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향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하얀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사진 속에서 정로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환자복이 아닌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그녀의 유골이 담겨있을 함 앞에서 정로운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정로운 씨.”
“아……. 오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마중 갔어야 했는데…….”
나는 정로운에게 괜찮다고 만류하고는 그의 옆에 섰다.
“살아 돌아오셨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직접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운이 좋았죠.”
정로운은 날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힘없는 미소였다.
“대장이라면 지옥에서라도 다시 돌아올 줄 알았어요.”
그 말에 짙게 밴 신뢰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장한테 미리 로나를 소개해줘서 다행이에요. 마지막에 떠나보낼 때 한 명이라도 더 찾아와줬으니까.”
“다른 사람들은요?”
“로나는 어려서부터 병원 신세를 져서요. 또래 친구들이 마땅히 없죠. 있다 하더라도 다들 병원에서 못 움직이니까…….”
그래서 장례식장이 꽤나 휑했다고 한다.
정로운을 찾아온 이들이 두어 명 있을 뿐. 호화로운 장례식장이 텅텅 비었다고.
“저도 그동안 돈 버는 데 급급해서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고요.”
헌터가 되기 전까진 남들하고 술 한잔 기울일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정로나의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테니.
“그래도 류라임 씨랑 신도아 씨가 많이 도와줬어요.”
그 둘이 장례식 기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고 듣긴 했다.
“저도 같이 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대장은 이렇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그가 힘없이 웃었다.
“로나한테 인사하실래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나는 정로나의 사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묵념했다.
‘고마워요. 로나 씨.’
내 목숨은 사실상 그녀에게 빚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세상은 평화로워졌고 나 역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지구를 구한 숨겨진 영웅이라 하면 좋을까. 그녀가 내게 나침반을 맡겼던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그러니 이젠 내가 당신의 바람을 이뤄줄 차례겠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정로운에게 건네줄 것이 있었다.
“정로운 씨. 사실…… 정로나 씨가 제게 맡긴 물건이 하나 있었어요.”
“로나가요?”
“네. 바로 이거요.”
품 안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빙그르르, 나침반 침이 빠르게 회전하며 심기가 불편한 티를 냈다.
“그건…… 어머니가 남겼던…….”
“맞아요. 정로나 씨가 이걸 제게 맡아달라고 했거든요.”
“이걸 왜 대장한테……? 로나랑 대장은 그날 처음 본 사이였을 텐데…….”
정로운은 자신도 모르는 동생의 행적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정로나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해줬다.
“로나 씨가 말하기를,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정로운 씨가 살아갈 목적을 잃고 방황하게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말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이제 13부대는 해체했고 게이트도 영영 나타나지 않게 됐다.
정로운은 헌터에서 순식간에 직장을 잃은 셈이었다.
그동안 벌어들인 수입이 있으니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제부터 뭘 위해 살아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정로운 씨. 이 나침반 돌려받고 싶지 않아요?”
“네? 하지만 이미 대장한테 귀속된 거 아닌가요?”
나는 나침반을 정로운의 손아귀에 쥐여주었다.
“그러니까 이 나침반을 돌려받을 때까지 살아있어야겠네요.”
정로운의 눈빛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가 이내 천천히 밝은 빛이 깃들었다.
정로나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흡…….”
그는 숨죽여 울었다.
“그때 벌써…… 흑, 로나는 거기까지…… 흐흐흑, 생각했었나…… 봐요…….”
정로운이 뜨문뜨문 뒷말을 이었다.
“저는…… 저는, 그것도 모르고, 흡, 로나가 이제 곧 나을 거라고……! 흐흐흑,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때 로나는 이미……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네요…….”
정로나의 따스한 눈빛이 저절로 생각났다.
-제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에요. 언제나 나와 함께했던 친구 같은 존재죠.
두려움이 없어 보였던 그녀가 단 한 가지 두려워했던 것.
-제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여기 두고 가는 제 하나뿐인 혈육이죠.
그건 바로 혼자 남을 정로운이었다.
나는 펑펑 우는 정로운을 가볍게 안아줬다.
나침반을 꼭 쥔 채로.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아파했다.
***
훌쩍, 정로운이 민망한 듯 작게 웃었다.
“안 좋은 꼴을 보였네요.”
“아니에요. 정로나 씨 부탁이었다곤 하지만 마땅히 당신에게 돌아가야 할 유품을 제가 가로챈 셈이니. 제가 더 죄송하죠.”
그러자 정로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나가 뭘 걱정했는지 잘 알겠어요.”
그는 평소의 어리숙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한층 어른스러운 얼굴을 했다.
“고마워요, 대장. 로나가 대장 덕분에 그래도 편안하게 갈 수 있었을 거예요.”
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에게 나침반을 꼭 쥐여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나침반은 정로운 씨가 갖고 있어요.”
“제가요?”
“네. 소유주가 바뀔 때 바로 옆에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정로나로부터 저 아이템을 물려받았을 때처럼 말이다.
엉뚱한 곳에 있다가 애먼 사람을 주인으로 삼으면 곤란하기만 하다.
내 말에 정로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바둥거리는 나침반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정말로…… 고마워요. 대장.”
그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
“어, 서하 왔네?”
