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처음에 다니엘은 그가 죽기 직전 에 환상을 보는 줄 알았다.
마지막으로 제 혈육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이렇게 환상으로 구현되는 건가, 하고 어림짐작했다.
"다니엘……
그러나 이내 이사벨라의 손길이
그의 뺨에 닿았을 때. 다니엘은 그 녀가 진짜라는 걸 깨달았다.
"로젤......리타.…"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이사벨라가 멈칫했다.
"그걸 어떻게……
로젤리타는 이사벨라의 본명으로, 그녀가 버려졌을 때 헌 옷 조각에 수놓아져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로 살아가기로 다 짐한 이후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낸 적은 없었다.
다니엘은 이사벨라의 목덜미에서 반짝 빛나는 펜던트 줄을 발견했다.
옷 안으로 감춰져 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주 만약에. 누님을 만나게 된 다면…… 그 펜던트를 전해줬으면 해. 부탁한다. 한서하.
그건 분명 마지막에 한서하에게 맡긴 것이었다.
"다 알고 있었나……
우습게도. 둘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진실을 제3자인 그녀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니. 얼마나 야속한가.
어한서 하..해
그래도 그와 한 약속은 지켰으니 봐주도록 할까……. 다니엘은 흐려 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작게 중얼거 렸다.
"다니엘! 이봐요!"
이사벨라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뒤흔들었으나 조금도 반응이 없었 다.
심장이 멎었다.
다니엘이 끝내 죽음을 맞이한 것 이었다.
"누님!"
충격에 빠질 새도 없이 셀이 불쑥 튀어나와 이사벨라를 붙잡았다.
"서둘러 움직여야 해! 어서!"
이사벨라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셀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 게이트가 곧 닫힐 수도 있어. 그 전에 지구로 넘어가야 한단 말이야!"
셀의 말을 듣자마자 이사벨라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지구로 향하는 문은 여기서 완전히 반대편에 있었 다!
"거기까지 연결되는 문은 못 열 어'?"
"지금은 마력이 너무 불안정해서 안 돼. 아깐 그래도 완성 직전에 마력이 흐트러져서 그나마 가능했 던 거고!"
그렇다면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 었다.
적진 한복판에서 다시 아군에게 돌아가야 한다니!
"일직선으로 뚫고 갈 거야!"
"다른 사람들은!"
"올리버 형이 이끌고 있어! 올리버 형은 기척을 감지해서 사람들 위치 를 알 수 있대!"
"우린 왜 따로 움직이는 건데?"
이사벨라의 물음에 셀이 갑자기 앞에 나타난 병사를 지팡이로 내려 치며 대꾸했다.
"전쟁 한복판을 뚫고 데려와야 하 는 사람이 아직 남아있어서!"
"대체 누구…… 아!"
이사벨라도 그제야 깨달았다. 다른 혁명군들과 다르게 홀로 움직이던사내가 있지 않은가.
"에녹 클라우드!"
* * *
표혜원과 에녹 클라우드는 적진 한복판에서 마음껏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둘은 난생처음 합을 맞춰봤지만 꽤나 궁합이 좋아서 무척 만족스러 운 전투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갑작스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 은 감각이 들더니, 사방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등을 겹치고 있던 표혜원과 에녹은 서로의 존재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획! 후욱!
서걱.
"나도 잘은 모르겠군."
퍽!
휘이익!
둘은 손을 멈추지 않으며 상황 파 악을 위해 짧게 대화를 나눴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그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죽었는지 아무 도 덤벼들지 않게 됐다.
"갑자기 무전기도 먹통이고……
표혜원은 툭툭, 갑자기 고물이 된 무전기를 건드렸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고 싶 었는데 무전기도 마력석으로 작동 하는 물건인지라, 마력이 요동치는 지금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이런 상황이면 일단 대기하는 게 좋겠군."
그게 가장 무난한 방법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파악되 지 않을 때는 섣불리 움직이기보단 제자리를 고수하는 게 맞았다.
표혜원은 결국 희뿌연 연기 한가 운데 드러눕고 말았다.
예민한 기감으로 주변에 적이 없 다는 걸 파악하고 난 다음 행한 일 이었다.
"에녹 클라우드라고 했나?"
에녹은 그렇다고 대꾸했다.
"혁명군이라고 했지. 그럼 지구에 별다른 연고는 없겠네?"
"그렇다."
"잘됐다."
표혜원이 눕혔던 상체를 들어 올 려 자리에 앉았다.
"너 나랑 같이 일할래?"
"......내가?"
"그래. 일자리 필요할 거 아냐. 내 가 헌터 길드장이거든."
"그게 뭐지?"
표혜원은 살다 살다 길드장이 뭐 냐는 질문은 처음 들었기 때문에 잠시 침묵했다.
"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사설 무력 집단 같은 거야. 전쟁
끝나면 경호 업체로 바꿀 거고."
에녹은 그게 나쁘지 않은 제안임 을 알았지만 선뜻 받아들일 순 없 었다.
"난 인간이 아니라 엘프다. 그래도 상관없는가?"
"음〜. 네가 좀 귀찮기야 하겠지."
톨룩에서도 엘프는 흔치 않은 종 족인데, 전쟁이 끝나게 되면 지구상 에 엘프는 에녹 혼자일 것이다.
소수자에게 동반되는 여러 귀찮음 을 고려할 때, 에녹은 여러모로 고 생길이 훤했다.
"난 상관없는데?"
그 태연한 대꾸에 에녹은 저도 모 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익히 아는 누군가가 떠오른 탓이 었다.
"너희 지구인은 다 그런가?"
"그거 시비냐?"
"아니. 비슷한 말을 했던 사람이 있어서."
에녹을 황제의 기사에서 혁명군으 로 이끈 그 누군가 말이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잠시.
