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이제 역천은 아니에요. 헌터 은퇴했거든요.”
기왕이면 목격자도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최도윤에게 걸려버렸다.
옆에 있는 사내도 아마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였다.
“대체…… 한서하 헌터가 왜 여기에……. 아니, 설마 그 CCTV가…….”
그는 지금 상황을 가늠하는 것처럼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건물은 왜 불 지른 겁니까?”
“제가 지른 거 아니에요. 여기 보스 능력이 아마 비슷한 종류인 것 같던데요.”
“발화 말입니까?”
“조금 달라요.”
그 여자. 단순히 발화 능력자라고 하기엔 좀 묘했다.
허공에서 불을 피워내는 이라면 이미 질리도록 상대해봤다. 이그니스가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걸리는 게 많았다.
***
밀레니엄의 조직원들을 상대하는 건 지루할 정도로 쉬웠다. 노이트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은행 때처럼 CCTV 기록을 남겨두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그것부터 처리하고 나니 거리낄 게 없었다.
“흐아아압!”
탁!
“으윽!”
3층에 있는 이들을 전부 해치우자 마지막까지 구석에 숨어있던 녀석이 내 뒤통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척조차 숨길 줄 모르는 주제에 내 허점을 잡을 수 있을 리가.
단번에 그 손목을 붙잡으니, 녀석이 뭔가를 툭 떨어뜨렸다.
기껏해야 칼이나 도끼 정도나 들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그런 무기가 아니었다.
‘……물풍선?’
제정신이라면 평범한 물풍선을 들고 내게 달려들 리가 없었다.
의아한 것도 잠시. 나는 붙잡고 있는 손목을 사정없이 꺾은 다음 녀석의 발목을 거의 분지르다시피 했다.
콰직!
“아아아아악!”
그러자 사방에 쓰러져있는 이들과 비슷한 몰골이 됐다.
전부 기절시켰을 뿐 죽이진 않았다.
게이트 내부가 아닌 현실에서 살인을 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까.
상대가 빌런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상하단 말이지.’
빌런 조직에 뭔가 환상 같은 건 없었지만. 여긴 빌런들의 아지트라기엔 좀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오히려…… 에드문드의 공방하고 닮았어.’
마도 공학자였던 그 에드문드 말이다.
그가 설계도면을 이리저리 늘어놓고 있던 그 공방과 비슷해 보였다.
이 분야에 문외한인지라 대체 뭘 연구하고 있었는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바닥이 무척 미끄럽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진짜 물풍선이 아니었나 보네. 이거 기름이잖아.’
바닥에 떨어진 그 물풍선으로부터 뭔가 새어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느릿하게 흘러내리는 게 일반적인 물은 아니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게 기름 같았다.
‘그냥 기름을 담은 건 아닌 것 같고. 대체 왜 저걸 나한테 던지려고 했던 건지…….’
의문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콰아아아앙!
오싹,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뒤로 내빼지 않았으면 저 폭발에 휘말릴 뻔했다.
‘폭탄?’
충격을 받으면 터지는 폭탄인 게 분명했다.
‘밀레니엄이 몰래 유통하던 게 혹시 군수물자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저번에 만났던 밀레니엄의 말단 조직원은 돈으로 가득 찬 가방을 지니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다른 조직에게 팔아서 번 돈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는 그렇게 한 층, 한 층 올라가 마지막 꼭대기 층에 이르렀다.
아마도 밑층에서 벌어지는 소동에 대해서 보고받았을 보스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끼익.
의자가 돌아가며 작게 소음이 일었다.
“왔네요.”
누가 보면 그녀와 내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느긋한 분위기의 여자가 날 맞이했다. 부정할 여지 없이 밀레니엄의 보스였다.
흔한 인상의 여자다.
밖으로 나가면 일반인들과 뒤섞여 조금도 위화감이 없으리라.
“곤란하기도 하지. 조금 있으면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는단 말이에요.”
저건 혼란을 주기 위한 거짓말일까?
아이가 있다니.
물론 빌런이라고 가정을 꾸리지 말란 법은 없지만, 보통 자신의 약점으로 여기기 마련일 텐데.
“워킹맘은 힘들어요. 이렇게 야근까지 해야 하고.”
“아이에겐 미안하게 됐네. 경찰에게 잡혀가면 다시 돌아가긴 어려울 테니까.”
부러 도발을 던졌지만 상대는 대꾸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 조심성 없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남의 홈그라운드에 멋대로 들어오고.”
“그런 것치곤 속수무책으로 당하던데.”
“밑에 있는 애들? 그 아이들이야, 어차피 소모품이니까. 그다지 상관없죠.”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여자, ‘밀레니엄의 보스’ 정도가 아니다. 뭔가 더 있다.
사실상 밑에 있는 조직원들이 당하면서 밀레니엄이 괴멸했는데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건 분명 이상하다.
“그 녀석들을 다 죽여서라도 당신 하나만 손에 넣으면 남는 장사인걸요.”
“……날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네.”
“그럼. 알고 있죠.”
여자가 생긋 웃었다.
“한서하 헌터.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나는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답답한 마스크를 살짝 빼냈다. 날 이미 알고 있다면 굳이 가릴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항복할 건가?”
