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351화 (351/361)

351화

“헌터는 대인 전투에 약한 줄 알았는데…….”

국지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상위권 헌터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톨룩에도 지성을 가진 생명체는 있거든요.”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단순히 ‘지성’을 가졌다고만 하기 어려울 정도였지.

사실상 톨룩의 인류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생물학적인 구조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고위급으로 갈수록 더 그렇죠.”

“힘이 강할수록 몬스터도 인간형에 가까워진다고 듣긴 했어요.”

“뭐, 그런 거죠.”

마왕도 여기 건너와서 살고 있단 건 꿈에도 모르겠지.

종종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엘리사가 톨룩 출신이란 것도.

“이거, 그냥 우리 둘이 했어도 되는 거 아니었을까.”

국지성이 최도윤에게 작게 속삭였다.

“잠깐은 버틸 수 있었겠지. 하지만 아마도 저 많은 수를 둘이서 상대하긴 어려웠을 거다.”

최도윤이 객관적으로 평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나야 1대 다수로 싸우는 일이 익숙하니 쉽게 처리한 거고.

“어쨌든 협력하게 됐으니 잘 부탁해요.”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국지성 앞에서 나는 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미안하지만 앞으로 볼 일이 많을 것 같다.

***

한서하가 돌아간 뒤 나머지 인물들의 뒤처리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검토해보라며 서류 파일을 넘기고서.

위치를 들킨 마당에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둘은 중요한 자료들만 챙겨 서둘러 포맷했다.

종이는 태우고, 컴퓨터는 복원하기 어렵게 바이러스를 심었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국지성이 툭 내뱉었다.

“괜찮겠어?”

“뭐가.”

“헌터랑 협력하는 거.”

자경단들이 헌터와 사이가 안 좋은 거야 놀라울 일이 아니지만.

국지성이 보기에 한서하는 헌터치고 나쁘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녀의 명성과 별개로,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이란 게 느껴졌으니까.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 그런가. 뭔가 시원시원하더라. 잔머리 굴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국지성은 짧게 덧붙였다.

“돈만 쫓아서 헌터가 된 것 같진 않았어.”

그의 눈빛이 낮게 침잠했다.

“……내 형과 다르게.”

“국지성. 딴소리할 시간 있으면 소하정 씨한테 연락이나 넣어. 급하게 몸 누일 곳이 필요하다고.”

“지금 너 걱정하는 거잖아!”

최도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난 괜찮아.”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 뭘.”

“괜찮다니까. 그리고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이미 협력하기로 한 마당에.”

한서하가 보여준 무력은 대단했다.

최도윤도 나름대로 실력을 키우려 애를 썼지만, 늘 쫓기는 형편에 맘 놓고 수련을 할 새도 없었다.

더구나 각성자란 무릇 게이트에서 태어나는 존재인 법.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은 각성자는 능력치 상승에 큰 제한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총은 꺼내지도 않았어.’

그녀의 주무기가 SSS급 아이템이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총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야 게이트 밖에선 제아무리 헌터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되니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도 제 목숨이 위험하면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여유로운 거야.’

목숨의 위협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은 거다. 족히 서른이 넘는 인원을 상대하면서.

‘그야말로 괴물…….’

헌터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헌터란 건 알고 있지만.

그 또래로 보이는 얼굴과 마주할 때면 도무지 믿기가 않았다.

“그냥 확 잠수 탈까?”

“여기까지 쫓아온 거 보면 모르겠어? 우린 이미 손바닥 안이야.”

“질린다, 질려.”

국지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몰라. 그쪽에서도 큰 건이 곧 있으리란 걸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한서하 헌터만 데려다 쓸 수 있다면 전력은 문제없겠네.”

“자료 옮기고 다른 자경단들하고 연락해서 이번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의논해보면 되겠지.”

“오케이. 하정이한테 얘기해둘게.”

피할 수 없는 위기라면 기회로 바꾸는 편이 현명하다.

최도윤은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손을 잡고 블랙메일을 일망타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침착하자.’

그는 절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아냈다. 과거의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머리로는 알잖아. 그들의 잘못이 아니란 걸.’

차갑게 식은 머리가 이성적인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런데도 자꾸만 속이 매스꺼운 이유는 무엇일까.

‘게이트…….’

그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하얀 꽃과 붉은 핏자국.

길게 이어진 손톱자국.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구불거리는 암녹색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더 곱슬거리는 건 아마 착각이 아닐 거다.

엉망이 된 연구실 상태가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래서.”

내가 말문을 열자 테오도르가 크게 움찔했다.

“이게 무슨 일이라고?”

“실험 도중에 생겨난 가벼운 해프닝이었다!”

“내가 아는 해프닝의 범주에 폭발은 없었는데…….”

“뭘. 최근에 네가 건물 하나 날려 먹었단 얘긴 이미 들었다.”

