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후우…….”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커헙, 하는 신음이 들렸지만 모르는 척했다. 핏물에 옷자락이 젖어들지만 이미 옷이 엉망이었으니 신경 쓰지 말자.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자꾸 날 건드리네.’
다른 건 몰라도 내 동료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들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평화로운 세계를 살고 있는 녀석들이라면 말이다.
“험한 꼴을 보였어.”
다니엘과 안유수에게 속으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녀석들의 묘비 앞에서 잠시 싸우다가 정신을 차린 다음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기긴 했지만 말이다.
“이봐.”
툭, 나는 앞에 쓰러져 있는 녀석을 발로 건드렸다.
미동도 없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손가락을 코 밑에 가져다 대니 숨은 쉬고 있다.
얼굴 꼴이 엉망이긴 하지만 뇌에 손상이 갈 정도는 아니니 괜찮을 거다.
“너희 조직에서 고용한 헌터가 오고 있다고 했나?”
쿨럭.
녀석들 중 하나가 핏물 섞인 기침을 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 밑에 깔려있는 놈이 작게 몸을 움찔했다.
“대답 안 하면 어쩔 수 없고. 입이 열릴 때까지 매로 다스려주는 수밖에.”
“허업! 오, 쿨럭! 오…… 오고 있을 겁니다……!”
하도 비명을 질러 잔뜩 쉰 목소리였다.
저번에 은행 강도 때도 그렇고. 이 밀레니엄이란 녀석들이 전직 헌터를 용병으로 자주 고용하는 모양이었다.
“언제쯤?”
“그…… 그건 저희도…… 잘…….”
그렇게 대꾸하면서 눈알을 도르륵 굴린다. 내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떤 헌터인지는?”
“그것도…… 잘…….”
원래 어느 길드 소속이었는지 정도는 알아두면 좋은데 말이다.
벌써 이 녀석들과 얽힌 게 이걸로 세 번째였다.
은행 강도, 차 도난 사건 그리고 여기서 시비 붙은 일까지.
최도윤의 말대로 저쪽에서 날 찾고 있긴 한 모양이다. 이 녀석들이 날 발견했을 때 모자가 같다느니 하는 말을 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무시한다고 녀석들이 조용히 물러날 것 같진 않았다.
“밀레니엄 본부는 어디야?”
“예?”
“본거지가 어디냐고. 너희 보스가 있는 곳 말이야.”
“그건…….”
내 물음에 녀석이 곤란하다는 듯 뒷말을 흐렸다.
콰앙!
“히이익!”
단검을 녀석의 손가락 바로 옆 바닥에 내리꽂았다.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들어간 단검을 보며 녀석이 작게 비명을 지른다.
“말할 생각이 들게 해줄까?”
“사, 살려주세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보스에게 죽는 것보다 나한테 죽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단 걸 이제야 인지한 모양이다.
마음 같아선 녀석들의 본거지를 쫓아 들어가 노이트라도 난사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문책을 면하지 못하겠지.
“기왕이면 안내를 맡기고 싶은데…… 그럴 여유는 없어 보이네.”
이들이 죄다 바닥을 기고 있는 덴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내가 부러뜨린 발목을 보고 있자니 잠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그때 뒤에서부터 다가온 이가 물었다.
아까부터 인기척은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이들이 기다리던 그 헌터겠지.
“당신이?”
“네.”
이건 의외의 반응인데.
밀레니엄에게 고용된 헌터가 왜 나를 돕는단 말인가.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이름 모를 헌터가 생긋 웃었다.
어쩐지 낯익은 미소였다.
“제 머리에 또 총을 겨누기 전에 미리 잘 보여야죠.”
그 말에 나는 이자가 누군지 단번에 눈치챘다.
카멜롯.
그 남자였다. 어디에나 녹아드는 변신술의 귀재 말이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그는 국제 연합 소속이라 이미 철수한 줄 알았는데. 게다가 밀레니엄하고 연관되어 있다고?
“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나는 걸어가면서 한 번 더 쓰러진 이들의 상처 부위를 즈려밟았다.
“아아아아악!”
“끄아악!”
비명이 또 한차례 울리는 걸 모르는 체하고서 카멜롯을 따라갔다.
카멜롯이 무슨 임무를 받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잠입해있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내게 호의를 표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카멜롯과는 전쟁 전후에 오가며 두어 번 마주친 적이 있지 않은가.
“예상했겠지만 저는 여기에 잠입해있으니 모르는 척해주시죠.”
“밀레니엄에요? 거긴 고작해야 건달들 모임일 텐데.”
“밀레니엄보다 더 높은 곳이죠.”
그들 뒤에 또 다른 배후라도 있다는 말인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빌런 조직이 여기까지 발을 넓혔거든요. 빠른 속도로 뒷세계를 통일하고 있고요.”
“밀레니엄도 그 아래 소속되어 있단 말이군요.”
“네. 맞아요. 말하자면 저는 지방 파견을 나온 본사 직원인 셈이죠.”
밀레니엄의 규모에 맞지 않는 헌터들이 종종 보인다 했더니 본사에서 파견된 헌터들이었나.
