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나는 한동안 크로노스를 빤히 바 라봤다. 거대한 모래시계와 눈싸움 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말했잖아.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까? 꿈쩍도 안 한다고."
옆에서 조잘대는 소리는 무시했다.
"그러니까 이만 포기하고……
휙휙!
나침반이 헛소리 집어치우라는 듯 이무기 주변을 정신 사납게 날았다.
"으악! 뭐야!"
녀석이 기겁하자 나침반은 위협적 으로 침을 빙그르르 돌렸다. 어찌나 세게 돌렸는지 바람이 살짝 일었다.
나침반이 내 옆에 따라붙으며 크 로노스를 가리킨다. 더 앞으로 가보 라는 듯이 재촉했다.
저벅, 저벅.
내가 앞으로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크로노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뭐야…… 한 번도 저런 적이 없 었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 는 두어 발자국 더 나아갔다.
조심스러운 손길을 크로노스에게 뻗었다.
톡.
손끝이 닿는 순간.
-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성스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한서하.
동시에 화악! 강한 빛이 나를 삼 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주춤거리며 뒷 걸음질 쳤지만 이미 나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 놓여있었다.
사방이 흰색인데 코앞에 크로노스 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 다시 날 찾아왔구나.
역시. 내가 회귀 전에도 크로노스 를 찾아왔던 게 분명했다.
"내가 회귀한 것도 당신 때문인 가?"
-나 때문이라니. 네 부탁을 들어
준 것뿐이었는걸.
"내가 부탁한 건 시간을 돌려달라 는 게 아니라, 오염을 되돌려달란 거였을 텐데."
회귀 전의 나 역시 지금과 똑같은 용건으로 크로노스를 찾아왔을 테 니까.
- 그랬지.
"근데 왜 오염이 아니라 세상을 통째로 되돌려버린 거야."
-그 이유는 말해줄 수 없구나.
크로노스가 작게 웃는 것 같았다.
"그럼 이번엔?"
회귀 전의 일도 궁금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당장이었다.
"이번엔 오염만 되돌려줄 수 있겠 어?"
-오염만……. 못할 것도 없지.
크로노스가 뒤에 덧붙이는 말만 아니었더라면 훨씬 기쁘게 받아들 일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가만 치른다면 말이야.
나는 얼굴을 팍 구겼다.
긴장감 어린 공기가 주변을 휩쓸 고 있었는데 셀만 태연한 얼굴이었 다.
그는 제 목에 들이밀어진 칼날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도리어 뻔뻔하게 되묻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 귀가 안 좋아 지셨나? 기억 못 한다니까."
시온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세드릭인지 뭔지. 난 처음 듣는 데?"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시온이 칼날
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칼날에 빛이 반사되며 순간적으로 번쩍, 요란한 빛을 냈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네 목숨으로 갚아라!"
후우우욱!
검이 셀의 목을 향해 내리꽂히기 직전이었다.
채앵!
직전에 칼날이 멈춰 섰다.
다름 아니라, 셀이 허리춤에 달린 붓을 꺼내 들고 칼을 맞받아친 것 이다.
"……어떻게?"
구속구는 어떻게 푼 것이며, 마력 제어구는 어떻게 됐단 말인가.
평범한 붓으로 검을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마력을 이용해 붓을 강화한 게 분 명한데, 마력제어구를 단 상태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셀이 씨익 웃었다.
"그러게?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투둑.
그의 손목에서 마력제어구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애초부터 제대로 채워진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 잘 생각해보라고!"
타앗!
셀은 검을 튕겨내고 천장 위로 뛰 어올랐다. 부족한 점프력은 마력으 로 대체했다.
"저놈을 잡아라! 어서!"
기사들은 닭 쫓던 개처럼 셀을 멀 뚱히 바라보다가 시온의 불호령에 서둘러 움직였다.
우선 천장 위로 올라갈 만한 사다 리를 갖고 와야 했다.
잠시 시간을 번 셀은 천장에 큼지 막한 문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니엘 경!"
시온이 못미더운 기사들을 내버려 두고 다니엘을 찾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죄송합니다, 폐하! 아무래도 녀석 이 뭔가 손을 쓴 것 같습니다. 미 리 알아채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당장 저놈을 잡아다 내 앞에 끌 고 오게!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해선 안 될 거야!"
시온은 분을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우우우웅!
그때 셀이 천장에 완성시킨 문이 마력을 받고 현실로 나타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붓으로 선을 연 결한 것에 불과했는데 순식간에 진 짜 문으로 변해버렸다.
"이 문을 열면 누가 나올까요〜?"
셀이 장난스럽게 퀴즈를 냈다.
* * *
세상만사 공짜는 없는 법이다. 하 지만 아이템을 발동하는 데도 대가 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일반적인 아이템들은 자아가 없으 니까 말이지..
물론 노이트, 비르디아처럼 자아가 있는 아이템들은 그 시전자를 가려 받기도 했다.
크로노스 역시 최소 SSS급 성물쯤 되어 보였으니 대가를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다음 나는 크로노 스에게 물었다.
"뭘 원하는데?"
내 말을 기다린 것처럼 크로노스 가 뒷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세상의 오염 을 통째로 되돌린다는 게 쉬운 일 은 아니다. 나로서도 부담이 꽤나 크지.
