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챕터: 끝나지 않는 밤
극심한 불안 증세. 불면증에 자꾸만 악몽을 꾼다고 했다.
은퇴한 헌터를 여럿 맡았다는 숙련된 정신과 전문의도 에드문드의 상태가 자못 심각했다고 일렀다.
지금은 많이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일상생활을 겨우 영위하는 수준이었다.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놨다.
테토가 말없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솜씨가 많이 늘었네.”
“진짜요?!”
“응. 예전에 귀족가에서 머무를 때 받았던 거랑 비슷한 수준 같은데.”
“다행이다! 원래 차 시중은 카뤼센 님 전담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많이 서투르…… 헙.”
테토가 말을 하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콱 틀어쥐었다.
그러곤 벨제부브의 안색을 살핀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에드문드는?”
“잘 지내고 있다. 겨우 잠든 참이니 양해해주기 바란다.”
바깥에 해가 중천이었다.
근데 이제야 잠들었다니. 에드문드가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전보다 많이 나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에드문드 본인의 의지가 강력하고.”
“다행이네. 뭐라도 살아갈 이유가 있으면 강해지기 마련이니까.”
부디 이 지구에서 그가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할 텐데.
벨제부브가 옆에서 돕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세상의 종말을 목격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와 내가 아는 에드문드는 귀가 잘려 추방당한 처지일 때도 꿋꿋하게 잘 버텨내던 이 아닌가.
“마족이나 엘프에게 시간은 찰나와 같지.”
벨제부브가 불쑥 그런 이야길 꺼냈다.
“고작 몇 년 정도는, 우리 기준에서 순간과 다를 바 없단 이야기다. 에드에겐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시간의 관념이 다른 만큼 너무 걱정하지 말란 의미 같았다.
몇 개월째 방황하는 그를 보며 내가 내심 속을 끓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겨내겠지. 강한 사람이니까.”
“그건 그렇고,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지?”
에드문드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이들의 집을 외진 곳에 구해준 탓에 자주 왕래하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을 지구까지 끌고 온 것이 나였으니. 도의적인 책임감이 뒤따랐다.
“잘 지내고 있나 해서.”
“에드라면 내가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에드문드도 그렇지만, 당신 말이야.”
내 말에 벨제부브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우울은 전염되는 법이니까.”
늪에 빠진 이를 도우려다 도리어 그 늪에 풍덩 잠겨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정신이란 그렇게 섬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날 걱정할 줄은 몰랐는걸.”
조르륵.
벨제부브가 찻잔을 옆으로 밀자 테토가 능숙하게 차를 따랐다.
나도 찻잔을 내밀자 약간 고민하더니 차를 따라주었다.
테토의 직속 주인은 벨제부브지만, 벨제부브의 주인은 나이니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을 자유롭게 거닐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여기 갇혀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원한다면…….”
“아니. 인간들하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군.”
그가 살짝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체 마족들은 인간을 낮잡아보는 경향이 있었다.
뭐, 우리가 돼지나 소를 보고 우리와 동등하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말이다.
“나도 인간인데.”
“넌 다르지.”
그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가식적이다.
“내 주인이지 않나.”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아들고 복종의 표시로 제 이마를 가져다 댄다.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탁!
황급히 손을 빼내고 정색하는 얼굴을 보여주자 벨제부브가 ‘너무하는군.’ 하고 작게 투덜거렸다.
“원래 나는 마계에 있을 때도 성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여긴 성보다 훨씬 비좁긴 하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지.”
테토의 도움이 크다고 덧붙였다.
“벨제부브 님……!”
테토가 감동이라는 듯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혜원 언니랑 같이 있을 땐 언니가 어린아이 같은 테토를 부리는 걸 무척 못마땅해했었다.
그래서 손수 집안일을 하곤 했는데. 여기선 테토가 도와주니 훨씬 편한 모양이다.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고. 에드문드를 못 봐서 아쉽긴 한데…… 깨어나면 엘리사가 안부를 물어봤다고 전해줘.”
“엘리사?”
혁명군과 함께 성에서 지낸 시간이 적지 않을 텐데 엘리사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에드문드는 알걸. 그, 사라졌다고 잠시 난리가 났었던 그 엘프의 여동생 말이야.”
“기억나는군. 에드랑 가깝게 지내는 것 같긴 했지.”
잘은 몰라도 엘리사가 의기소침하던 것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나아가는 데 에드문드가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에드문드가 지구로 넘어온 이후로 치료에 전념하느라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알겠다. 전해주지.”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나는 주섬주섬 선물용으로 가져온 것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건 뭐지?”
“석고 방향제.”
“박쥐 모양인 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냥 인상 깊었어서.”
장난스러운 말투를 하자 내가 그를 놀리고 있단 걸 알았는지 눈매가 사나워졌다.
“다음엔 엘리사랑 같이 찾아올게!”
나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다.
벨제부브가 무어라 입을 뻐끔거리는 것 같긴 했지만, 이미 공간을 넘어가는 중이라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
아름다운 음악과 챙, 챙, 하고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저마다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고 사교를 즐기고 있었다.
