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이번에도 헌터 출신으로 인원을 보강해왔잖아. 이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도…… 녀석들은 비겁한 수도 가리지 않으니까.”
놈들에게 주변인의 목숨으로 협박하는 건 특별히 비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밀레니엄보다 먼저 이 여자를 찾아내서 보호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 중 하나였다.
“헌터 출신들은 다 좋은데 좀 순진한 구석이 있지. 몬스터만 상대해서 그런가. 빌런 놈들이랑 싸우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니까.”
몬스터들 중 지능을 가진 녀석은 극소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헌터들의 무력은 인정하는 바지만, 갖가지 권모술수를 쓸 줄 아는 빌런 놈들을 상대할 땐 그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이 헌터 출신 여자도 자기가 밀레니엄에게 쫓기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몬스터가 원수를 갚으러 오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더 빨리 찾아내야 해.”
최도윤은 몇 번이고 CCTV를 돌려 봤다.
이 여자의 정체에 대한 힌트가 뭐라도 나오길 기대하면서.
***
외출할 때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수상쩍은 모습이기도 하고.
“요정니임!”
와락, 달려드는 엘리사를 꼭 안아줬다.
“밖에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죄송해요! 그래도 찾아와줬네요!”
“나야 남는 게 시간이니까.”
엘리사가 생글생글 웃는 낯을 했다. 그녀도 워낙 눈에 띄는 외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자를 눌러쓴 상태였다.
뾰족한 귀는 인간의 것처럼 뭉뚝하게 변해있었다.
테오도르가 몰래 선물해준 ‘폴리모프 귀걸이’의 영향이었다.
모습을 바꿔주는 아이템은 악용의 여지가 너무 커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엘리사의 일상생활을 위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톨룩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톨룩인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한 탓이다.
“오늘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가요! 제가 자주 가는 곳이 있거든요.”
“그럴까?”
유명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간 이후 얼굴을 보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
엘리사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들어가 음식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기 시작했다.
“연습생 생활은 좀 어때?”
“으음. 춤은 여전히 어렵지만, 노래 부르는 건 재밌어요! 즐겁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얼굴엔 기쁨이 가득 서려 있었다.
“데뷔 일정도 나왔다며?”
“엎어지는 일도 많으니까 두고 보긴 해야겠지만요. 일단은 데뷔조에 들었어요!”
하긴. 미의 종족인 엘프다.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은 연습생 생활을 얼마 하지 않았는데도 엘리사를 데뷔조까지 들게 했다.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만큼 더 열심히 해야죠. 오빠도 많이 응원해주고 있으니까, 꼭 성공해서 보답하고 싶어요.”
“잘할 수 있을 거야.”
엘리사가 지구로 넘어오고 나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내가 잘 알았다.
에녹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여기저기 알바를 알아보던 것을 뜯어말린 게 나였다.
그랬던 아이가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던 노래를 생업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나야 연예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지만 여러모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알지?”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에녹도 혜원 언니네 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데다, 나 역시 엘리사 한 명쯤은 평생 놀고먹게 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끝마치고 엘리사는 다시 연습실로 가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뷔 직전에 혹시나 엘리사가 긴장하고 있을까 봐 찾아간 거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의연해 보여서 안심이었다.
나 역시 슬슬 돌아가려고 하는데. 또 예상과 다른 변수가 생겨버렸다.
부와아아아앙!
거리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차와 그 차를 쫓아가는 차. 둘이 도로 한복판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하니까.
다만 문제는, 마음대로 질주하는 차가 너무도 눈에 익었다는 것이다.
“……내 차잖아?”
끔뻑.
눈을 감았다 떴지만 차 번호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마구 질주하는 저 차는 분명 내 차였다!
“하아.”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나갔다.
어쩔 수 없군.
아마 급한 나머지 주차되어 있는 차들 중 하나를 훔쳐 탄 모양인데, 하필이면 그게 내 차라니.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나도, 저 차 도둑도.
***
끼이이익!
급격한 커브에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거센 소음이 일었다.
그러나 귀를 틀어막을 새도 없었다. 사내는 힐끗 백미러를 통해 뒤를 살폈다.
미친 듯이 쫓아오는 검은색 차가 아직까지 시야에 잡혔다.
‘젠장!’
그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한 번 더 핸들을 꺾었다.
하필이면 저 자식들을 마주할 게 뭐람!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이 대금을 저놈들에게 빼앗기기라도 하면 나는……!’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저 빌어먹을 자경단 놈들은 진짜로 자기가 히어로라도 되는 듯 건방지게 굴었다.
이번 거래의 정보가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몰라도, 그가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곧장 잡혔으리라.
눈앞에 보이는 차에 올라타 냅다 도망치기 시작한 것까진 좋았는데. 벌써 10분도 넘게 추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뒷좌석에 놓인 돈가방을 다른 중간책에게 넘겨주는 것까지가 그의 임무였다. 가는 길이 험난하기만 했다.
