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完)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얼마 지나 지 않아 이운우는 한 메시지를 들 었다.
[알림: 세계 '지구'의 '오염'에 대 한 정보가 초기화되었습니다.]
한서하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지구로 돌아와 있었다.
"길드장님!"
보좌관이 기쁨의 탄식을 내질렀다.
아무리 봐도 여긴 지구였다.
이운우는 무전기로 주변 상황을 살폈다.
"전원 무사 복귀 했습니까?"
-치직. 홍염 측 인원 확인 중입니 다.
-나이트워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 부상자 200명에 사망자 400명으로 추정됩니다.
생존자들은 모두 지구로 무사히 복귀한 것 같긴 했다.
이운우는 지금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상부에도 보고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커다란 전광판에서 뉴스가 흘러나 오고 있었다.
-현재 세계 각국에 잔존해 있던 게이트가 동시에 소멸해 큰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클리어되지 않은 게 이트가 자연 소멸한 것은 이번이처음인데요…….
그래. 정말로 끝이었다.
이운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질 않아 얼떨떨 했으나, 이내 벅찬 흥분감이 그를 감쌌다.
고양감을 잔뜩 만끽하기도 전에 금방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싸늘 해졌지만 말이다.
-치직. 여기는 역천.
표혜원이 무전을 보내왔다.
-서하가... 보이질 않는데. 혹시 본부 쪽으로 갔어?
한서하라면 보고를 우선시하겠다 며 이쪽으로 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운우가 보좌관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얘기가 입 수된 바는 없다는 뜻이었다.
"여기에도 없습니다. 아직 오고 있 는 중일 수도 있으니 조금 더 기다 려 보죠."
이운우는 이때까지만 해도 대수롭 지 않게 생각했다.
크로노스를 발견한 곳이 워낙 오 지 산간이니 내려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고, 동료들 중 일 부가 다쳐서 병원으로 먼저 이동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간이 흘러 13부대가 본 부로 복귀했을 때도 한서하는 없었 다.
"도중에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 니 모든 게 끝나 있었다고……
이운우가 그들의 증언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인근을 찾아봤지만 아무런 흔적 도 찾지 못했다."
신도아가 뒷말을 덧붙였다.
"서하 님은 어떻게 된 걸까요 ……? 그때 어떻게든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류라임이 후회 어린 어조로 중얼 거렸다. 정로운은 동생의 부고를 듣 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한 뒤였다.
한서하가 크로노스에게 도착한 것 까진 명확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전쟁이 끝났으니까.
다만 문제는…….
'그 이후로 갑자기 자취를 감췄 다……
이전에도 비슷한 전적이 있으니 얼핏 '톨룩으로 넘어간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왜냐하면 톨룩과 지구 사이를 잇 던 오염이 완전히 끊겨버렸으니까.
톨룩으로 넘어갔으면 그것도 문제 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테 고, 톨룩은 오염으로 인해 썩어 들 어가고 있었으니.
'대체 어디로 간 거냐.'
결국 추측만 난무할 뿐이었다.
'살아만 있어줘. 제발……1'
이운우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전쟁의 종막이 선언됐다.
국제기관은 전쟁의 여파를 해소하 기 위해 힘을 썼다.
게이트는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겠지만, 이미 반파된 민간인들의 삶의 터전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급급했던 나라들이 드디어 게이트 난민을 돌 보기 시작했다.
영구 던전까지 모두 사라지자 주 인 없이 빈 공터가 된 땅들도 많았 다.
몬스터 부산물이나 마력석을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됐으니 그에 대 한 대책 마련도 시급했다.
세상은 바삐 굴러가고 있었다. 모 두들 평화에 심취하며, 앞으로의 변 화를 위해 애썼다.
쾅!
몇몇 사람들을 빼고 말이다.
표혜원은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쳤 다.
덕분에 테이블에 쩌적, 하고 금이 갔지만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말해봐."
표혜원이 거의 잡아먹을 듯이 눈 을 부릅떴다. 무척 위협적인 광경이 었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 니다."
"노이트도 발견되지 않았단 말이 지?"
이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
"저번하고는 상황이 다릅니다."