최도윤 같은 자경단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헌터를 밀레니엄 같은 소규모 빌런 조직이 데리고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분위기도 뭔가 피고용인이라기엔 지나치게 당당해 보였고.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빌런 조직하고 싸우고 있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은퇴한 거 맞아요. 이번엔 본의 아니게 휘말렸을 뿐이라고요.”
정말 억울할 지경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이놈들이 활개를 치면서 자꾸 나랑 트러블을 빚고 있지 않은가.
“난동을 좀 부릴 예정인데. 괜찮겠어요?”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겠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말리면 들을 겁니까?”
“그럴 리가요.”
내 동료를 모욕한 놈들이다. 뿌리째 뽑아내야지.
자꾸만 건드려서 슬슬 짜증 나던 참이었다. 그놈들 때문에 내 차도 망가졌고.
“이 앞입니다.”
카멜롯이 일반 오피스텔처럼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건물 하나가 통째로 녀석들 소유라고 할 수 있죠.”
“벌이가 제법 괜찮나 보네요.”
“유통 사업을 해서 벌이가 쏠쏠한 편이죠. 그러니 본부에서도 이렇게 헌터를 파견해주면서 신경 쓰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일단 카멜롯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류라임 씨랑 같이 한번 보죠.”
“당분간은 바쁠 것 같아서요. 안부만 전해주세요.”
그리고 카멜롯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갔다.
나 역시 밀레니엄의 본거지로 향했다.
노이트는 쓸 필요 없겠지.
스릉.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고 있었다.
번쩍,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며 그 예기를 자랑했다.
***
최도윤과 국지성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둘러 차에 탔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빨간 불에 더 자주 걸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최도윤은 자꾸만 시계를 노려봤다.
“보고는?”
“끊겼어.”
“마지막 말은 그게 다야? 뭔가 이상하다고?”
“그래. 대체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밀레니엄 본부를 꾸준히 감시하는 것도 자경단들의 임무였다.
최근 들어 싹 쓸어 모은 돈을 어디론가 보내는 정황이 포착됐는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본거지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말이 돼? 걔는 CCTV 해킹하는 애잖아.”
이들이 밀레니엄을 감시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건물 내에 설치된 CCTV를 각성자의 능력을 이용해 해킹하는 것이다. 정신력으로 인터넷망에 접속할 수 있는 이가 있어서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CCTV가 돌연 박살나더니 급기야 건물 내 모든 CCTV가 차단됐다고 한다.
“일부러 끈 건지, 아니면 습격이라도 받은 건지…….”
“최근 들어 백도어랑 마찰이 자주 있다곤 하던데.”
“백도어 놈들이 기습이라도 한 건가.”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다. 두 빌런들이 맞붙어 싸우고 전력 손실이 클 때 이들이 어부지리를 누릴 수도 있으니까.
최악의 경우는, 일부러 CCTV를 차단한 경우다.
빌런 조직이라고 한들 서로 간에 감시는 필요한 법인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CCTV에 기록되면 안 되는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젠장! 좀 비키라고!”
빠아아앙!
국지성이 욕지거릴 내뱉으며 거세게 클랙슨을 울렸다.
“김상엽네 애들은!”
“오고 있대. 아직 마포대교 쪽.”
“강채은.”
“잠실 쪽.”
“도움이 되는 놈들이 없어!”
그들이 아는 이들을 총동원해봤지만 활동 구역이 달라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그동안 밀레니엄의 본거지를 목전에 두고도 함부로 건들지 못한 이유가 뭐겠는가.
큰물에서 놀지 못한다 하더라도 녀석들은 이 근방을 꽉 잡고 있는 시정잡배들이었다.
그에 비해 자경단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야 국가의 지원도 시원찮으니 정말 직업 정신에 의거해 봉사하는 이들만 빼고 전부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1층부터 상황을 살핀 뒤 진입한다. 안에 인질이 붙잡혀있을 가능성도 있어.”
“오케이!”
그렇게 애타는 마음과 함께 전속력으로 밟아 밀레니엄의 본거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
국지성은 자신이 뭔가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저놈들이 이번에 고용한 헌터는 마법사인 게 분명하다. 어디서 그 비싼 인력을 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면 이 광경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밀레니엄의 본거지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말 그대로 활활.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소방차를 몇 대 본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다 여기로 오는 길이었나?
입이 쩍 벌어져 닫히지 않는 그 와중에, 최도윤은 불타는 건물 앞에 서 있는 이를 발견했다.
“당신은…….”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윗선과 알 수 없는 연이 닿아있던 바로 그 여자다.
마스크는 없고 검은 모자만 푹 눌러쓰고 있었고, 상처는 없지만 그을음 때문에 옷이 살짝 엉망이었다.
뒤편에 타오르는 건물을 두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
타닥, 타닥.
불씨가 허공을 날면서 배경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허리춤에 대충 꽂아 넣었다. 그러면서 옷 안쪽에 숨겨둔 총집이 보였다.
‘어쌔신인 줄 알았는데. 거너였나?’
시선을 천천히 올리자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칼이 보였다.
푹 눌러쓴 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도 자신의 앞에 선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들었다.
“허억.”
국지성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최도윤도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매스컴을 뜨겁게 불태운 적도 있었고,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인물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그 전무후무한 기록들은 종종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선전에 쓰이기도 했다.
최도윤이 그 전설적인 헌터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역천의 한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