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저는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학교 도착하면 연락해요.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요? 학교 근처 맛집 알려줄게요.”
“상황 봐서. 너도 네 친구들이 있을 텐데.”
“걔네야 다른 날에 먹으면 되죠.”
어차피 나랑도 매일 같이 밥을 먹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표연원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저 진짜 이제 가야겠어요!”
“잘 다녀와~.”
나는 표연원에게 인사하고는 마저 아침 식사를 마쳤다. 뒷정리를 끝마친 다음 올리버네 꽃집으로 향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노이트를 챙기다가 멈칫했다.
‘……이미 소유 허가는 받았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허리춤에 총기를 가지고 다니진 않으니까 말이다.
물론 노이트야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으니 놓고 다녀도 큰 상관은 없었다.
‘미안. 금방 다녀올게.’
나는 노이트를 내려놓았다.
***
깊게 눌러 쓴 모자. 얼굴을 절반은 가리는 마스크. 거기다 알이 없는 안경까지.
이 정도로 분장하면 보통은 못 알아보기 마련이었다.
“어, 왔어?”
올리버가 편하게 인사했다. 그는 내가 꽁꽁 싸매도 단번에 알아채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장사는 좀 어때?”
그가 지구에 정착하고 내 이웃사촌이 된 이후 우리는 꽤나 친해졌다.
종종 이사벨라에게서 오는 편지를 공유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늘 똑같지, 뭐.”
올리버가 장미꽃의 가시를 정리하며 말했다.
올리버가 갑자기 꽃집이라. 나 역시 처음엔 무척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올리버는 이런 생활을 꿈꿨던 모양이다. 그는 목돈을 마련하자마자 냉큼 꽃집을 차렸다.
젊고 번듯해 보이는 외국인이 차린 이 꽃집은 생각보다 인기를 끌고 있었다.
‘꽃을 보러 오는 건지 올리버를 보러 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올리버가 주섬주섬 안쪽에서 뭔갈 꺼내더니 내게 가방을 하나 건넸다.
받아보니 제법 묵직하다.
“이건?”
“셀이 필요하다고 했던 재료들. 거기다 집에 들어오기 힘들 거 같아서 옷가지랑 담요도 좀 챙겼고.”
그러고는 그가 빠르게 덧붙였다.
“너한테 부탁해서 미안. 원랜 내가 직접 갔어야 하는데…… 오늘 예약 손님이 계셔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괜찮아. 나야 남는 게 시간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사벨라한테서 엽서 왔던데. 받았어?”
내 말에 올리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고갤 끄덕였다.
“셀이가 좀 여유로워지면 다음에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자. 혜원 언니 출장 다녀온 기념으로 집에서 홈파티를 해도 좋을 거 같네.”
“나야 퇴근 후엔 상관없지. 셀한테도 물어볼게.”
그는 지구에서 지내면서, 특히 꽃집을 운영하면서 이전보다 한층 누그러진 분위기를 풍겼다.
이전의 그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군인 같았는데 말이다.
나는 안부 인사를 남기며 꽃집을 나왔다.
한국대학교로 갈 차례였다.
***
국내 최고의 국립 대학교. 그 명성에 걸맞게 대학 부지도 무척 넓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을 법도 하지만 그건 내게 해당사항이 없었다.
‘공간 간섭.’
스킬로 대학 부지를 대충 다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미대는 제일 안쪽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차를 몰고 쭉쭉 안으로 들어갔다.
미대 건물 근처에 차를 세우고 걸어 나왔다. 미리 연락을 했으니 슬슬 셀이 나올 때가 됐다.
“그 교수님은 우리가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안다니까!”
“야, 피방 고?”
“어제 LSK 봤냐? 훼이커 무빙 지리던데.”
지나가는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예민한 기감에 잡혔다.
왁자지껄.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마저 내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대학이라.’
난 이미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져 있어서 대학에 진학하는 덴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다.
진학했다 하더라도 평범한 대학생처럼 지내긴 어려웠으리라.
“어? 한서……!”
그때 셀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큰 소리로 날 부르려다 멈칫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 탓이었다.
“와, 뭐 이렇게 많아? 올리버 형이 챙겨준 거야?”
“응. 옷가지랑 담요 같은 것들도 챙겼대.”
“와!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셀은 한창 바쁘다는 게 농담은 아니었는지 꽤 피곤해 보였다.
애써 웃으며 날 반기지만 다크서틀은 숨길 수 없었다.
“아, 온 김에 내가 우리 학교 소개 좀 해줄까?”
“됐어. 너 바쁠 텐데 이만 들어가.”
“그래도오. 모처럼 왔는데 바로 보내면 내가 미안하잖아.”
나는 괜찮다고 만류했다. 집에 오가기도 어려운 녀석이 무슨 대학 소개란 말인가.
셀이 미안하다는 듯 웃길래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하는데, 건물 뒤편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잠깐만.”
나는 건물 뒤편으로 향하면서 물었다.
“이 뒤에 뭐 있어?”
“여기? 여기 조소과 애들이 쓰는 곳이라 그냥 만들던 조각상들 같은 거…….”
셀의 말을 듣다 말고 뒤편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셀이 따라오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코너를 돌아 건물 뒤편으로 도착하자 아직 한창 작업 중인 조소과 학생들이 두어 명 보였다.
“거기 조심해요!”
“응?”
내 외침에 두어 명이 고갤 돌려 날 바라본다. 내가 외친 말이 뭔지는 제대로 인지조차 못한 것 같았다.