한서하가 톨룩이 아닌 완전히 다 른 제3의 세계를 여행 중인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워낙 위 험한 임무였지 않습니까."
지구의 오염을 되돌리는 일. 그것 만큼 중대한 일이 또 있을까.
그 과정 중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노이 트까지 거기에 휘말려서 산산조각 났다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확인해본 결과…… 한서 하의 소환수 '파이로'까지 그 모습 을 감췄습니다."
"파이로까지?"
송다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환수와의 계약이 해제되는 경우 는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계약자의 죽음.
"아시겠습니까? 저번하고는 상황 이 완전히 다르다고요."
이운우는 마치 모래를 씹는 것처 럼 인상을 팍 구겼다.
대외적인 미소도 유지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을 잠시 감춘 다음 보란 듯이 멀쩡한 얼굴 로 복귀했다.
"그러니 이만 나가주시죠. 아직 처 리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서요."
태연하게 말을 끝냈지만 그의 손 아귀에 들린 서류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실례했어."
표혜원이 짧게 인사를 남기고는 뒤돌아 나갔다. 송다정과 표연원이 황급하게 그 뒤를 따라나섰다.
탁.
문이 닫힌 직후, 이운우는 서류 뭉 치를 벽에 집어 던졌다.
콰앙!
"하아, 하아……
"괜찮으십니까."
보좌관이 서류 더미를 정리하며 물었다.
"..미안하군. 내가 요즘... 기 분이 좀 오락가락해서 말이야."
그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목덜 미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렸다.
그제야 좀 살 것만 같았다.
이운우는 자꾸만 자신의 목을 콱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이럴 때가 아닌데.
전쟁 후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포스트게이트 시대의 패권 을 누가 쥐느냐가 결정된단 말이다.
홍염과 청사는 여전히 건재한 거 대 길드였고 이 둘은 양대 산맥으 로 끊임없는 경쟁 속에 놓여있었다.
당연히 이운우도 전쟁은 끝났지만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꿀꺽, 꿀꺽.
이운우는 냉수를 들이마셨다.
머리로는 아는데 자꾸만 목이 턱 턱 막혀만 왔다.
"……안 죽는다면서."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
"완전 거짓말이었잖아."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 * *
한서하가 실종된 지 한 달쯤 지났 을 때. 모두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 다.
한서하가 죽었다고.
시신도 없었고, 아무런 흔적도 없 었지만 사람 하나가 게이트에서 그 렇게 사라지는 것을 통상적으론 '죽음'이라 일렀다.
물론 한서하에게 이렇게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난 전적이 있었지만 이 번엔 소환수가 사라진 것도 그렇고, 톨룩과의 연결이 막힌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상황이 더 나빴다.
그녀의 죽음은 도저히 믿기 어려 운 것이라서 모두들 덤덤하기까지 했다. 실감조차 나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나타나 아무 렇지도 않게 '다녀왔어.' 하고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다.
혁명군들은 아직 행정적인 절차를 밟는 중이라 움직이는 데 제한이 컸지만, 테오도르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한서하가요?"
셀이 도저히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에이. 장난이죠?"
그러나 테오도르의 얼굴엔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 아아.
"엘리사!"
듣고 있던 엘리사가 중심을 잃고 에녹의 품 안에 쓰러졌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네. 이번엔 내 가 개입한 것도 아니니 톨룩으로 넘어갔을 리도 없겠지."
매번 한서하 실종 사건의 배후에 는 테오도르가 있지 않았던가.
그조차도 모르는 한서하의 실종은 있을 수가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안 좋은 징조일 것이 다.
"나 역시 무척 유감스럽기 그지없 어……
테오도르가 살짝 고개를 떨궜다.
그의 첫 번째 지구인 친구였으니 그 역시 상심이 무척 컸다.
심지어 '톨룩에서 벌였던 금기를 범하면 한서하의 영혼으로 다시 그 녀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이내 포기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달칵, 이사벨라는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꽉 잡아 쥐었다.
아직 한서하에게 물어볼 것도 남 아있었는데. 작별 인사도 없이 갑자 기 이렇게 될 줄이야.
"자네들도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이 얘길 전하러 왔다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 흡."
