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고유 스킬은 언제부터 그 주인과 함께하는가?
이전에 학회에서 그런 주제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각성자가 각성하기 전부터 고유 스킬은 정해져 있는 건지, 아니면 각성하는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건지.
그 영향력을 두고 많은 학자들이 고심했다.
지금 와서는 선천적인 기질과 후천적 요인이 적당히 상호작용하여 고유 스킬이 결정된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내 후천적인 요인 중 ‘공간 간섭’과 연관된 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건 처음부터 내가 타고난 능력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선천과 후천 중 선천의 영향력이 더 짙다는 거다.
내 영혼의 단짝은 노이트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전우는 내 고유 스킬일지도 몰랐다.
‘그래. 이렇게 말이야.’
눈동자 안에 푸른 불꽃이 서릴 때마다 이 경이로운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넓어진다.
차디찬 콘크리트 벽, 누군가의 숨결, 심지어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까지.
모든 것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 공간 안에서 신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
‘이사벨라.’
내 친우를 찾아내는 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한 남자와 동행하고 있었는데, 아마 카멜롯일 것이다.
이 둘이 어떻게 함께하게 됐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보다 급한 건 이사벨라를 이 밖으로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경단들의 예측대로 이 건물의 벽 사이사이에 빼곡하게 채워넣은 폭탄들이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파바박!
고개를 갸웃, 하자 순식간에 화살들이 귓가를 스쳐 뒤에 있는 벽에 박혔다.
이사벨라가 어디 있는지 찾았으니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탓.
나는 순식간에 최도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가 흠칫 놀라는 것을 보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목 들어요.”
콰과과과광!
그대로 그를 바닥에 처박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척을 했다. 우선되는 충격은 내 손으로 받아내고, 최도윤이 목을 살짝 들자 직접적으로 머리에 가 닿는 충격이 최소화됐다.
그러나 한 층을 그대로 뚫어버리면서 자연스럽게 마리아와 멀어졌다.
“으으윽…….”
충격을 최소화했다 해도 벽을 뚫어내는 것인지라 최도윤이 고통에 신음했다.
나 역시 손목을 접질렸는지 시큰한 통증이 울려왔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 이게 누구야.”
그런데 밑층에 있던 인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최도윤이 묵사발 나는 꼴을 봤을 텐데. 대단한 배짱이었다.
이제 보니 그의 발치에 쓰러진 인물이 보였다. 민시우가 흙투성이가 된 채로 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옆으로 비키라는 뜻으로 눈짓을 보냈다.
“대~단하신 한서하잖아?”
나는 상대를 모르는데, 상대는 나를 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최도윤을 뒤로한 채 녀석을 마주 보고 섰다. 레게머리에 껄렁한 말투.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모르는 척하지 말라고. 응?”
“미안한데, 나랑 본 적이 있나?”
“뭐?”
그게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살벌하게 구긴 얼굴을 봐도 기억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진심이란 걸 알았는지 그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나다. 팀 칠링의 필립!”
알 것 같기도 하고.
“비르디아 교섭권을 두고 싸웠던 게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난다고?”
그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비르디아의 이름을 듣자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났다.
-오, 우린 팀 칠링이라 해. 난 칠링의 팀장, 필립이고. 저기 1206호에 머물고 있어.
-비르디아 교섭권. 우리에게 넘겨줬으면 하는데.
류라임을 납치한 것처럼 속여서 끝까지 귀찮게 굴던 그 남자였다.
그때와 달리 레게머리가 아니라서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알고 나니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기억났어. 분명 재판에 회부됐다고 들었는데…….”
“맞아. 덕분에 고생 좀 했지.”
헌터의 범죄는 더욱 엄격하게 다스리는 경향이 있으니, 벌써 석방된 건 아닐 거다.
탈옥이라도 한 모양이지.
그가 빌런 조직인 블랙메일의 본거지에서 발견됐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우드득, 우득.
“이거 운이 좋아. 네 녀석하고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야.”
그가 손마디를 꺾자 거창한 소리가 울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필립의 능력은…… ‘신체 강화’다.
가장 단순하면서 활용도가 높은 고유 스킬.
‘피할 순 없겠지.’
한 번만 더 벽을 뚫으면 이사벨라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최도윤을 한 번 더 집어던지는 건 아무리 나라 해도 좀 마음에 걸렸거든.
“말은 더 필요 없겠지.”
그 역시 국제연합에 초청된 적 있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던 헌터다.
최도윤과 달리 쉽사리 당해주진 않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내 상대가 되진 못했다.
“덤벼.”
내 도발에,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후우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고개를 살짝 까딱해서 피해주고, 몸을 숙여 놈의 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키기기긱!
단검으로 목덜미를 베어보지만 역시나 먹히질 않았다.
“내 몸은 바위처럼 단단하거든!”
어중간한 칼질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거겠지.
놈이 공격 직후 무방비 상태인 내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하아아압!”
“윽!”
강한 압박에 척추가 꺾일 뻔했다.
“어때! 이러면 그 잘난 능력도 사용하지 못하겠지?”
공간 간섭의 최대 약점.
