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왜 그래요?”
“아뇨. 잠깐 귀가 가려워서.”
“뭐예요. 집중해요.”
누가 내 얘기라도 하나. 귀가 가렵길래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둘러대기도 애매해서 그냥 말없이 빠져버렸는데. 괜찮겠지?’
어차피 그 자리의 주인공은 혜원 언니와 전서호 아니던가. 그 둘의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니 나 하나쯤 빠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거다.
애초에 사적인 자리이기도 하고.
‘이운우가 적당히 둘러대주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할게요.”
소하정이 지도를 펼쳐 보여줬다.
“인질이 있는 위치는 바로 여기.”
탁, 손가락이 지도 위를 짚었다.
“지하 1층. 그것도 가장 안쪽 방이에요.”
진입하기 까다로운 곳이었다. 지하는 자칫하면 건물이 무너져내리면서 그대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인질을 구하러 저랑 유다윤 씨가 먼저 들어갈 거예요. 그 사이에 다른 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적들의 시선을 끌어주시면 되고요.”
이 작전은 특히나 나와 최도윤의 역할이 중요했다.
“아마 저 건물도 폭탄이 숨겨져 있을 거예요. 인질들이 전부 빠져나오기 전까지는 건물이 무너져선 안 돼요. 알겠죠?”
소하정이 우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마리아가 이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건 막아야 한단 소리다.
그 말인즉슨 마리아가 우릴 이길 수 있을 것처럼 연기를 실감나게 해줘야 한단 이야기였다.
“전원 탈출하면 신호가 울릴 거예요.”
그게 바로 반격의 시작일 것이다.
“할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극의 연출은 나도 몇 번 경험이 있거든.
테오도르의 데뷔 무대도 그렇고. 5황자의 즉위식도 그러했으니까.
***
휘영청 달이 떴다.
하얀 빛이 은은하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환한 빛은 아니어도 어둡지 않은 정도는 됐다.
타칭 ‘마리아’는 그 정취를 무척 아꼈다.
특히 고요한 달밤에 홀로 창문을 내려다보며 운치를 즐기는 건 그녀의 바쁜 일상 속 몇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낯선 인영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모처럼 느끼는 달빛의 여운을 한껏 즐겼으리라.
“이런 야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마리아가 작게 속삭이자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일전에 그녀도 본 적이 있었다.
저 서슬 퍼런 눈빛과 한번 마주하면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으리라.
“한서하…….”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다시 보게 됐네요.”
생긋 웃으면서 다른 한 손을 뒤로 감췄다. 여차하면 딱, 손가락을 튕겨 이 방을 폭파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소리도 없이 다가온 한서하는 공격 대신 질문을 던졌다.
“블랙메일은 좀도둑질도 하나?”
“그런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말이죠.”
“내 친구가 물건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하던데.”
뜬금없는 서두였다.
대체 뭘 말하는 걸까?
마리아는 차분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그럼 그 물건을 되찾으러 이 야밤에 여길 찾아오셨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아주 귀한 물건인가 보네요.”
한서하가 이렇게 직접 행차할 만한 물건이라. 대체 뭘까?
하지만 블랙메일 본부에서 자금을 일부 지원받은 것 말고는 딱히 ‘물건’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한서하가 찾는 게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하지만 착각하게 둬서 나쁠 건 없지.’
뭔진 몰라도 꽤 귀한 물건 같은데, 그걸 이용해서 한서하의 목줄을 잡을 수만 있다면야.
가벼운 블러핑 정도는 마리아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글쎄요. 생각나는 게 딱히 없는데. 제가 요즘 깜빡깜빡하는 게 많거든요.”
생긋 웃으며 뒷말을 잇는다.
“혹시 또 모르죠. 한서하 헌터가 제게 친절하게 굴어주면 기억이 되살아날지도요?”
그 대꾸에 한서하의 얼굴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친절하지 않나?”
다짜고짜 칼이나 총부터 들이민 게 아니니 그렇다고 봐야 할까.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마리아도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게, ‘그’ 한서하였다. 지금까지 공들인 게 저 여자의 손에 단번에 스러질 수도 있었다.
여길 폭파시키면 제 한 몸 건사할 수야 있겠지만. 블랙메일에 그 실패의 값을 몸소 치러야 할 것이다.
‘그건 안 되지.’
마리아는 이 즐거운 유희를 일찍 끝낼 생각이 없었다.
“펜던트는 어디 있지?”
펜던트. 한서하가 찾는 게 펜던트였던 모양이다.
대체 왜 그런 걸 골동품점이나 보석상에서 안 찾고 여기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애써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기억이 안 나는걸요?”
“그럼 뭘 원…….”
휙.
한서하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뭐지?’
의아함도 잠시. 마리아 역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소리는 뭐지?’
푸욱, 퍽!
그건 아주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저 문 너머에서부터 말이다.
처음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크헙……!”
문 바로 앞에서 누군가 내뱉은 단말마의 신음을 들은 다음에야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침입……!”
콰아아아앙!
방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털썩, 기댈 곳을 잃은 부하가 무너진 문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최도윤!’
문 조각을 즈려밟으며 나타난 사내 역시 마리아가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밀레니엄을 직접 운용하던 때부터 어찌나 귀찮게 따라붙던지!
실제로 마주한 적은 처음이지만 보고서를 통해 지겹도록 들은 바 있었다.
‘둘이 한패였나.’
한서하가 단독 행동을 했으리라 생각한 게 큰 착각이었다!
‘헌터랑 자경단은 사이가 안 좋을 텐데. 대체 언제 손을 잡은……!’
