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이사벨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로 떠났다. 공항까지 그녀를 배웅했고, 이사벨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녀라면 어디서 뭘 해도 잘할 수 있으리라.
“좋은 영화 메이트였는데. 아쉽게 됐구만.”
테오도르가 작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나도 누님 따라가고 싶은데~ 이미 계약을 해버려서 여기 묶여버렸잖아. 흐엉.”
셀은 툴툴거리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어디서든 잘 지내실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올리버는 굳건한 신뢰를 보여줬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소일거리도 찾을 것이니 여행경비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나는 혹시나 싶어 그녀의 계좌에 꽤나 두둑한 비상금도 넣어주었다.
하나둘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어, 대장! 먼저 와 있었네요?”
정로운이 반가운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이제 대장 아니라니까요.”
“하하. 이게 익숙해서요.”
그는 13부대가 해체한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아직 날 대장이라고 불렀다.
뒤이어 신도아와 류라임도 도착했다.
둘은 진이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들어오자마자 류라임이 소파에 풀썩 눕다시피 앉았다.
“오다가 잠깐 모자가 벗겨졌었다.”
신도아가 그들이 기진맥진한 이유를 설명했다.
“저런.”
나는 짧게 안타까움을 표했다. 모자가 벗겨진 직후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을 거다.
일반인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있는 헌터들은 그들을 대하는 게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악스럽게 사진을 요청하는 손길을 거절하다가 남의 팔을 부러뜨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 안에 들어오니 좀 낫군.”
“괜찮죠? 보안도 철저하고.”
이운우에게 추천받은 호텔 룸이었다. 우리처럼 남들 눈을 피해 모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건 오랜만이네요.”
류라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아 씨 얘기는 들었어요. 홍염으로 돌아갔다고요.”
“원래 내 소속은 그곳이었으니까.”
본디 윤강백을 추종했던 신도아는 홍염으로 돌아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홍염은 어떻게 한다던가요? 아무래도 헌터 길드들이 많이 문을 닫았잖아요.”
“게이트가 문을 닫았다고 각성자들이 사라진 건 아니지 않나. 정부와 협업해서 범죄자들 중 각성자를 잡아들이는 일을 할 것 같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각성자들의 범죄는 게이트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일반인들은 각성자를 제압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서, 원래도 심각한 각성자 범죄는 국가에서 헌터 길드에 의뢰를 넣어 해결하곤 했다.
“각성자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더라고요.”
“게이트도 없어졌으니까. 필요 없는 사냥개라 이거지.”
특히나 헌터 길드들이 대거 문을 닫으면서 생계를 잃은 헌터들이 늘어나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최상위 헌터 길드면 모를까, 영구 던전이나 돌면서 마력석을 채집하던 대부분의 하위 헌터들은 갈 곳을 잃었다.
“최상위권 헌터 길드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정부 기관이 만들어질 것 같더군.”
“그 정부 기관까지 전부 사라지고 나면 정말로 게이트 시대가 막을 내리겠네요.”
각성자란 기본적으로 ‘게이트’에 입장해 시스템에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킨 이들을 가리킨다.
허나 이제 게이트는 영영 사라졌으니.
현존하는 각성자를 제외하면 신규 각성자 유입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이 헌터들을 최대한 많이 가진 나라일수록 국방력이 굳건해진다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헌터들을 전부 군에 귀속시키고 싶을 것이다.
이번에 정부 기관을 새로 만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름만 ‘군’이 아닐 뿐. 국가에 귀속시키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나쁠 건 없지.’
게이트 클리어라는 헌터들의 목적이 사라졌다.
국가에 귀속되어 각성자 범죄를 처단하는 민중의 지팡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홍염, 청사를 주축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곤 들었어요.”
“역천은 민간 기업으로 빠졌다지.”
“네. 아무래도 거부감을 갖는 헌터들도 많잖아요.”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군헌터들과 뿌리 깊은 갈등을 이어온 탓에 국가에 속하는 걸 거부하는 헌터들도 많았다.
혜원 언니도 마냥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민간으로 돌아서는 쪽을 선택했고.
“두 분은요? 저랑 신도아 씨는 소속이 있지만, 두 분은 13부대 소속이었잖아요.”
내 말에 정로운과 류라임이 잠시 머뭇거렸다.
“저는 사실…… 헌터 생활을 하면서 벌어둔 돈으로 재단을 만들려고요.”
정로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로나처럼 아픈 아이들을 돕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다. 지극히 정로운다운 선택이었다.
“저도 함께하기로 했어요.”
류라임이 뒷말을 이었다.
“류라임 씨도요?”
“네.”
이건 꽤나 의외였다.
내가 놀란 얼굴을 했는지 류라임이 설명을 덧붙였다.
“으음~. 사실 저는 기부나 봉사 같은 덴 크게 관심이 없어요!”
공감 능력이 극히 떨어지는 류라임에게 타인을 위한 봉사는 그다지 감흥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가 필요하다잖아요.”
생긋 웃는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게 누군가가 가장 필요했을 때 서하 님이 달려와주신 것처럼요. 그럼 저도 서하 님하고 조금은 비슷해질까요?”
“류라임 씨…….”
새하나교로 인해 고통받던 류라임을 구해낸 것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과거의 그녀는 세상을 증오하며 살인귀가 되었건만. 이제 그녀는 세상에 자신의 선행을 베풀고자 하고 있었다.
그 뒤바뀐 미래가 무척 감격스러웠다.
“서하 님은요?”