생명체와 붙어있는 이상 능력을 발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으득……!
헌터인 내 육신도 강한 편이지만, 고유 스킬이 신체 강화인 필립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점점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네 덕분에 타르타로스도 구경해보고 말이야. 귀한 경험을 했지……!”
각성자들, 특히 최상위 헌터 출신 범죄자들은 일반 교정 시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들을 제재하기 위해 ‘국제 연합’에서 설립한 최악의 교도소.
타르타로스.
소문에 따르면 타인의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고유 스킬, ‘거부’의 사용자가 그곳의 간수라고 한다.
타르타로스는 한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유명한데.
거기서 탈옥했다고?
“으윽……!”
딴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다시 꺼내드는 일이 없길 원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다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노이트…….’
이게 얼마 만일까?
웅웅!
노이트가 잘게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간만에 활약할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것 같았다.
철컥.
노이트를 뽑아들고 필립의 이마에 대고 겨누는 데는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탕!
“으아아악!”
녀석이 깜짝 놀라 날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얼굴을 가리자, 순식간에 총구를 내려 녀석의 발등을 쐈다.
일반 탄환이긴 해도 잠금이 모두 풀린 노이트를 막아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콰직!
“으윽! 으, 으아아아아아!”
중심을 잃고 쓰러진 놈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상처 부위를 짓밟아줬다.
“너 혼자 타르타로스를 탈옥했을 리는 없고…… 블랙메일이 도와줬나?”
“이, 이거 좀 치워! 젠장! 그런다고 내가 말할 것 같…… 아아아아악!”
한 번 더 상처를 후벼파자 아예 바닥을 기다시피 했다.
“말해. 블랙메일이, 국제 연합에까지 손을 뻗은 건가?”
타르타로스는 엄연히 국제 연합에서 직접 운영하는 교정 시설이었다.
그런 타르타로스까지 블랙메일의 손길이 미쳤다면 그건 단순히 타르타로스의 보안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국제 연합까지 블랙메일과 결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게 아냐! 난 그냥, 좀 수상한 제의를 받았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수락한 것뿐이라고!”
그는 횡설수설하면서 자기가 손을 잡은 게 블랙메일인지도 몰랐다고 대꾸했다.
탈옥한 뒤에 어쩌다 보니 블랙메일과 함께 일하고 있긴 했지만, 탈옥을 도운 것도 블랙메일인지는 잘 모르겠단 얘기였다.
‘이름이 좀 다를 수도 있지만 결국 블랙메일이거나, 그들과 손잡은 다른 곳일 게 뻔해.’
하지만 국제 연합이 완전히 블랙메일에 잡아먹혔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당장 이 건물 안에도 있지 않은가.
국제 연합에서 파견된 요원, 카멜롯이.
게다가 그 역시 타르타로스 출신이었다.
***
달칵, 달칵.
금고를 이리저리 매만지는 손길이 바쁘다. 카멜롯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처럼 그것들을 다루고 있었다.
“여기 있는 게 확실한 거야?”
이사벨라는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마주했던 수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분명 여기선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잠시만요. 곧 열릴 것 같거든요.”
“그럼 슬슬 서하한테 연락을 해두는 게…….”
“그러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이사벨라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카멜롯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미 여기 와있거든요.”
“……뭐라고?”
“꼭대기 층쯤에 있을 거예요.”
“왜? 걔가 왜 여길…….”
덜컹.
드디어 금고가 열렸다.
그 문을 활짝 열면서 카멜롯이 뒷말을 이었다.
“당신을 구하러요.”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여길……. 없잖아.”
이사벨라는 금고 안으로 손을 뻗어 서류들을 헤집었다. 그 손을 카멜롯이 제지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굴려도, 안에 있는 건 패물이 아니라 서류 뭉치뿐이었다.
“펜던트가 없잖아!”
“그러게요. 여기 없네요.”
“지금 나랑 장난해? 여기 펜던트가 있다는 소릴 듣고 지금까지……!”
카멜롯이 언제나처럼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대가 없는 호의가 없단 걸 생각했어야죠.”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대응이었다.
이사벨라는 열이 뻗쳐오는 것을 애써 가라앉혔다. 흥분해서 좋을 게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카멜롯이 그녀를 속였다.
하지만 대체 왜? 이사벨라를 속여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특한 그녀의 머리가 대답을 내놨다.
“……서하.”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서하를 노린 거구나.”
왜 부르지도 않은 한서하가 이곳에 있겠는가. 그저 우연히? 그럴 리가.
한서하가 여기에 개입할 이유는 별로 없다.
심지어 오가는 편지를 통해 들은 바로는 이미 은퇴까지 다 끝마쳐서 평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았던가.
이사벨라,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녀 자신과,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카멜롯 정도뿐이다.
“날 펜던트로 꼬여내서, 그걸 이용해 서하까지 끌어들인 거야.”
카멜롯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금고 안에서 서류 뭉치 하나를 거머쥐었고, 동시에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아름다운 사파이어가 번쩍거렸다.
로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펜던트가 그의 손 위에 놓여있었다.
“펜던트는 돌려드리도록 하죠.”
유쾌하기까지 한 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