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잘 가늠이 안 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것도 한 가지 선택지가 될 수 있겠으나 이사벨라는 쉬이 날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다니엘이 죽기 직전에 그랬어.”
고민하는 내게 이사벨라가 뒷말을 이었다.
“너는 다 알고 있었다고.”
이사벨라가 앞으로 마주할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그걸 증명했다.
“대체 뭘 알고 있던 거야? 나도 그걸 알아야겠어.”
“그 펜던트, 열어봤어?”
달칵. 이사벨라가 펜던트를 열었다.
안에는 얼굴이 까맣게 타버린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게 왜?”
“그 사진…… 어린 시절의 당신이야.”
“뭐?”
이사벨라가 펜던트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얼굴 부분이 완전히 소실된 탓에 이게 누구인지 알아볼 방법이 딱히 없었다.
“펜던트 바깥 면에 새겨진 문양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아?”
“귀족 가문의 문장 같긴 한데. 처음 봐.”
이사벨라의 손아귀에서 펜던트를 잠시 가져갔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그녀의 목덜미 화상에 가져다 댔다.
“이 화상 밑에 그려져 있던 문양이랑 같은 모습이잖아.”
“……그러고 보니 비슷하네. 아래쪽이.”
문양이 눈에 익은 사람이 아니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일부만 남기고 화상으로 가려져 있었다.
때문에 직접 목 옆에 가져다 대지만 않으면 선뜻 연상하기 어려웠다.
“이 문양은 로스 가문의 상징이야.”
“……하지만 그 가문은…….”
“그래. 멸문당했지.”
이사벨라 역시 얼핏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주 어린 시절에 가문이 몰살당한 탓에 문장을 못 알아본 것뿐이겠지.
“잠깐만. 이게 로스 가문의 문장이라고?”
이사벨라는 자신의 목덜미에 남겨진 문양의 정체를 깨닫자, 나머지도 대충 연상이 된 것 같았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내가?”
“그래.”
나는 끝내 그녀가 진실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다니엘 블랙의 본명은 다니엘 로스였어. 이사벨라, 당신의 본명도 아마…… 로젤리타 로스겠지.”
“로젤리타…….”
그녀가 작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다니엘이…… 내 가족이었다고……?”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이사벨라가 목소리를 떨었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친부모가 찾아온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봤을 때부터.”
-친부모도 별로 궁금하지 않아. 날 진짜 버렸던 건지, 잃어버린 건지. 이 흉터는 무슨 의미인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싶기도 했는데. 이제 와선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때 이사벨라의 대답을 듣고 알려주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었지.
그녀 역시 그 순간이 기억나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 이 펜던트는…… 다니엘이?”
“혁명에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그가 남았을 때. 다니엘이 내게 이 펜던트를 맡겼어.”
그는 모든 것을 끝마쳐 후련하다는 얼굴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 만약에. 누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 펜던트를 전해줬으면 해.’라고 하면서.”
“이 펜던트를…….”
이사벨라가 잘게 떨리는 손끝으로 펜던트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는 하지 않을게. 아마 그때의 나라면 듣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이사벨라.”
내가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가자 이사벨라는 도리어 두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이사벨라가 내게 등을 지고 섰다.
“차라리…….”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차라리 계속 모르는 척하지 그랬어.”
주르륵.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랬더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둘은 언제든 서로의 등에 칼을 꽂을 준비를 한 협력자였다.
동시에 한쪽은 지독한 귀족주의를 내세웠고 한쪽은 평등주의를 내세워, 그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실감하기도 했다.
크게 다툰 뒤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자꾸만 마음이 쓰였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사벨라는 그 정체를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미안. 네 잘못이 아니란 건 알아. 그런데 지금은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서…….”
내 방관도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마는. 어느 누구라도 선뜻 나설 순 없었을 것이다.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네.”
그대로 이사벨라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한참을 그 등 뒤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이사벨라는 뒤돌지 않았다.
***
새가 지저귀고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와 도토리를 줍다가 내 발걸음 소리에 후다닥 도망친다.
“저 왔어요.”
“오냐.”
손이석이 마루에 앉아 있다가 날 맞이했다. 그가 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아주 오랜만인 것 같았다.
“어쩐 일로 그냥 계세요?”
“나도 이제 나이를 먹은 모양이야. 불꽃이 예전 같지 않으니, 원.”
그러더니 은근슬쩍 내게 눈치를 준다.
“커흠.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할 텐데 말이다…….”
“좀 쉬시는 것도 좋죠.”
그 뻔히 보이는 술수에 냉큼 답해주기가 싫어 부러 모르는 척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한 번 더 다른 말을 꺼낸다.
“아니. 내가 쉬고 싶다는 건 아니고. 그냥 불꽃 좀 내뿜는 착한 새 한 마리 어디 없나~ 싶어서 말이다.”
“그러게요. 그런 새 어디 없나. 한번 찾아보시죠.”
내가 계속 모르는 척하자 결국 손이석이 백기를 들었다.
“파이로 좀 불러다오.”
손이석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마음 붙일 곳이 없었는데 이제 그 녀석이 내 자식 같다. 고것이 내가 주는 닭고기를 얼마나 잘 먹었는데……!”
“알겠어요. 알겠어요.”