아니 그걸 누구한텐 들었단 말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차준이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보나마나 테오도르가 이런 이야기에 귀가 밝을 리는 없고. 누군가 옆에서 들려준 이야기일 게 분명했다.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었다고…….”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아니라 연금술 재료들이 일부 실수를 한 것뿐이지.”

당당하기 그지없으니 더 화낼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결과는?”

“물론 대성공이다!”

테오도르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역시 내 천재적인 감각은 숨길 수가 없구나! 한정적인 재료로 이렇게 극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부터가 내 진가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일단 부탁을 한 쪽은 나였기 때문에 자기 자랑도 참고 들어주었다.

“자, 여기 있다. 일시적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귀걸이.”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입에 발린 말을 해주자 테오도르가 뿌듯하게 웃었다.

“시간 제한이 걸려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할 거다! 사용자의 피를 흡수하는 방식이니 귀에 꽂으면서 변하고 싶은 모습을 강하게 생각해줘야 한다.”

“3시간이라 했지? 알겠어.”

“게다가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변할 순 없다. 고작해야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색깔 같은 걸 바꾸는 정도야.”

내가 원한 것도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건 누구에게 주려고 그러느냐? 엘프 남매의 것은 이미 만들었을 텐데.”

“에드문드에게 주려고.”

“그에게?”

테오도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집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 않았더냐.”

“최근에 상태가 제법 좋아졌거든. 엘리사의 공연을 보러 가고 싶어 하는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허가를 해줄 것 같진 않아서.”

몰래 다녀오게 하려면 최소한 피부색이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톨룩에 있었을 때처럼 붕대를 둘둘 두르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의 회색빛 피부는 할로윈이 아닌 이상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다.

“상태가 괜찮아졌다면 조만간 나랑 학술적인 토의를 나누자고 청해도 괜찮겠군! 지적인 대화는 언제나 내게 영감을 가져다주는 법이니까.”

“에드문드한테 물어보긴 할게.”

아마 그도 흔쾌히 좋다고 응할 것이다. 에드문드도 테오도르와 나누는 이야길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에드문드도 그렇고, 너도 이제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나?”

내가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테오도르가 고갤 끄덕였다.

“난 원래 잘 지냈는데.”

“할 일이 없어 초조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더냐.”

“……티가 많이 났어?”

한창 이것저것 배우러 다닐 때의 이야기 같았다.

지금이야 취미로 조각도 하고 있고, 어쩌다 보니 빌런 쫓는 일에도 휘말려서 다시 바빠졌지만 말이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법이지.”

꼭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말을 한다.

“그래도 넌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으니 다행이야. 과거에 발목을 잡히는 것보단 백번 낫구나!”

다른 누군갈 생각하는 듯한 어투였다.

5황자? 아니면 그 자신을 염두에 두고 말을 꺼낸 걸지도 몰랐다.

테오도르 역시 댄버라는 과거에 사로잡혀 클로에에게 죄책감을 가졌었으니까.

“……네 일이라면 과거에 발목 잡혔다기보단…….”

“응?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그가 생뚱맞은 소릴 한다는 듯 날 바라본다.

“세드릭 경에 대한 얘기였는데.”

“세드릭 경?”

“그래. 시온의 호위기사 말이다.”

아니, 그가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와 놀란 거지.

“세드릭 경이 왜?”

“결과적으로 시온, 그 애가 황제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원래는 황태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을 아이 아니더냐. 그런데 세드릭 경 정도 되는 실력자가 다른 황자의 편에 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상하다 생각한 적이 있긴 했다.

세드릭의 실력은 다른 황제의 기사들 못지 않은 수준인 데다, 5황자를 황제로 만들고자 했던 걸 보면 욕심이 아주 없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그가 5황자에게 매여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 건데?”

“말하자면 얘기가 길다만…….”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황궁 내에서 비밀도 아니었다며 이야길 이었다.

“시온은 나와 배다른 형제라 어머니가 다르다. 그 애 어머니가 3황비 되시는 분이었는데, 황비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세드릭 경과 혼약이 오가는 사이였다.”

“뭐? 근데 왜 갑자기 황제랑 결혼하게 된 거야?”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컸지. 하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둘은 결혼이 거의 확정된 사이였고…… 어려서부터 함께하며 감정이 깊었다고 하더군.”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연인이 갑자기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됐단 걸 알면 누구라도 절망할 것이다.

“그럼 그 아들인 시온의 곁에 남은 게 설마…….”

“그래. 세드릭 경은 그 뒤로 결혼도 하지 않고 3황비의 호위기사로 남았지. 시온을 낳으면서 3황비가 명을 달리한 다음부턴 그 애의 곁을 지켰고.”

그런 내막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세드릭이 시온을 여간 아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미련한 짓이지.”

테오도르는 세드릭의 순애를 그렇게 평했다.

“황비가 된 이상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황궁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인데.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평생을 바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애달픈 짝사랑을 한번 목격했던 바 있었기에 그저 침묵했다.

천하의 윤강백도 모든 책임을 뒤로하고 꿈속을 헤매게 만들던 것이 바로 이 사랑이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