“그럴 것 같아요?”
“아니. 뛰어내리기라도 할 건가?”
이 고층에서?
여자의 몸은 단련한 흔적 같은 게 없었다. 신체 능력은 아마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이겠지.
그런데도 분위기가 지나치게 여유롭다.
한 수를 숨겨둔 자 특유의 내음이 났다.
나는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이렇게 할 수도 있죠.”
딱!
여자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동시에,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쿠구구궁!
거센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다!
화르륵!
치솟는 불길이 여자와 내 사이를 갈라놓는다.
황급히 불길을 가르고 뛰쳐들어갔지만, 여자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젠장!”
이제 보니 뒤편에 숨겨진 문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공간 간섭을 발휘해보니 저 뒤에 공간이 느껴졌다.
벌컥, 문을 열어보지만 이미 이 안쪽도 화염으로 가득했다.
섣불리 따라나섰다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정신을 잃으면 곤란하다.
쿠구구구구…….
게다가 아까부터 건물이 불길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저건?’
그런데 비틀린 건물 벽 안쪽이 시멘트나 철근 말고 다른 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불길을 피해 겨우 벽에 접근한 다음 단검으로 벽 일부를 더 부숴버렸다.
그러자 안쪽이 똑똑히 보였다.
“하…….”
갖가지 기계장치들이 안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마 저것들이 이 건물을 삽시간에 불덩이로 만든 원인일 것이다.
‘동력은 어디지? 동력원을 끊으면……!’
덜컥.
벽을 더 부숴내자 기계 장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없잖아.”
전선이 없다.
어디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각성자였나……!”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불꽃이 튀었다.
전기도 없이 기계장치를 돌릴 수 있는 건 신 아니면 각성자뿐이다.
화르륵!
바닥에 떨어진 기계가 돌연 불꽃을 뿜어냈다.
나는 더 큰 화염에 휩쓸리기 전에 서둘러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공간 간섭!’
매캐한 연기를 좀 들이켰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가자 낯익은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최도윤. 그 남자였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불꽃이 일렁이는 빛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가운데 푸른 눈동자가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열기로 가득한 이곳에서.
그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내가 마스크를 벗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천의 한서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살짝 찌푸린 것 같기도 했다.
***
“밀레니엄이 몰래 유통하던 게 혹시 군수물자인가요?”
“다양하게 파악되고 있습니다. 군수물자도 분명 있고요. 어디서 유통한 건진 모르겠지만…….”
“유통이 아니에요.”
어딘가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건물 내부가 거의 연구소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여기서 제작했을 겁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불이 확 퍼진 데는 그 이유도 있겠죠.”
아마 불에 잘 타는 물질이 건물 안에 가득 들어있을 거다. 니트로글리세린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게 아니면 이 속도가 설명되질 않으니까.
“보스는. 잡았습니까?”
“……아뇨.”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
나는 약간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놓쳤습니다.”
“보스 혼자 도망쳤단 말입니까?”
고갤 끄덕였다.
할 말이 없다. 제일 중요한 보스를 놓치다니.
“각성자인 것 같았어요. 아마도 기계나 폭발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고요.”
“아마 맞을 겁니다.”
“밀레니엄은 소규모 빌런 조직이지만 그 보스는 정부의 블랙리스트에도 들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거든요.”
국지성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끼어들었다.
나는 잘 몰랐는데 그 여자가 꽤나 유명한 인물인 모양이다.
“블랙리스트라고 하면?”
“빌런대책본부에서 1순위로 추적 중인 빌런이죠.”
“그런 것치곤 너무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던데요.”
“보다시피.”
국지성이 내 뒤편에서 활활 불타고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뒷말을 이었다.
“섣불리 접근하면 통째로 불타 죽을 테니까요.”
하긴. 내가 공간 간섭 능력자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저 건물과 함께 활활 타고 있었을 거다.
“군수물자 제작이라면…….”
“맞아. 아마도 그거겠지.”
둘이 서로 마주 보며 작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거라뇨?”
“최근 들어 무장을 한 빌런들이 늘어나고 있었거든요. 시작이 어디인가 했더니…… 여기서 흘러나왔나 봅니다.”
국지성의 말에 나는 문득 카멜롯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빌런 조직이 여기까지 발을 넓혔거든요. 빠른 속도로 뒷세계를 통일하고 있고요.
갑자기 밀레니엄이 군수물자를 찍어내는 공장이 되고, 그 물건들을 주변과 나눠 가진 게 우연은 아닐 거다.
외국에서 우리나라까지 침입했다는 그 빌런 녀석들이 전반적인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최도윤이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대로다. 처음엔 그랬으니까.
“저놈들이 자꾸 건드려서요.”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것도 내 성미에 안 맞는 일이라서 말이다.
“한서하 헌터라면 위에서 조사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가네. 우린 국회의원 딸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뭐예요.”
국지성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마 이운우가 손 써준 덕분일 거다.
그때 뒤에서 소방차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선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마스크를 다시 끼고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에 대한 건 일단 함구해주시고,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걸로 해주세요. 자세한 사안은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정확히는 이운우가 말이다.
그들이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