그때 불쑥 류라임이 물었다.
그녀의 기대감 가득한 눈빛에 나는 턱 말문이 막혔다.
“서하 님도 역천하고 계속 활동하실 건가요?”
“아뇨. 저는…….”
신도아와 정로운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사실대로 토로했다.
“……저는 아직 뭘 할지 정하진 못했어요.”
나는 시선을 약간 아래로 떨궜다.
“다들 전쟁이 끝나고 자기 갈 길을 찾아 나서는데 저만 이러고 있으니 우스울 따름이죠.”
비단 13부대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혁명군 사람들도, 다른 헌터 길드 사람들도 제각기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데.
나 홀로 덩그러니 남은 것 같았다.
‘나는 대체 뭘 해야 하지?’
헌터가 아닌 나. 전쟁이 끝난 시대. 그런 것들을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는데.
코앞까지 들이닥친 뒤에도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너무 조급할 필요는 없죠.”
정로운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사실 대장은 그동안 너무 바빴잖아요. 앞으로 몇 년 더 푹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맞아요!”
류라임이 적극 동의했다.
“꼭 뭔가 해야 할 필요도 없지.”
신도아도 그렇게 말하며 고갤 끄덕였다.
“당장은 그냥 전에 배우고 싶었던 것도 배워보고, 안 해본 것들도 경험해보고. 그 정도로 충분하죠.”
“이렇게 모여서 여유롭게 이야길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롭군.”
신도아가 살짝 웃었다.
***
전적으로 내 편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곰곰이 한 번 더 고민했다.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나는 대체 뭘 했지?
그때의 나는 서둘러 졸업해서 돈을 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홀로 독립해서 살아가는 데 학생이란 신분은 큰 걸림돌이었다.
스킬을 활용해서 돈이나 벌고 싶었다.
‘그럼 그 전에는?’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마저 눈치 보는 상황에서 취미 생활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남들 다 다녀봤다는 그 흔한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 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었다.
문득 나는 내가 생존에 급급하며 살아온 것이 비단 전쟁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
「나의 사랑하는 친우에게.
잘 지내고 있지? 나는 벌써 3번째 여행지에 도착했어. 여긴 내 고향하고 비슷한 느낌의 건축물이 많은 곳이야. 꼭 고향에 온 것만 같아.
역시 나는 편지가 더 편해서 이렇게 엽서를 보낼게.
아름다운 밤과 함께, 이사벨라가.」
유럽으로 보이는 배경과 함께 밝게 웃는 이사벨라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고는 설핏 미소를 머금었다.
“서하야! 아침밥 다 됐어!”
문 안쪽에서 들리는 혜원 언니의 외침에 나는 편지를 챙겨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연원아. 너 오전 수업은?”
“아직 시간 괜찮아요.”
“아, 그래? 참. 내가 말했지? 앞으로 일주일은 안 들어올 거라고.”
“네. 들었어요.”
혜원 언니가 정장 재킷을 입으면서 다급하게 아침밥을 한두 술 떠먹었다. 오늘 누구 호위 임무가 있다 했던가.
“으악! 늦겠다!”
혜원 언니가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신발을 구겨 신기 시작했다.
“미안해, 연원아! 밥은 다음에 먹을게!”
콰앙!
다급하게 문이 닫혔다가 이내 다시 열렸다.
“벨제부브 온다 해도 문 열어주지 말고!”
“네에. 걱정 마요.”
그제야 다시 문이 닫혔다.
부산스러운 아침이었다.
표연원도 앞치마를 벗고 식탁에 앉았다. 신학기가 시작된 터라 많이 바쁠 텐데 혜원 언니가 장기간 출장을 가는 날이면 이렇게 손수 아침을 차렸다.
“누나는 오늘 우리 학교 잠깐 온다고 했죠?”
“응. 이따 잠깐 올리버 씨네 꽃집 들렀다가 한국대학교 들를 것 같아.”
“셀이는 또 야작하느라 밤새운대요?”
“그렇지, 뭐. 올리버 씨가 걱정이 많아.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고.”
나는 아침 식사를 하며 담소를 이어갔다.
미술학원에 다닌다던 셀은 그새 미대에 들어갔다.
검정고시도 치면서 미대까지 준비하고, 한동안 고생하더니 결국 실기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
과연, 미술에 천부적인 감각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원래 미대가 과제도 많고 힘들기로 유명하거든요.”
“벌써 3일째 철야라더라. 일단 두고 온 재료가 있다고 꼭 좀 부탁한다 해서 가긴 하는데…… 좀 쉬엄쉬엄했으면 좋겠네.”
내 말에 표연원이 날 빤히 바라봤다.
“왜?”
“아뇨. 누나가 그런 얘길 하니까 또 신선해서요.”
“뭐가 신선해. 요즘은 계속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이것저것 하고 있잖아요. 외국어도 배우고, 악기도 배우고.”
이걸 놀고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참 애매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삶에서 배제하고 살아왔단 걸 인정했다.
그래서 차근차근 하나씩 경험해보는 중이었다.
“바이올린은 좀 배울 만해요? 왜, 요리 배울 땐 세 시간 만에 그만뒀잖아요.”
“요리는…… 네가 만든 음식 먹다가 내가 만들어서 먹으려니까 너무 힘들더라.”
이미 내 입맛은 표연원의 손맛에 길들여진 탓이다.
야심하게 배워서 첫 요리를 선보였는데, 혜원 언니도 애써 웃으며 숟가락을 내려놓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