거의 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안 그래도 손이석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도심에선 파이로가 마음껏 뛰어놀 수도 없었고. 손이석과 함께하는 걸 파이로도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눈을 감고 그 이름을 불렀다.
“파이로!”
마력이 쑤욱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삐이이이!
“파이로!”
손이석이 미리 준비해둔 화염 내성 갑옷을 입고서 파이로를 끌어안았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람.
-삐이이! 삐삐! 삐이이이!
파이로도 잔뜩 신이 나서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때마다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화르륵 타올랐지만 말이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얼싸안았다.
주인인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지.
“큼큼.”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손이석이 체면을 차렸다.
“여태 그런 것처럼 파이로는 내가 잘 돌봐주도록 하마.”
“네. 부탁드릴게요.”
“참. 송다정 고 녀석은 언제쯤 들른다더냐?”
나는 살짝 몸을 굳혔다.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여유가 생겼을 텐데…….”
“하하하. 글쎄요. 저도 잘…….”
“아무튼 한번 다시 찾아오라고 일러두거라. 아직 전수하지 못한 기술들이 많으니.”
바짝 굳어 어버버할 다정 언니가 저절로 떠올랐다.
“……일단 전해는 드릴게요.”
진짜로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나는 오늘 이곳저곳 돌아다닌 탓에 피곤에 지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벌컥, 문을 열자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쭈! 한 대 치겠다? 어? 한 대 치겠어.”
짜증 어린 표정을 한 벨제부브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의 혜원 언니가 대치하고 있었다.
둘은 날 보자마자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마침 잘 왔다. 서하가 결판을 내주면 되겠네!”
“좋군. 어디 내 주인의 판단력을 시험해볼까.”
“누가 누굴 시험해?”
“내가 섬기는 주인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겠다는데 문제라도 있나?”
둘이 다시금 으르렁거린다.
후우. 나는 잠시 한숨을 내뱉었다.
“또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아니! 쟤도 이제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기로 했으면 일을 분담해야 할 거 아냐. 설거지 좀 해달라고 했더니 안 하고 버티잖아.”
“나는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내가 먹은 식기도 아닌데 왜 내가 주인도 아닌 인간들이 먹은 식기를 치워야 하지?”
“이 집에 들어와 얹혀살고 있으면 집안일은 분담해야지!”
둘이 팽팽하게 접전을 벌였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생활을 시작하면서, 벨제부브 역시 내게 종속된 하수인으로 나와 함께 지구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엔 다들 마왕으로 싸웠던 ‘그’ 벨제부브가 내게 종속된 것에 무척 놀랐다.
나 역시 혜원 언니나 표연원이 벨제부브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걸 알기에 따로 집을 구해 독립하려고 했다.
그러다 혜원 언니가 ‘뭘 믿고 저놈이랑 너 단둘이 한집에서 살게 하냐’며 적극적으로 반대해 결국 다 같이 한집에서 살게 됐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걸? 나한테 실수로 상처라도 내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으윽…….”
혜원 언니가 얼굴을 들이밀자 벨제부브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혜원 언니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된다는 제약을 여전히 유지 중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 둘의 싸움은 언제나 혜원 언니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나 다치는 꼴 보기 싫으면 설거지하는 게 좋을 거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 협박은 벨제부브에게 아주 잘 먹혔다.
그가 도움을 구하는 듯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슬쩍 고개를 돌렸다.
“너……!”
벨제부브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반면에 혜원 언니는 더욱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봤지? 우리 서하는 내 편이라고.’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집 주인은 혜원 언니라서…….”
나는 작게 변명했다.
결국 나부터가 이 집에 얹혀사는 신세니까 말이다.
“크윽. 내가 이런 치욕을 겪다니…….”
혜원 언니가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는 사이에 나는 슬쩍 벨제부브의 옆에 섰다.
“뭐 하는 거냐.”
“같이 하자고.”
혜원 언니는 대놓고 벨제부브를 괴롭히고, 표연원도 안 그런 척 은근슬쩍 벨제부브를 못살게 구는 데 동참하고 있었다.
날 따라 이 집에 들어와서 그가 겪은 수모가 만만치 않기에 나는 좀 마음이 쓰였다.
“왜?”
벨제부브가 그런 날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다. 됐다. 내가 하지. 에드문드가 연락을 기다리던데, 에드한테 먼저 연락해보는 게 좋을 거다.”
“에드문드한테? 무슨 일 있나.”
나는 고무장갑을 끼려다가 다시 내려놨다.
그러자 벨제부브가 이젠 능숙한 손길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 요즘은 좀 어떻대?”
“……썩 좋진 않은 것 같더군.”
이것 참.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톨룩의 마계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영상석이 마련된 곳이었다.
자리에 앉아 신호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문드가 영상석 안에 보였다.
“에드문드. 날 찾았다고?”
-그래.
간만에 보는 에드문드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는 온통 엉망이었고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그는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은 술에 취해 있었다.
-조만간 여기도 끝장일 것 같아.
드물게도 그는 멀쩡해 보였다.
혀가 꼬부라지는 것도 없었고, 한쪽 눈이 반쯤 감겨있지도 않았다.
-이 빌어먹을 톨룩도 이젠 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