표혜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방향을 응시했다. 눈앞이 제대 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 기척은 분 명히 느껴졌다.
"온다."
"알고 있어."
무언가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돌 진하고 있었다.
방향은 적들의 본진에서부터였다.
꽈악.
표혜원과 에녹은 각기 자신의 무 기를 꽉 붙들었다.
잠시 침묵이 서리고, 놈들이 아주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다. 맹 수가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아주 신중한 태도였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거리 안에 다가온 순간.
촤악!
표혜원이 검을 휘둘렀다.
탁!
그리고 동시에 에녹의 창대에 가 로막혔다.
"히 이익!"
창대 바로 밑에서 셀이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응? 뭐야."
"혁명군이다. 아군이야."
"아, 그래? 이거 죄송합니다. 보다 시피 근방이 이 모양이라 구분이 잘 안 가서."
하마터면 두 동강 날 뻔한 셀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애써 괜찮다고 대꾸했다.
"그보다 서둘러야 해요!"
이사벨라가 에녹을 재촉했다.
표혜원은 몰라도 에녹도 지구에 남으려면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어 서 돌아가야 했다.
* * *
엘리사는 조금 초조한 듯이 문 앞 에 서 있었다.
테오도르가 미리 준비해둔 지구로 향하는 문 앞에서 그녀의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째깍, 째깍. 야속하게도 시간은 휼 러만 갔다.
짙게 깔렸던 안개도 서서히 걷혀 갔다. 그게 마치 끝이 다가오고 있 단 걸 알리는 것 같아서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올리버를 비롯한 혁명군 무리들이 었다.
"허억, 허억!"
그들은 적진 한복판을 가로질러 오느라 잔뜩 지친 상태였다.
"이사벨라 님은?"
"못 봤어요. 제 오빠는요?"
"이사벨라 님과 함께 올 거다."
올리버의 말에 엘리사가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비전투요원인지라 일찌감 치 이곳에 도착해있었다. 먼저 들어 가지 않고 기다린 것은 그녀의 동 료들을 향한 예우였다.
그런데 정작 에녹은 없고 나머지 사람들만 제시간에 도착하다니.
"부상자부터 먼저 들어갑니다!"
올리버의 지시 아래 하나둘 지구 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부상자들부터 서둘러 옮겼고, 올리 버는 맨 뒤에서 그것들을 주관했다.
"엘리사. 먼저 들어가 있어."
"저도 기다리고 싶어요."
"에녹도 네가 무사하길 바랄 거 다."
올리버의 설득에도 엘리사는 거듭 고개를 저었다.
강제로 엘리사를 집어넣을까 하는 고민도 잠시.
반가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사벨라 님!"
저 멀리서부터 그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은 아무리 단발이라 할지라도 무척 눈에 띄는 색깔이었 다.
에녹이 지쳐서 점점 느려지는 이 사벨라를 중간에 안아 들었다.
이사벨라는 그를 만류하기보단 서 둘러 달라고 부탁했다. 자존심을 세 울 때가 아니었다.
"먼저 들어가요!"
셀의 고함에 올리버는 망설이지 않고 엘리사를 집어 들었다.
그녀를 어깨에 걸쳐 메고는 훌쩍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에 에녹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남은 건 고작 다섯 발자국.
한 발, 두 발, 세 발.
남은 두 발자국은 펄쩍 뛰는 것으 로 대체했다.
"흐어 어업!"
셀까지 우당탕탕 바닥을 구르며 통과했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문이 닫혔다.
게이트가 끝난 것이다.
"……허억, 허억."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 건지 분 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고 익히 아는 얼굴이 등장했다.
"오. 잘 도착했군."
짙은 녹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그는 허물없이 방긋 웃었 다.
"지구에 온 걸 환영하네. 난 테오 도르라고 한다네."
"4. 4황자 저하?!"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테오 도르는 익숙한 듯이 웃어넘겼다.
"여기선 그냥 테오도르라고 불러 도 좋네."
그 말에 다들 놀라움을 감추질 못 했다. 4황자가 지구에 있는 것만으 로도 놀라운데, 이름으로 부르라는 권유까지 듣다니.
"게이트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때 올리버가 침착하게 물었다.
"이 문은 게이트가 닫히면 자동으 로 닫히게 되어 있다네. 이게 닫힌 걸 확인하고 여기로 와본 거였거든. 그런데 자네들이 멀쩡한 걸 보니 아무래도……
테오도르가 활짝 웃었다.
"우리가 승리한 것 같군."
우리
그 말에 혁명군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래, 우리였다. 그들은 이제 '지구'에 소속된 것이다.
지긋지긋한 톨룩이 아니라!
"살았다아아아아!"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저마다 기쁨의 표시로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가…… 이긴 건가?"
이사벨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지. 다소 희생이 있긴 했지
만."
테오도르의 대꾸에 이사벨라는 이 기쁨의 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이 가 떠올랐다.
다니엘 로스. 그는 처참한 전쟁터 에 영원히 남지 않았는가.
-다 알고 있었나……. 한서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이사벨라는 당장 한서 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이 말한 게 뭔진 몰라도 한
서하는 알고 있을 터였다.
"한서하는?"
이사벨라가 테오도르에게 재촉했 다.
"한서하는 어디 있어?"
그 말에 테오도르가 잠시만 기다 려보라며, 금방 확인 연락을 해봐야 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게이트가 클리어된 여파로 인해 이곳저곳이 떠들썩해서 정확 한 내용을 확인하는 데 다소 어려 움을 겪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아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정말인가?"
테오도르는 두어 번 더 되물었으 나 대답은 여전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곧이어 그는 이사벨라에게 이렇게 전했다.
"한서하가…… 보이지 않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