쿠구구구……
그때, 한 학생 앞에 있던 거대한 석고 덩어리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어?”
“피해요!”
하지만 학생은 서서히 자신 쪽을 향해 기울어지는 석고를 보며 뻣뻣하게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몸이 바짝 굳은 것 같았다.
저 정도 석고에 머리를 잘못 부딪치면 일반인은 죽을 수도 있었다!
“으, 으아아아아!”
탁!
학생이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뜬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학생이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쿠구궁!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받치고 있던 석고 조각의 하단부가 완전히 두 동강 났다.
“그, 그거 100kg도 넘는데…….”
“네?”
“아, 아니요. 감사합니다…….”
내가 석고를 한 손으로 번쩍 드는 모습에 학생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
나는 석고 더미를 대충 옆에 내려놓았다.
“야! 괜찮아?!”
셀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달려와 안부를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어? 어어.”
그가 학생을 일으키고 몸에 붙은 석고 가루를 탁탁 털어줬다.
학생이 뒤늦게 감사하다며 허리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이대로 죽을 뻔했어요!”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석고의 틈이 갈라지는 걸 느끼지 못했더라면 정말 이 무거운 석고상에 깔려버렸을 것이다.
“조각하다가 무게 중심을 잘못 잡았나 보네요. 이쪽을 더 움푹 패게 하면 중심축이 흔들리거든요.”
윗동이 사라진 미완성 조각품을 보며 충고했다.
“아……. 저도 그래서 반대편을 좀 안 깎아내고 남겨뒀던 건데. 버티질 못했네요.”
“차라리 반대편도 비슷하게 균형을 맞추는 게 나았을 거예요.”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자 무척 귀담아듣는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석고를 맨손으로 파내서 직접 예시를 보여줬을 땐, 감탄사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뱉긴 했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저, 근데 혹시 조소과 졸업생이세요?”
“네?”
“아니. 너무 잘 아시길래요. 혹시 졸업생이신가 해서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사실 이것들은 ‘공간 간섭’을 발휘했을 때 얻어지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숱하게 쌓인 경험 덕분이기도 했다. 싸우다 보면 절벽이 무너지는 일도 심심찮게 있으니까 말이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나는 무너진 석고상을 잠시 내려다봤다.
조각이라.
공간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내게 이건 출발선부터 다른 경쟁이었다.
“어? 그런데 혹시 어디서 뵌 분 같…….”
“하! 하! 하! 우리 누나가 힘이 좀 세지? 운동선수 출신이라! 누나, 배고플 텐데 점심이나 같이 먹으러 갈까?”
셀이 허겁지겁 끼어들어 상황을 수습했다. 평소와 다르게 ‘누나’라고 부르면서 내게 눈치를 준다.
나랑 아는 사이란 게 들키면 얘도 학교생활이 고단해지겠지.
나는 모자를 다시 푹 눌러썼다.
“그럴까? 학교 구경이라도 시켜주면 고맙고.”
“응, 당연하지! 여기 정문 앞에 맛있는 컵밥집이…….”
그때 새로운 인물이 건물 뒤편에 발을 디뎠다.
“컵밥? 여기까지 와서 그거 먹으려고요?”
“연원아.”
“누나. 왜 연락을 안 받아요?”
표연원의 등장이었다.
“점심은 나랑 먹기로 한 줄 알았는데.”
“네 친구들하고 먹으라니까.”
표연원이 내 옆에 서더니 셀을 힐끗 바라본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못 본 척 다시 말을 걸어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맛있는 거 먹어야죠.”
은연중에 깔린 싸한 느낌을 못 알아챌 정도로 눈치가 나쁘진 않았다.
“컵밥이 뭐 어때서! 간편하고, 빠르고, 영양소도 풍부한데!”
“누나는 내가 해준 음식만 먹어봐서 입맛이 고급이라.”
순식간에 날 사이에 두고 표연원과 셀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늘 예의 바르고 착한 연원이지만 이상하게도 셀이랑은 자주 투닥거렸다. 셀이 연원이보다 두어 살은 더 어릴 텐데 말이다.
“야, 셀아……. 너 저 선배랑 아는 사이였어?”
그때 주춤거리며 뒤에 있던 학생이 물었다.
“어? 아니? 완전 모르는 사인데?”
셀이 황급하게 발뺌을 했다.
“야……! 내가 혜원 누님 팬인 거 알면서 지금까지 모르는 척한 거야?”
“아, 모르는 사이라니까!”
이 학생은 혜원 언니의 열렬한 팬인 모양이다. 종종 헌터들은 연예인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팬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보는 눈이 있네.’
나는 속으로 그렇게 호평했다.
“저, 죄송한데, 혹시 가능하면 그…… 혜원 누님 사인 한 장만…… 받을 순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누나가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표연원이 칼같이 거절했다.
한두 명 들어주다 보면 끝도 없을 테지.
표연원 본인도 강한 헌터긴 하지만 아무래도 후발 주자고, 아직 세대 교체도 일어나지 않은 탓에 윗세대가 더 주목받는 경향이 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대신 셀이한테 부탁해보세요. 저희 누나랑 꽤 친하거든요.”
“네? 진짜요?”
귀찮은 일을 순식간에 셀한테 전가한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셀을 추궁하는 사이 표연원이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점심 먹으러.”
이대로 가면 셀이 삐져서 나중에 귀찮게 굴 게 뻔했다.
나는 결국 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셀도 데리고 나왔다.
둘 다 내 차에 태운 다음,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같이 점심 먹는 거야. 알겠지?”
내 말에 결국 둘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