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친절하네요. 경고까지 직접 해주고.”
투둑, 툭.
이사벨라는 말없이 제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냈다.
“도와줄 필요도 없었겠는데요.”
머리 장식처럼 보이던 것이 끄트머리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이곳으로 실려 오면서 몰래 챙긴 것이었다.
“입 다물어. 카멜롯.”
이사벨라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별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이 엉겨 붙은 탓에 일이 죄다 꼬여버리지 않았는가.
그 반응에 카멜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평범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모습으로 얼굴을 바꿨다.
평소 애용하는, 갓 성인이 된 청년의 얼굴이었다.
“하아. 이렇게 된 거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없겠어.”
본래는 더 버티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려고 했는데.
여기 쓰러진 놈들의 동료가 오면 안에 쥐새끼가 숨어들었단 것쯤은 금방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길은?”
“대충 알고 있죠.”
“안내해.”
오만한 어투였다.
그러나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로도 찬란하게 빛나는 이사벨라의 얼굴이 그 거만함을 이유 있는 자신감으로 보이게 했다.
괜히 그녀가 사교계의 가시 있는 장미로 군림한 것이 아니었다.
“펜던트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한 건 분명 너였잖아.”
카멜롯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썩 못 미더운 태도였다.
이사벨라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일이 정말 귀찮게 꼬여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해외를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세상을 구경한 것까진 좋았다. 그건 분명 이사벨라가 원해 마지않던 일이었다.
어려선 비욘드에, 나중엔 백작가에 매여 살던 그녀에게 이런 자유는 단비와도 같았으니까.
게다가 비욘드에서 손꼽히는 실력은 아닐지라도 일반인들보단 훨씬 강한 무력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소매치기들이 이사벨라의 호주머니를 노렸다가 도리어 혼쭐이 났다.
‘하필이면 그때…….’
험난한 사막을 헤쳐나오니 잃어버린 이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곤 했다.
그를 기리는 편지를 쓰고 부친 직후. 그 상실감에 잠시 넋을 잃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펜던트를 잡아채 달려간 것은!
서둘러 그 뒤를 쫓았지만 추격전 끝에 이사벨라를 기다리고 있던 건 무장강도 수십 명이었다.
‘항복할 수밖에 없었지.’
남들보다 강하다는 게 총에 맞고도 죽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이사벨라는 납치당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순식간에 약으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자마자 한서하를 호출하려고 했다.
그녀의 눈앞에 카멜롯이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그랬을 거다.
모두가 약에 취해 잠들어있는 그 짐칸 안에서 카멜롯이 홀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가위라도 눌린 줄 알았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느껴지는 인기척이 이게 진짜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하고 소리내어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직 약 기운이 덜 빠진 탓이었다.
카멜롯은 쌜룩하니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당신, 한서하와 아는 사이군요.
그게 시작이었다.
이사벨라가 한서하를 부르지 않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와서 얌전히 인질 행세를 한 데는 저 남자의 지분이 상당했다.
-펜던트를 찾고 있죠? 어디 있는지 제가 알아요.
-왜 날 돕는 거지?
-제가 원래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병이 있어서요.
-헛소리하지 말고.
이사벨라의 날선 반응에도 카멜롯은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그럼 한서하 헌터의 친구분이니 제가 호의를 베푸는 걸로 하죠. 나름 안면이 있거든요.
‘베푸는 걸로 하죠’라니. 누가 봐도 그게 본 목적은 아니었다.
이 수상쩍은 사내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지만, 이내 최대한 제힘으로 수습해보고자 마음먹었다.
카멜롯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기 어려운 남자였지만 적어도 이사벨라와 약속한 바는 모두 지켰다.
그 결과로 이사벨라는 지금 블랙메일의 한국 지부에 와 있었고, 여기서 펜던트를 찾아 나가기만 하면 됐다.
‘아직도 이 남자의 본 목적이 뭔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것만 빼면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중간에 머저리들이 끼어들면서 직접 움직이는 시간이 좀 당겨지긴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빠르게 움직여서 일찍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툭.
이사벨라가 머리 장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채로 둘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다른 인질들에게 나지막이 조언했다.
“여기 계속 있고 싶으면 그래도 되는데. 아니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가야지.”
의지가 있다면 이들 중 누군가가 저 머리장식을 집어들고 제 밧줄을 끊어내겠지.
“서둘러. 이놈들이 정신 차리기 전에.”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발걸음을 옮겼다.
끼기기기기긱!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철문이 끔찍한 비명 소릴 냈다.
타악.
문이 닫힐 때까지, 초점 잃은 멍한 눈빛들이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
촤르르륵!
서걱!
“으아아아악!”
날카로운 와이어가 살갗을 파고들어 고통을 선사한다. 유다윤은 꼼꼼하게 놈을 옭아맨 다음 완벽하게 매듭까지 지었다.
덕분에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속박된 다음에야 유다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우!”
마치 농사일을 마친 농부처럼 뿌듯한 얼굴이다.
“서두르죠.”
소하정이 차갑게 일갈했다.