"그래서?"
-단순히 내 힘을 쓰는 걸 넘어서 내 '신격'을 소모해야 한다는 거다.
"신격?"
생소한 단어에 내가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크로노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 모든 '신의 조각'들은 그 자체로 신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단다.
이미 들은 바 있는 이야기였다.
- 신의 조각이 자신의 사용자와 함 께 업적을 쌓거나, 오랜 시간 속에 서 지혜를 연마하면 이른바 '신격' 이란 게 쌓이지. 인간들 영혼의 '격'이 높아지는 것처럼.
- '■성좌에 오르려는 욕심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니.」
비르디아의 예언이 머릿속을 맴돌 았다.
노이트에게 듣기로 그 신격을 높 이는 지름길이 바로…… 격이 높은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는 것이라 했 지.
-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신격을 전부 사용해도 오염을 되돌리기엔 부족하구나.
저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그런데 마침 내 앞에 서 있는 네 영혼은 놀라우리만치 고결하고 격 이 높으니.
-「욕심을 버릴 때, 승리가 그대 와 함께하리라.」
비르디아. 당신은 이 상황이 올 것 을 직감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정확 한 예언을 내릴 수 있었겠어.
-네 영혼을 내가 흡수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겠느냐?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사용자 에게 경고합니다!]
[알림: 특수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저자가 하는 말이 아주 수상쩍 다고 조언합니다.]
[알림: 특수탄환 '관통하는 철화' 가 당장 저 모래시계 놈을 박살내 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 다.]
노이트가 격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알림을 띄우는 것뿐만 아니 라 총신을 바르르 떨기까지 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크로노스가 내 영혼을 탐내고 있 다는 것쯤은 나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 이제 말해줘도 될 것 같구 나. 네가 회귀한 이유를.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회귀 전의 너 역시 나를 찾아왔 었다. 그때도 내 신격은 부족했고, 네 영혼은 고결했으나 부족한 신격 을 채울 만한 기준점엔 미치지 못 했지.
"그래서 날 회귀시켜…… 격을 더 높였다?"
- 그렇단다.
허, 하고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 다.
-그러나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거 치면 네 영혼이 누구보다 아름답게 세공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단다.
크로노스는 무척 즐거운 듯이 말 했다.
나는 한 번도 내 영혼을 직접 마 주한 적이 없지만, 그는 아주 귀한 다이아몬드를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굴었다.
-놀랍게도 네 영혼은 내 예상보다 훨씬 성숙했구나. 많은 일들을 겪은 모양이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회귀 전의 나보단 지금의 내가 훨 씬 다양한 것을 경험한 게 맞았으 니까.
이전의 나는 당장 목숨을 부지하 고, 전쟁을 헤쳐나가는 데 급급하여 주변을 잘 살펴보지 못했다.
반면에 지금은 내 팀도 있고, 가족 도 있고, 동료들도 있었다.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회귀 전의 네 선택을, 지 금의 네가 똑같이 고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노라.
크로노스가 엄숙한 목소리로 되물 었다.
-네 영혼을, 이 세계의 평화를 위 해 바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다면 나는 거절의 말을 내뱉고 싶었다.
전쟁이 끝난 뒤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이 두 눈 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으니까.
별것 아닌 일로 투닥거리고, 표연 원이 오전 수업에 늦었다고 후다닥 뛰어가고, 혜원 언니가 역천을 경비 회사로 돌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런 광경들 속에 나 역시 함께 하고 싶었다.
어쩌면 다정 언니가 권유했던 것 처럼 다시 학교를 다닐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혜원 언니와 함께 역 천에서 일할 수도 있고.
나라고 왜 그 일상을 누리고 싶은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무슨 대가 를 치러서라도 그들에게 일상을 돌 려주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싶 은 마음뿐만 아니라, 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꿈 틀댔다.
역설적이게도 그 마음이 내 선택 을 재촉하고 있었다.
"네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 어?"
- 얼마든지.
"정말로…… 내 영혼만 내어주면, 이 세상의 오염을 되돌릴 수 있냐 고."
-물론이지.
크로노스가 선뜻 대꾸했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사용자 에게 미쳤냐고 반문합니다!]
[알림: 특수탄환 '아늑한 바람'이 사용자에게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만류합니다.]
[알림: 특수탄환 '쏟아지는 불꽃' 이 그러면 안 된다고 울부짖습니 다.]
노이트가 바르르 떨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무시했다.
노이트 역시 에고를 가진 리볼버 였지만 내 의지 없이 스스로 움직 일 만한 힘은 없었다.
그러니 알림만 울릴 뿐 내게 총을 쏘진 못하고 있는 거였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답답하 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 * *
쨍그랑!
유리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 산조각 났다.
"으악! 죄송해요. 제가 얼른 치울 게요!"
차준이 황급히 빗자루를 갖고 오 며 말했다.
테오도르는 깨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어쩐지 불안감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한서하. 또 이상한 짓을 하고 있
는 건 아니겠지?'
그는 톨룩과 지구가 각자 자신들 의 사활을 건 전투가 부디 무사히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감주지 못하면서 타다다닥, 손가락 끝이 피아노를 치 는 것처럼 테이블 위를 노닐었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다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