올리버는 애써 태연한 척 뒷말을 잇다가 결국 눈물을 똑 흘리고 말 았다.
"흠, 흠. 죄송합니다……
그는 애써 아닌 척 눈물을 훔쳐냈 지만 계속해서 솟아나는 눈물을 감 출 순 없었다.
"뭐야, 형. 울어?"
셀이 애써 그를 타박했지만 목소 리엔 울음기가 가득했다.
"아, 왜 울고 그래! 우리가 울면 어떡하겠어. 어? 여기서 보란 듯이 멋지게 살아야 할 거 아냐!"
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한서하도 원하는 일일 거라 J곤广 . .. . . w그러나 침울해진 분위기를 회복하 긴 어려웠다.
테오도르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역시 착잡하긴 매한가지였다.
연구실로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무 거웠다.
* * *
달그락.
식기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애써 화기애애하게 이야길 나누다 가 잠깐 지나가는 침묵이었지만, 견 딜 수 없을 정도로 냉랭했다.
모두들 잔뜩 겁먹어 있었다.
혹여나 자신의 말 한마디가 상대 방의 아픔을 찌를까 봐, 혹은 무심 코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상기시킬까 봐 말이다.
"연원이가 오늘 고생하네. 늘 얻어 먹기만 해서 이거 어쩌지?"
"아니에요. 와인은 누나가 사 왔잖 아요."
송다정이 어색한 기운을 숨기며 발랄하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한 번 더 짠할까?"
표혜원의 권유에 다들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챙-.
와인잔 세 개가 서로 부딪치며 청 아한 소리를 냈다.
"원래는 고기를 통째로 굽자고 했 었는데 대신 스테이크로 준비 했어요. 괜찮죠?"
"연원이가 해주는 거면 뭐든 맛있 지! 그쵸, 언니?"
"응? 어, 그럼! 나중에 이걸로 장 사해도 되겠다니까."
표연원이 멋쩍다는 듯 웃었다. 슬 슬 메인 요리가 나올 차례였다.
"아."
그때 표연원이 저도 모르게 아차, 싶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둘의 물음에 표연원이 잠시 주저 하다 뒷말을 이었다.
"……저도 모르게 네 접시를 준비 했네요."
그 말에 송다정도 튀어나오는 신 음을 삼켜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도저히 모르는 체하 기 어려운 빈자리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서하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마지막 게이트가 열리기 전 이 식 탁엔 네 명이 둘러앉았는데 말이다.
"꼭 참석한다고 했었는데……
-전쟁이 끝나면 제가 식사 자리를 한 번 더 만들게요. 그때도 모두 참석해주셔야 해요.
그때 한서하가 마지못해 뭐라고 했더라.
-……저는 소보단 돼지고기가 더 좋아요.
그래. 그렇게 말했지.
애석하게도 그녀는 이 자리에 없 기 때문에 스테이크는 소고기로 준 비됐다.
표연원이 잠시 고개를 푹 숙인 가 운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좀 늦었네요."
달칵.
누군가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식기 를 집어 들었다.
두근, 두근.
표연원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점 점 커지는 걸 느꼈다. 고개를 아직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똑 똑히 알 수 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그러더니 태연하게 미소 짓는다.
표연원은 서서히, 아주 천천히 고 개를 들었다.
"장례식까지 치렀으면 행정 절차 가 좀 복잡해지는데."
한서하였다.
그녀가, 눈앞에 앉아있었다.
"......서하야."
표혜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서하야……!"
왈칵, 눈물을 쏟아내며 그녀를 와 락 감싸 안았다. 선명한 감촉에 더 욱 눈물이 났다.
"죄송해요. 제가 있던 곳이랑 여기 가 시간 축이 좀 달라서……
"흡, 흐흐혹! 서하야아아아!"
송다정도 벌떡 일어나 한서하에게 달려들었다. 의자가 휘청하며 바닥 에 쓰러질 뻔했다.
"어디 갔다 온 거야아아……. 이번 엔 진짜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아아아....
한서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 며 송다정까지 꼭 끌어안았다.
"저 돌아왔어요."
그 목소리는 환희에 가득 차 있었 다.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