“지하를 지키는 건 어차피 졸개들뿐이라 위험할 일도 없는걸요.”
“인질을 빨리 탈출시킬수록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릴 확률이 높아요. 당장 위에서는 다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일장 연설이 잠시 멈췄다.
심상치 않은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먼저 지나갔네요.”
그들이 손도 대지 않았는데 이미 빌런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대체 누구지?’
소하정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빌런대책본부가 그들의 계획을 먼저 눈치채고 한발 먼저 잠입했을 가능성.
블랙메일과 적대 관계에 있는 다른 빌런 조직의 유입, 혹은 블랙메일의 내분 등등.
무엇 하나 무시할 수 없는 확률들이었다.
“어? 저기 안에 좀 봐요.”
유다윤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복도 끝엔 본래 그들의 목적지인 방이 놓여있었는데, 문에 잠금 장치가 풀려 있었다.
“밖에 보초 서는 놈도 없고. 잠금 장치까지 풀려 있고! 이거 아무래도 먼저 온 사람이 여길 풀어준 모양인데요.”
유다윤의 말에 소하정도 고갤 끄덕였다. 누가 봐도 그렇게 보였다.
“그럼 이미 인질을 놓친 건가……?”
유다윤의 표정이 점점 굳어만 갔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끼기기기기긱!
유다윤이 다급한 손길로 문을 열어젖혔다.
콱!
돌연 공격해오는 누군가의 손길을 잡아챈 다음에야 내부 상황이 눈에 보였다.
“응?”
그들은 모두 구속구를 풀고 손에 무기를 하나씩 쥔 채로 잔뜩 긴장해있었다.
“……저, 저흰 여러분을 구하러 왔어요!”
소하정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구하러 왔다고……?”
“옷이 좀 다르긴 한데…….”
“……진짠가……?”
술렁술렁.
저마다 작게 속닥거린다. 이들을 모두 제압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게다가 바깥으로 대피시키려면 멀쩡히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게 좋지 않겠는가.
결국 유다윤과 소하정은 자신의 신분증과 자경단 소속 배지까지 보여준 다음에야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살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울면서 감격하는 이들도 있었고.
“왜 이제야 온 거예요…….”
“너무 늦었습니다. 제 아이는 이미…….”
갈 곳 잃은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설득해서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묶여 있던 건 누가 풀어준 건가요?”
유다윤의 질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눈을 굴리며 서로 눈치를 봤다.
“솔직하게 얘기해주세요. 우리가 오기 전에 다른 분이 먼저 왔었나요?”
소하정까지 합세하자 결국 맨 앞에 있던 이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게…… 그, 원래 같이 여기 잡혀있던 사람 둘이 여기서 빠져나가라고 도움을 줬습니다.”
“네?”
“잡혀있던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아니. 그보다 그럼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유다윤의 추궁에 그는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이실직고했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그냥 빠져나가고 싶으면 뭐라도 하라고 하면서 이걸 주고 가셨거든요. 어디로 향했는지는 저도 잘…….”
유다윤과 소하정은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일이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해서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대피시켰는데, 안에 두 명이 더 남아있는 상태예요.
휘이익!
석궁에서 쏘아져 나온 화살을 피해내면서 허공을 빙글, 한 바퀴 돌았다.
대꾸하지 않아도 귓가에선 게속해서 현장 보고가 울렸다.
-어디로 향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부에서 둘을 발견하면 신속하게 바깥으로 안내해주길 바랍니다. 아직 그들이 남아있는 이상 신호탄을 쏘아올릴 순 없어요.
-아니, 걔네가 누군 줄 알고~? 여기 널린 게 빌런인데~.
활 끝과 연결된 와이어가 이리저리 얽히면서 치밀한 함정을 만들어낸다.
그걸 알면서도 최도윤이 유인하는 대로 몸을 피했다.
스윽.
“아.”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는데 사방이 전부 와이어 천지였다.
체크메이트다.
코앞에서 최도윤이 내게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인상착의를 들은 게 있어요! 전부 숙지해주세요!
분명 싸우는 시늉만 하기로 했는데. 최도윤이 너무 진심으로 덤벼들고 있었다.
실감나게 싸우는 게 본 목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이 되지도 않는 노림수에도 장단을 맞춰주고 있지 않은가.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에, 키는 중간 정도.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으니 지금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슈우우욱!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탁! 잡아챘다.
그럴 줄 알았는지 최도윤의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그걸 유도했다는 듯이. 화살과 연결된 와이어를 통해 전류를 흘려보낸다.
파지지지직!
제법 따끔한걸.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날 상처 입힐 수 없다.
그걸 알았는지 최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화력이 부족하다.
이래 봬도 ‘낙뢰’의 이운우와 수십 번도 넘게 합을 맞춰봤거든. 개조한 테이저건 정도 수준으론 우습기만 했다.
-여자는 가슴께까지 오는 빨간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해요!
이제 장난은 그만둘 때였다.
서걱.
단검으로 와이어를 끊어내자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던 전류도 잦아들었다.
‘……이사벨라.’
거기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