전청운의 취임식은 비공식 행사였지만 제법 성대하게 열렸다.
‘그래서 홍염이다 이건가.’
연회장 내부가 붉은색으로 장식된 것을 보니, 아직까지도 홍염의 정체성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정부에서 내정해준 인물이 아니라 전청운이 그대로 취임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자치권도 인정받은 듯했다.
홀짝.
나는 알코올이 거의 없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구석 자리에 서 있었다.
공식 자리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게 헌터의 정신이었으므로 정장 바지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허리춤엔 단도와 노이트가 함께하고 있었고.
“한서하 헌터. 와줘서 고맙군.”
한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이가 내게 다가왔다.
“윤강백 길드장님.”
“이젠 길드장도 아니네만.”
“저도 이젠 헌터가 아니지만요.”
그 말에 우리 둘 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호칭이 완전히 틀려먹지 않았나.
“신도아 씨도 간만에 보네요.”
윤강백의 옆에 파트너로 참석한 사람이 바로 신도아였다.
평소와 달리 우아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붉은색을 포인트로 한 귀걸이가 무척 잘 어울렸다.
팔다리에는 장신구가 일절 없는 것을 보아 그녀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매로 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랜만이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다곤 들었다.”
“뭐, 그렇게 됐죠.”
그녀는 현직으로 일하는 중이라 그런지 이미 내 소식을 아는 눈치였다.
“아직 한창이신데 벌써 은퇴하실 줄은 몰랐네요.”
“서호 그 녀석에 비하면 한참 늦었지.”
“전서호 전 길드장님은 너무 일렀잖아요.”
“이제 게이트도 없는데 질질 끌어봐야 무엇 하겠나. 청운이한테 일찌감치 물려줬어야 했는데. 내 욕심으로 자꾸 늦어졌군.”
회귀 전에도 전청운이 홍염의 수장이 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거의 길드장처럼 활동하긴 했지만. 그건 아마도 윤강백이 회귀 전에는…… 미처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홀짝.
나는 칵테일과 함께 뒷말을 삼켜냈다.
“은퇴하고 나선 어디로 가실 건가요?”
“글쎄다. 나도 아직 확실하진 않구나!”
“네? 계획이 없으시다고요?”
그러자 윤강백이 호탕하게 웃었다.
“어차피 세워봤자 제대로 지킬 것 같지도 않은걸!”
이 사람, 길드 일을 할 땐 훨씬 치밀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즉흥적인 인간이었나?
“뭐, 그래도 우선은 스승님부터 찾아뵐까 싶군. 그 다음엔…… 다녀와야 하는 곳도 있고.”
뒷말을 할 때 윤강백의 얼굴은 무척 진중해져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굴 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전다호. 그의 영원한 짝사랑 말이다.
치기 어린 한때의 열기라고 하기엔, 그건 너무도 오랜 시간 윤강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래, 홍염.
꺼지지 않는 그 불꽃처럼 말이다.
“이 기쁜 날에 왜 그렇게 우중충한 표정입니까?”
그때, 무척 간만에 듣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푸른 머리카락에 길게 찢어진 눈매. 정장 위 푸른색 행커치프가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전서호. 그가 간만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호야.”
“전서호 씨, 라고 부르셔야죠.”
윤강백이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자 전서호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공식적인 장소이니 말을 가려 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윤강백은 귓등으로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부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와줄 줄은 몰랐는데. 정말 고맙군.”
“네 은퇴식인데 얼굴은 비쳐야지.”
전서호도 포기한 듯 반말로 응수했다.
이 둘이 현역일 때면 모를까. 오늘부로 윤강백도 일선에서 물러나는 이상 굳이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늘 으르렁거리던 둘이 예상외로 친근한 모습을 보이자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제일 늦었어?”
“역천까지……!”
촤르륵.
하얀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간만에 보는 정식 제복이었다!
길드장을 상징하는 망토가 혜원 언니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놀란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언니가 오늘 이 자리에 오는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혜원 언니가 슬며시 내게 눈을 찡긋, 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둘이 싸우고 있질 않네.”
“마지막 날인데 그래서야 쓰겠는가.”
“체면치레는 해줘야지.”
혜원 언니까지 끼어들자 나와 신도아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저 셋이서만 나눠야 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눈치껏 빠져주는 게 좋겠지.
“이런 자리에 셋이 함께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군. 이번이 마지막이 되겠어.”
“난 아직도 현역인데 너희만 먼저 은퇴하면 어떡하냐.”
“역천은 세대교체 안 하나? 감투를 너무 오래 쥐고 있으면 그림이 좋지 않잖아.”
“나도 은퇴나 할까?”
“넘겨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나쁘지 않지.”
셋이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혜원 언니도 모처럼 ‘누나’나 ‘언니’에서 벗어나 그녀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윤강백의 꿈결에서 보았던 그들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이나마, 허상으로나마 나도 그들과 함께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명랑하게 미소 짓는 혜원 언니를 보니 더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