‘만약 실패하면…… 소리 소문 없이 입막음 당할 거야.’
구치소 안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고 뉴스에 뜨고 유야무야 넘어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저 녀석들을 따돌려야……!’
힐끗, 백미러를 바라보다가 사내는 바짝 몸이 굳었다.
“와. 이게 다 얼마야.”
어느샌가 나타난 여자가 뒷좌석에 앉아서 돈가방을 살피고 있었다.
“보아하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번 돈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그가 머릿속을 팽팽 돌렸다.
처음부터 뒷좌석에 숨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그도 아니면 중간에 난입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창문도 차 문도 꽁꽁 닫혀 있었다.
스윽.
정체 모를 여자가 목덜미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차 멈춰.”
꿀꺽.
침을 삼키자, 목에 가벼운 생채기가 났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핏물이 살짝 고인다.
“지금 당장!”
사내는 꾸욱, 제 목을 압박해오는 단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멈추면 어차피 난 죽은 목숨이야!’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사내는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았다.
부우우우웅!
가드레일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핸들을 확, 꺾어 버리자 차 방향이 바뀌면서 여자가 앉아있는 뒷좌석이 먼저 가드레일 쪽으로 꼬꾸라졌다.
거울을 통해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콰아아아앙!
“커허어억……!”
묵직한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다.
내장이 뒤흔들리고 머리가 웅웅 울렸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가만히 있다간 금방 잡힐 터였다!
덜덜 떨리는 손길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가방을 챙기기 위해 상체를 돌리자, 묵직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허억, 허억.”
뒷좌석이 가드레일로 관통당해 완전 엉망이었다.
꼬챙이에 꽂힌 것처럼, 차 문을 짓이기고 튀어나온 가드레일이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누구라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가방, 가방이…….’
그가 흐릿한 시야를 애써 다잡으며 손으로 뒷좌석을 마구 헤집었다.
아까 충격으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을 게 뻔했다.
좌석 밑을 다급하게 뒤지고 있는데, 불쑥 누군가 돈가방을 내밀었다.
“이거 찾아?”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여자가, 차 옆에 서서 깨진 창문 틈을 통해 손을 뻗고 있었다.
“어?”
멍청한 소리와 함께 여자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으으으윽!”
거센 손길로 그를 끌어당긴다.
아직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는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질질 끌려 바깥으로 끄집어내졌다.
탁!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허어억…….”
손이 온통 뒤집혀 통증이 극심했다.
뒤이어 그를 쫓아오던 이들도 급하게 정지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사고 현장을 바라봤다.
그중 차에서 내린 최도윤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한동안 찾아 헤매던 그 여자였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낀 모습 그대로였다.
드러난 구석은 하나도 없는데도 강자 특유의 분위기를 숨길 수가 없었다.
바람에 검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교통사고의 여파 때문에 제대로 정신도 못 차린 사내와 달리 그녀는 먼지 한 톨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 대비가 무척 이질적이었다.
***
차가 아주 엉망이었다.
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이건 폐차감이었다. 저걸 원래대로 돌이키는 건 아마 새 차를 만들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공간 간섭 능력자인 내게 차 없이 집에 돌아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긴 했지만.
보통 허공에서 사람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기에 하나 장만했던 건데.
얼마 타지도 못하고 이렇게 엉망이 되다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뒤이어 차에서 내린 인물이 무척 낯익다는 점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현상금 사냥꾼이십니까?”
최도윤이 내게 물었다.
저번에 은행 사건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자꾸만 사건에 얽히는 게 누가 보면 그렇게 오해할 법도 했다.
하지만 난 은퇴한 헌터일 뿐이었다.
조용히 살아가고 싶은.
“아뇨. 지나가다 휘말린 것뿐입니다.”
“지나가다요?”
도로 한복판은 지나가다 휘말렸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장소긴 했다.
나는 긴 설명 대신 가드레일에 꽂힌 차를 가리키며 짧게 대꾸했다.
“저게 제 차라서요.”
최도윤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는지 짧게 아, 하고 대꾸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아직도 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그럼 이후부턴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주시죠. 저 차는…… 그냥 폐차해주시고요.”
빌런에 의한 피해 보상은 아직까지 뚜렷한 대책이 없었다.
지금까진 게이트에 대한 피해 보상만으로도 국가 예산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도 조만간 해결되긴 하겠지만. 적어도 내 차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증인이 필요하신 거라면…….”
“아뇨. 다른 일입니다.”
“그럼 할 얘기는 없네요.”
딱 봐도 귀찮은 일을 여럿 끌고 다닐 것 같은 현상금 사냥꾼과는 그다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최도윤은 무척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대꾸했다.
“밀레니엄이 당신을 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장 보호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