷할걸.”
무언갈 해야 한다는 강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뭐라도 하면서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는 열망은, 이제 놓아줄 때도 됐다.
누군가가 내게 조언한 것처럼 나는 이제껏 너무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까.
“심심하지 않겠어?”
“그럴 리가.”
나는 은은하게 미소를 띠었다.
벌컥!
동시에 혜원 언니와 표연원이 문을 열고 난입했다.
“언니 왔다아아!”
“간식거리 좀 사왔는데…… 자리가 없네요.”
혜원 언니가 전투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로 바로 달려왔다. 드디어 경호 일이 끝났다며 칭얼거린다.
표연원은 냉장고를 열었다가 멋쩍게 웃었다.
“오, 이게 누구야. 서호 아들내미도 있었잖아?”
“누가 누구 아들이란 겁니까…….”
“서호가 아예 호적에도 넣고 싶어서 난리던데.”
“예? 호적이요?”
이운우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혜원 언니가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하자 그가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았다. 전서호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네. 접니다. 혹시 최근에 전서호 전 길드장님께서 다녀가신 일이……. 있다고요? 예?”
풉!
그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푸흡…… 하하하하하!”
심각한 얼굴의 이운우를 보며 애써 참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운우가 급박하게 통화를 돌리면서 박장대소하는 날 흘겨볼 때까지,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서호 아들내미가 쓸모는 있네. 이렇게 재미도 주고.”
“누나, 이 안에 있는 것들 좀 제가 정리해도 돼요?”
“잠시만요. 제 동의도 없이 어떻게 절차가 그렇게까지……!”
내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
이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살아있길 잘했다니까.
<외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