혜원 언니가 바쁜 와중에 날 보며 반겼다. 길드 본부를 정리하느라 이곳저곳 다 뒤집어엎느라 난리였다.
“어쩐 일이야, 여긴?”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커피 사왔는데…… 많이 바빠 보이네요.”
“응? 아냐, 아냐. 난 길드장이잖아. 좀 쉬어도 돼.”
혜원 언니가 월권하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내가 머쓱하니 웃자 결국 혜원 언니가 짝짝, 손바닥을 부딪쳐 이목을 주목시켰다.
“잠깐 휴식시간! 30분만 쉬자!”
“흐아아아!”
“살았다아아!”
길드원들이 저마다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조연호도 모처럼 육체노동을 하고 있었는지 땀을 삐질 흘리며 내 옆에 붙었다.
“내 커피도 있지?”
“물론이지.”
나는 그의 몫으로 사둔 커피를 꺼내 건넸다. 그러자 체력 포션을 먹는 것처럼 커피를 쭉쭉 빨았다.
“힘들어 죽겠네. 여기 웬 잡동사니들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니까.”
“그러게 진작 정리했으면 좋았잖아요.”
조연호의 타박은 혜원 언니가 애써 못 들은 체했다.
“제가 좀 도울까요?”
“아냐. 됐어. 그 정도는 아냐. 여기 애들 다 헌터 출신인데, 뭐!”
짐 좀 옮긴다고 힘들어하면 헌터 이름이 운다며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그런 것치곤 조연호는 무척 피곤해 보였지만.
“이제 우리도 헌터 딱지 떼고 경호회사로 새롭게 태어나야지.”
그렇게 말하는 혜원 언니는 새롭게 펼쳐질 세상에 무척 들뜬 것 같았다.
“아, 그렇지. 에녹아!”
그때 혜원 언니가 뒤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김에녹! 나와봐!”
“……김에녹?”
“길드장님이 그냥 저렇게 부르는 거야. 한국인은 이름이 세 글자여야 한다고.”
조연호가 작게 속삭였다.
아하. 저 이국적인 이름에 김이라는 성만 붙인 건데 한순간에 친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 너머에서 에녹 클라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나?”
“응. 너도 커피 좀 한잔 마시면서 쉬라고.”
“잘 마시겠다.”
에녹이 내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커피를 한잔 가져갔다.
나도 어쩌다 에녹이 여기서 일하게 된 건진 잘 모르겠는데……
지구로 돌아와 보니 이미 에녹은 역천에서 일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전쟁터 한복판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제 그는 제법 지구에 적응한 태가 났다.
에녹는 역천의 비호 아래 다른 혁명군 출신들보다 훨씬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지구의 여러 문물에도 아주 익숙해졌고 말이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를 능숙하게 받아드는 것만 해도 그렇다.
“왜 그러지?”
“아니야.”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 보다. 나는 그에게 엘리사의 안부부터 물었다.
“엘리사는 요즘 잘 지내?”
“스마트폰인가…… 하는 걸 이용해서 뭔갈 하는 것 같던데.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쪼르륵. 그가 커피를 단숨에 끝장냈다.
“노래하는 영상을 찍는 것 같더군.”
“너튜브라도 시작한 모양이네.”
하긴. 나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데 엘리사의 노래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게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영상을 보고 연락 온 누군가를 만난다고 했다.”
“연락이 왔다고? 그거 좀 이상한, 뭐 그런 거 아냐?”
혜원 언니가 살짝 놀라며 물었다.
“나도 물어봤는데 그런 건 아니고 무슨 연예 기획사라고 했다.”
“뭐어? 연예 기획사? 어디?”
“SN이라고 했다.”
에녹을 빼고 우리는 놀라 눈을 껌뻑였다. 왜냐하면 SN 엔터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연예기획사 아니던가.
“진짜?!”
“거길 엘리사 혼자 보냈어? 같이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건물 구경만 한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엘리사도 그냥 인간들보단 훨씬 빠르니 쉽게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
에녹이 마음 놓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하긴. 엘프의 피가 섞였는데. 몸놀림이 날쌔긴 하겠지.
“와, 그럼 엘리사 연예인 되는 건가?”
“그 어린애가 잘할 수 있을지, 원.”
역천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이미 엘리사를 거의 자기 여동생처럼 여기는 수준이었다.
“잘할 거다.”
에녹은 확신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엘리사를 향한 신뢰가 듬뿍 담겨있었기에,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둘이 아주 순조롭게 지구에 녹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
저벅, 저벅.
캄캄한 밤, 호숫가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에 나는 남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약속한 장소에 나가자 모자를 푹 눌러쓴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일부러 발걸음 소릴 내자 내 인기척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돌린다.
모자 속에 머리카락을 집어넣어 애써 감췄지만, 한 가닥 빠져나온 붉은 머리칼 한 가닥은 감춰지지가 않았다.
이사벨라.
그녀가 날 정면으로 응시했다.
혁명군에 대한 여러 조사들 때문에 우리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마주했다.
사실 아직도 접근 금지 명령이 해제되지 않았는데 몰래 만나는 거였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이사벨라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서서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옷 안쪽에서 펜던트를 꺼내 밖에 내놨다. 목에 걸린 펜던트가 화려하게 빛이 났다.
“이 펜던트…… 대체 누가 준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내가 계속해서 감춰온 진실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