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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342화 (342/361)

342화

챕터: 블랙메일

‘빌런 대책 본부’

최상위권 헌터들을 집결해 만든 정부 직속 조직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빌런들을 잡아넣는 데 특화된 곳이었다.

가장 큰 모체가 청사와 홍염이었던 만큼 이 둘은 ‘부서’의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운우는 여전히 청사의 이운우였다.

그의 명패 앞에 붙은 청사의 이름이 선명했다.

“그래서?”

간만에 마주 보는 얼굴인데 표정이 삐뚜름하기 그지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나도 할 말이 없다.

“최대한 조용히 지내라고 충고한 게 엊그제 같은데. 건물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은 게 어디의 누구시라고?”

“미안해…….”

뒷수습은 온전히 이운우의 몫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왜 그랬는데?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을 거 아냐.”

그 말에 듬뿍 배어있는 것은 나를 향한 신뢰였다.

“날 찾아왔더라고. 피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따라붙었을 거야. 내 사람을 모욕하기까지 했어.”

“그게 결정적이었나 보네.”

나만 깔짝깔짝 건드렸으면 이보다 훨씬 오래 참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놈들은 내 동료를 건드렸고, 그건 순식간에 내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였으니 아무리 나라 해도 그걸 없던 일로 만들긴 힘들어.”

그날 9시 뉴스는 물론 다음 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도윤이 나를 언급한 것 같진 않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조사하면 모두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탁.

이운우가 서류 더미를 내게 건넸다.

“……이건?”

“블랙리스트.”

빌런대책본부에서 1순위로 쫓고 있다던 빌런들의 명단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자 아는 얼굴도 튀어나왔다.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낯이 익은 여인의 사진이 살벌한 이명과 함께 붙어있었다.

내가 봤던 그 여자다. 밀레니엄의 보스.

“그 블랙리스트 중 상당수가 최근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한 빌런 조직의 휘하에 놓이게 된 거?”

“어떻게 알았어? 이건 본부 안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운우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카멜롯이 거기 숨어들어가 있단 걸 말해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뭐, 아무튼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겠네.”

드르륵.

그가 서랍장에서 새로운 파일을 하나 꺼냈다.

“일명 ‘블랙메일’이라고 하지. 세계적으로 극악무도하기로 유명한 빌런 조직이야. 여러 나라가 공조 수사해서 잡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전부 실패했고.”

파일의 겉면은 온통 검은색에 흰 글씨로 ‘BLACKMAIL’이라고 쓰여 있었다.

척 봐도 외부인에게 유출해선 안 될 것처럼 생겼다.

“봐도 되는 거야?”

“앞부분은 불필요하니 넘어가고, 뒷부분부터 봐.”

촤르륵.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얼핏 보이는 건 외국에서 블랙메일이 활동한 내역들 같았다.

끝부분에 이르자 그들이 한국에까지 손길을 뻗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왔다.

“전쟁 게이트에 시선이 팔린 사이에 야금야금 더 크기를 키웠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괴멸 직전까지 갔었는데. 그 녀석들한테는 전쟁이 호재였지.”

어느 전쟁이든 어부지리를 얻는 놈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그놈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거든. 마침 네가 사고 친 그 조직 보스도 블랙메일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 같단 의심을 사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너도 협력해.”

이운우의 자색 눈동자가 희번덕이며 빛났다.

저런 눈빛을 할 때면 으레 모든 일이 이운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곤 했다.

“우리와 협력해서 그 시한폭탄을 잡으려고 시도했다고 둘러대면 돼. 건물이 터진 것도 그 녀석의 수족을 봉인하기 위해 잔당들을 일망타진한 거라고 하면 되고.”

“그 대신 나도 블랙메일을 잡는 데 일조해라?”

“거짓말이 티 나지 않게 하려면 너도 성의를 보여야지.”

맞는 말이긴 한데. 어째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제안을 해오니 찝찝하기 그지없다.

“다른 방법은 없어?”

“뭐, 재판에 회부된 다음 각성자 규제법을 발안하는 계기가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

“블랙메일을 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운우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위에서 뭐라도 꼬투리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모양이다.

통제되지 않는 사병은 여러모로 불안감을 조성하기 마련이니까.

어찌 됐든 빌런을 때려잡는 건 내게도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톨룩도 빌런이라고 친다면 이 분야에 나보다 더한 베테랑은 없을 거다.

“우리 쪽의 히든카드인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둘 거야. 너랑 나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모종의 계약을 맺고, 너는 비공식적으로 블랙메일을 쫓고 있던 거지.”

“이해했어.”

“역천을 나간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고 해두자.”

분명 나는 유유자적 조각이나 취미로 하면서 살아갈 예정이었는데 말이다.

어느샌가 또 이런 일에 휘말려있다.

정말 일을 부르는 팔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사람이랑은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야?”

“누구?”

“최도윤 씨 말이야.”

그를 이운우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냥 변방의 자경단인 줄 알았는데.

“밀레니엄하고 부딪치면서 몇 번 본 적 있어.”

“그래? 조사 과정에서 너에 대한 얘긴 숨기길래. 혹시 그새 친구를 사귀었나 했지.”

최도윤이 나와 한 약속을 잘 지켜준 모양이었다.

“너는 어떻게 아는데?”

“그야 3세대 자경단의 대표 격이잖아.”

이운우가 자경단까지 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는 도리어 그걸 모르는 내가 너무 무관심한 거라고 핀잔을 줬다.