촤아악!
그 순간 한서하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단검이 순식간에 최도윤의 목덜미를 노렸다.
최도윤이 황급히 뒷걸음질 친 덕에 목은 건사했지만, 옷자락이 베이면서 살짝 핏방울이 맺혔다.
“보아하니 내가 친절을 베풀 일이 생긴 것 같네.”
한서하가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이 정도로 호의를 베풀면 잊은 기억 정도는 되살릴 수 있겠지. 안 그래?”
계산은 빨랐다.
최도윤과 한서하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큰 일이었다.
이 건물 전체를 폭파하는 건 참 아까운 처사였으니까.
그런데 때마침 한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카드가 한 장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거짓으로 만들어낸 카드일지언정 없는 것보단 나았다.
‘둘이 싸우도록 내버려 두고 둘 중 살아남은 쪽은 내가 마무리를 짓는다.’
그게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멀쩡한 상태의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물론이죠.”
마리아의 동의가 떨어지자 한서하는 곧바로 최도윤에게 달려들었다.
채앵!
한서하의 단검과 최도윤의 석궁이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퍼졌다.
“당신이 왜 여기에……!”
최도윤이 당혹스러운 듯 소리쳤지만 한서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후우욱!
“제길!”
그는 바닥을 굴러가며 한서하의 공격을 피해냈다. 아까의 당당한 기색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것 참.”
마리아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작게 웃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창가로 비쳐 든 달빛이 은은하게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달빛마저 그녀를 축복하는 것 같았다.
***
철컥.
끼이이이익.
철문이 열리면서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댔다.
잔뜩 녹슨 경첩이 시끄럽게 덜컹거렸다.
그 틈새로 작은 빛이 새어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줄기 빛이 비치자 눈이 부셨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철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게 보였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둘러보더니 이내 이사벨라와 눈을 마주하고는 안색이 확 밝아졌다.
예감이 좋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다른 사람들을 휙휙 지나서는 이사벨라의 앞에 섰다.
“찾았다. 이 녀석이라고!”
그가 소리치자 문 밖에서 망을 보던 다른 놈들도 차례대로 고갤 내밀었다.
“캬~. 진짜네! 예쁘장하게 생긴 게, 어디 팔아넘기면 돈이 짭짤하겠는데…….”
“괜찮은 거 맞아? 아무리 그래도 조직 소유인데 함부로 건드렸다가 잘못되면 어쩌려고.”
“걱정 마셔! 어차피 죄다 죽을 놈들인데. 한 명 사라진다고 신경이나 쓰겠어?”
‘죄다 죽을 놈들’이라는 대목에 다른 이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사벨라는 말없이 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어쩐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귀걸이를 이용해서 한서하를 호출할 수 있었다.
공간을 넘나드는 그녀라면 눈 깜짝할 새에 이곳에 도착하겠지.
과연 지금이 옳은 타이밍인가. 이사벨라는 잠시 속으로 가늠했다.
“크흐흐……. 본부에서는 이놈들을 생체 폭탄으로 만들어서 어디 써먹으려는 것 같지만 말이야. 이런 얼굴을 하고서 폭사하는 건 좀 아깝지 않겠어?”
놈이 우악스럽게 이사벨라의 턱을 들어올렸다.
사지가 결박된 상태라 목이 잔뜩 당겨져 뻐근했다.
“이거, 눈빛 봐라?”
형형히 빛나는 이사벨라의 두 눈은 다른 이들과 달리 확연히 빛나고 있었다.
아직 생기를 잃지 않은 눈빛이었다.
“눈 뽑아버리기 전에 얌전히 구는 게 좋을 거야.”
그 눈빛에서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저항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녀석이 위협적으로 손을 놀렸다.
검지와 중지가 이사벨라의 눈 바로 앞까지 훅, 다가왔다 뒤로 물러난다.
질 나쁜 장난이었다.
“햐, 이거 이래도 눈 안 감는 거 봐. 성깔 좀 있는데?”
“어이, 냅둬. 원래 저렇게 앙칼진 구석이 있어야 더 재밌는 거 모르냐?”
“제까짓 게 버텨봤자지.”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킬킬대며 웃는다.
그 속에 담긴 저열한 뜻을 모르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의 모욕에 감흥을 느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지 못했다.
무덤덤한 얼굴은 한 치도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도리어 놈들의 성질을 건드렸는지 점점 기세가 사납게 변했다.
“한번 성질 좀 죽여놓긴 해야지. 반항하면 골치 아프다고.”
누군가에게 변명이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자기합리화로 얼룩진 발언에 다른 놈들도 재빨리 동의를 표했다.
“으브브븝.”
이사벨라가 재갈을 문 채로 무어라 대답했다.
순간 녀석들 사이로 벼락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뭐라고?”
“으브븝.”
“야, 재갈 좀 풀어봐.”
“혀 깨물면 어떡해?”
“저게 어디 죽을 놈 눈빛이냐? ……풀어봐.”
그 말에 마지못해 한 명이 이사벨라에게 다가왔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탐스럽게만 보였던 붉은 머리카락이 이제 보니 좀 섬뜩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직감한 이 여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마지막 저주라도 남기려는 건가?
퉤.
그가 매듭을 풀자 이사벨라가 재갈을 스스로 뱉어냈다.
“그래. 어디 한번 말…….”
“뒤.”
“응?”
“뒤를 조심하라고.”
그 말을 이해할 새도 없었다.
퍼억!
강렬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고, 그대로 까무룩 시야가 뒤집혔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