“헌터가 될 수 있었는데도 자경단으로 남겠다고 한 인물이니까. 뉴스에서 시민영웅이라고 떠받들었지.”

헌터와 자경단은 1세대 땐 그 구분이 흐릿했으나 이제 와선 완전히 이분화되어 있었다.

부와 명예가 기다리는 헌터 자리를 거부하고 자경단으로 남았으면 존경받을 만했다.

“그런 것치곤 많이 약한 것 같은데.”

“그럴 수밖에. 각성자의 능력은 게이트 안에서, 그리고 목숨의 위협을 받을수록 극대화되니까.”

빌런들이 암만 판을 쳐도 각성자 빌런들은 대부분 게이트나 던전에서 활동을 했다.

그러니 헌터보다는 위험에 처할 일이 훨씬 적었을 것이다.

헌터는 게이트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매분, 매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수준이니.

“자경단들이 헌터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하향평준화되어 있긴 하지만 대인전투에는 누구보다 능숙하거든. 당연히 이 대책본부가 세워질 때 포섭대상 1순위였어.”

“그런데 왜 아직도 혼자 활동하는 거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헌터가 누구나 사연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경단도 저마다의 사정을 품고 있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나는 아까부터 응접실 안에 은은하게 감도는 향을 느끼고 있었다.

저 뒤편에서 어렵지 않게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이운우에게 선물했던 석고방향제다.

“향이 좋아서.”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고.”

그를 닮은 향을 골랐으니까.

처음엔 달큰한 것 같은 느낌을 주다가 끝은 담백하고 살짝 쌉싸름하게 변한다.

향을 맡자마자 절로 그가 떠오를 정도였다.

“손재주가 좋던데.”

“요즘 취미 삼아 하고 있어. 다음에 혜원 언니랑 같이 우리 집에서 저녁식사라도 할래? 정원에 쌓아놓은 것들이 많거든.”

“꼭 역천의 길드장이랑 같이 먹어야 하는 거야?”

“혜원 언니 집인걸.”

이운우가 살짝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이 둘은 저번에 날 수면향으로 재울 때는 죽이 잘 맞더니 그 이후론 은근히 으르렁댄다.

내 앞에서 티를 안 내려 하는 것 같으니 모르는 척해주고 있긴 하지만.

“독립은 안 해?”

“딱히 생각 없는데.”

“그 벨제부브랑 에드문드는 따로 집 얻어줬으면서.”

“그거야 둘이 워낙 싸우니까 그런 거고.”

벨제부브가 혜원 언니에게 핍박받을 때, 원래는 회귀 전 기억이 겹치면서 조금 통쾌하다고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벨제부브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에드문드도 지구로 넘어온 뒤론 따로 집을 구해줬다.

“표연원 헌터도 슬슬 독립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하지만 워낙 상냥한 아이니까 자취하고 싶단 내색을 안 하는 걸지도 몰랐다.

하긴. 그 애도 한창 대학 생활을 즐길 땐데.

나랑 혜원 언니가 한집에 사는 게 좀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치곤 꽤 만족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연원이는 나나 혜원 언니가 양껏 먹을 때면 더없이 행복해 보였으니까.

“어째 은근슬쩍 독립을 부추기는 눈치다?”

“내가 언제. 그냥 물어본 거지.”

슬쩍 발을 빼는 솜씨가 일품이다.

“조각을 취미 삼아 하고 있으면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테니까. 마당이 큼직한 곳으로 너도 독립을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본 거지.”

“으음……. 좀 고민해볼게.”

확실히 대형 석고상을 제작하기엔 지금 집은 좀 좁은 감이 있다.

원래는 마당도 없는 집인데, 저번에 류라임이 한쪽 벽면을 뚫어버린 뒤 임시로 생겨난 공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마당이라고 칭하기 민망할 정도로 협소하다.

‘조각이 취미라곤 하지만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도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손이석 대장장이처럼 구석진 곳으로 옮겨야 할 수도 있겠네.’

도심 한복판에서 석고상을 깎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블랙메일에 대해서 더 숙지할 내용은 없는 거지?”

“지금 당장은.”

“내가 해야 할 일은?”

“일손이 부족할 때 도와주는 정도.”

그 정도면 됐다.

헌터 일을 파트타임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슬슬 몸이 굳는 것 같아 좀 찌뿌둥하기도 했으니. 주기적으로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리라.

대충 볼일은 끝났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 간섭을 이용해 나가려는 때였다.

눈 안에 푸른 빛이 감도는 와중에, 불쑥 생겨난 질문을 던졌다.

“신도아 씨는 잘 지내지?”

이운우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홍염 소속이라 나도 잘 모르겠다만…… 조만간 윤강백 길드장이 은퇴한다는 얘기가 있어서. 따라나설지도 모르겠네.”

뭐?

윤강백이 은퇴한다고?

지나가는 투로 던진 말이 너무 파급이 커서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럼 홍염은…….”

“그야 전청운 씨가 뒤를 잇겠지.”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홍염과 청사 둘 다 3세대 헌터가 그 수장이 된다니. 물론 이제 빌런대책본부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감회가 새로웠다.

“취임식이 보고 싶으면 참석해도 좋고. 이젠 너도 외부인이 아니잖아?”

“임시긴 하지만.”

나는 명확하게 선을 그으면서 능력을 이어서 발동했다.

발끝부터 마력이 차오르는 느낌과 함께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집에 도착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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